사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에 조건 되어진 하나님의 의를 말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구분하여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을 구별된 개념으로 사도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두 사람의 갈등을 한 사람 안에서 표출되는 것도 말했는데(롬 7:21~22) 이를 두 개의 법으로 표현하였고 로마서 8장에서는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여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두별된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며, 하나에 두 개의 법을 가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도의 증언을 통해 계속 그 의미들을 파악하게 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은 옛사람의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새사람의 행위로만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고 있었던 신적 의상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일어서서 살게 된 것이고, 이것은 영혼에 어두움을 가져왔고, 그 어두움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을 상실해버린 무지와 결함의 상태다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모든 지식에 무지와 결함을 함의된 왜곡된 지식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하여도 알지 못하는 왜곡된 지식만을 가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왜곡된 지식은 하나님의 선에 결코 이를 수 없는 무질서하고 부조화한 지식으로의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이 통틀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선에 조화되지 않은 모든 지식으로의 행위를 말하고 죄의 본질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영혼의 지성에 있는 모든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아서 존재하는 사고하는 순간순간을 언제나 자신을 피조물이라는 근본 개념으로부터 사고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설령 사고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바르게 갖지 않습니다. 피조물이라는 근본 개념은 순수하게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주어진 조건이 아니고는 자기스스로 생성하거나 만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혼의 지식까지도 하나님께서 선재하시는 본유지식에 의해 조명되어주어야 진리대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의 지성은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그런 창조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해 줌으로 인한 창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의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이고,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생성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대로 살면 그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 되어 그 지식으로 사는 모든 삶의 책임은 하나님의 책임이 되어,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삶을 드러내는 피 사용자의 입장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책임과 하나님의 책임을 분명히 구별하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지으셨는데 아무조건이 없이 무조건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본유지식은 말 그대로 이미 모든 사물과 객체 그리고 상황과 환경을 가진 지식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지식의 조명으로 인하여 동일한 의미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뜨겁게 토론되고 있는 즈음에도 지식을 사람이 지식을 가지는 능력에 관하여 일치하고 소통 가능한 지식을 동일하게 가지는 능력을 가진 것은 창조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진화에서 소통가능한 동일한 지식을 생성하여 가진다는 논리는 결코 증명될 수 없는 이론입니다.
믿음과 죄, 의에 있어서 사람이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영혼의 지성에 이 지식들이 선재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하는 행위들에서 진리에 적용되는 사람의 삶을 구별해 보았습니다. 가인의 영혼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지식으로 인식하였고 인식된 대로 행하였으나, 아브람은 자기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지각되도록 지식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아브람의 영혼에 말씀을 새겨주심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아브람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행위들을 할 때 지성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성장시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아브람의 새 사람을 의미하고 중심으로 계속 성장해 가는 것을 새사람의 성장, 믿음의 증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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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된 사람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옛 사람은 결코 믿음을 드러내는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가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만나서 말씀을 들었으나 그의 영혼은 관계한 하나님을 본질 그대로 인식하는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종류를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그 새겨진 말씀에 의해 하나님에 관하여 자기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대로 행하는 것이지만 옛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듣고 감화되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행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씨는 말씀이고 이 말씀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가 사람의 영혼에 새겨졌을 때 사람은 이 씨에 의해 진리인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고 이 지식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을 구별하여 말씀하셨고, 사람이 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에 대입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는 것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셔서 부르시는 소명이 사람에게 인식되도록 새겨지고 새겨진 그 말씀에 의해 자기지식을 가진 상태를 중생 곧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그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상태에서 이 말씀에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으로 인하여 말씀에 관하여 지각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가지게 되는 상태까지가 중생입니다. 중생은 거듭남을 자각하고 전인으로 인식하는 상태를 말하고 이 상태가 옛사람의 자기를 볼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이 시각으로 선하지 않은 자신의 옛 삶을 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드러났을 때 아직 옛사람과 새사람이 함께한 자신을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칭의를 인식합니다. 바로 이것이 몇일 동안 우리가 살펴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지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