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롬4:1)

생명있는 신앙 2014. 1. 20. 07:19


먼저는 아브라함의 삶의 한 장면들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삶과 대비하면서 그 차이점들을 수정하고 거울같이 비춰주는 삶의 사건들로 인하여 우리가 닮아 가야할 신앙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삶을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들여다보면서 그의 변화를 우리의 몸에 답습하며 우리의 영혼에 지식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의 신앙도 아브라함을 닮은 신앙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리가 온전한 신앙을 갖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오랜 시간은 축소하여 보여주는 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본래 아담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계획되어진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함으로 입증한 것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의 선이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의 기준인 선은 모든 사역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사역에 아브라함이 택함을 받은 것은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낙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이전에 계획하심으로 인해 존재가 예정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러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들었지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땅을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쁨 보다는 무거운 중압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아직 아무런 확신을 가지지도 못하고 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반신반의하며 말씀에 이끌려 왔는데, 지금 자기의 상태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으로서는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그 신은 하란을 출발하기 이전에 자기를 부르시던 음성과 같고 그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던 약속대로, 가나안에 이르러 그 지시함을 받음으로 자신이 하란에서 들었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듣고 기뻐서 제단을 쌓았지만 그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그곳 주의를 돌아 벧엘와 아이 사이에 이르러 그곳에서 다시 제단을 쌓고 드디어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실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땅, 모레 상수리나무 주위의 땅은 아마도 사람이 살기에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긴 여행의 정착을 위해 땅을 찾다가 그곳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곳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절한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땅은 이제 갖 부족으로 태어난 신생 부족에게 적절한 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기존의 부족들이 그 런 땅에서 자기의 부족을 성장시키고 살찌웠을 것이지만 실지로 그런 땅은 안전한 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많은 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가 있고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소유지에 아브라함이 발을 들였을 것이고 그 땅의 주인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나안 사람이었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이를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사건이라는 충격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축복 앞에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게 되었는데 그것의 의미는 그 말씀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자기를 이끌어 온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표시를 할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그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는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아직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아직 인정받을 믿음을 갖지 못하고 그 믿음이 삶에 있어서 어떤 동기를 유발시켜 행동으로 옮기게 한 삶의 변화를 가져 오는 아주 작은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삶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 없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경험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 부족들이 발생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종교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모두가 자기들의 신이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서 부족을 시작하게 하지는 않았고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분할 받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이 신의 음성을 듣고 신생 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식으로부터 종교의 대상을 만들어 자기의 의지를 심어 종교화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아브라함이 부족을 시작한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모든 부족들의 시작과 구별된 종교적인 면입니다.

어쩐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브라함은 부족을 이끌고 벧엘과 아이의 사이에 이르러 그곳에서 다시 제단을 쌓고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전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신 것에 대한 반응으로 드린 것이지만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드리는 제사는 순전히 자기의 의사를 표하는 고백이 되었고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이름이 영원히 불려질 여호와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벧엘과 아이사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하는 제단을 쌓은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대표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인정을 받기 이전에 제단을 쌓은 것으로 사람이 순수하게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비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커졌고 그 의지가 행위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 까지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의 관계였고, 그 경험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주관적인 것이었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해야 할 어떤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나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두 번째 만나고 다시 그 자리를 벗어나서 아이에 이르러 자기의 진들을 치게 되고 뭔가 마음에 요동이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을 묵상할 때 순수하게 사람의 감정을 대입하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믿음 중심으로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