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상속자(롬4:13)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안타깝게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일찍 이 생을 마감한 형제들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이 생을 마감함으로 불행한 운명을 향하여 줄달음 친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면 이방인인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감사해야 할까요?
어쨓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가 이방인을 존재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있어서 이방인의 운명이란?
존재와 죽음, 그리고 존재하면서 영혼으로 얻었거나 스스로 생성한 지식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영원한 흑암에 가두워지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흑암에 가두어 지는 이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인데, 본질상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정욕의 열매로 태어나게 되는 것을 허락받은 존재이므로 창조 계획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주제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는 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 뜻이 무엇인지 밝혀지기 전에 하나님께 있어서 아브라함과 관계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조시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계획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이 아들들이 아담 안에서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아담이 범죄 함으로 죄에 빠졌고, 그들이 이 세상을 태어났을 때는 이미 죄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람이 되자 그들에게 정욕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잉태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하나님도 없는 불행한 미래를 안고 태어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최소한의 삶의 환경에서 사람으로서 누릴 것을 모두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였습니다.
이방인들의 미래는 어둡고 비참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비극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도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비참한 미래를 앉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도 죄는 그들의 신분을 여지없이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미래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불행에 처하는 것을 단순히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미래를 그냥보시고 계시는 것이 무책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구속사역의 중심이 되게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기초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해서 온전히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쉬지 않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으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예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이, 아브람도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고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그 삶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삶을 내동댕이쳐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수없는 인생의 로정에서 만난 갈림길과 갈등, 그리고 삶의 기로에서 문제를 만나고 괴로워 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아브람이 두려운 상황을 직시하고 절망과 위기에 처해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타나 주셨고 그때 비로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살펴봤습니다. 이 때 아브람이 드러낸 믿음은 자기의 본성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고, 아브람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들이 쌓여서 지성에서 조명을 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싹이 자라서 드러낸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 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아브람과 같은 계획을 가지시고 계시는데 그 계획을 믿고 의지하고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이 됩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창세기 15장에서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믿음을 인정받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전환했습니까?
아닙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로마 교회를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이 혼란스런 문제들을 정리해주기 위해 믿음의 비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지만 실지로 아브람에 관하여 모든 정보를 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뜻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변증하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에 나타난 주제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등을 폭넓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람의 삶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진보를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을 인정받은 그 이후에 어처구니없이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 아들을 낳는 우를 범합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정욕에서 비롯된 실수임을 드러나게 되지만 이로 인한 인류에게 남겨진 폐해가 주는 문제들이 오늘 우리 후손들이 고스란히 짊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다면 오늘 중동의 세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동 지방에서는 다른 페르시아인들의 등장이 이스라엘과 갈등을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한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들의 싸움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아브람의 이런 실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신학자들을 보됩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시간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정욕의 아들 이방인에 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욕의 아들들은 잉여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방인들을 낳을 수도 있고 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에 속한 사람들이어서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지만 이 지식을 알아 이방인들을 낳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있었다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얼마든지 않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마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교리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태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아신바 되었을지라도 죄가 없었다면 이방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방인의 존재 근원은 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방인이며 정욕의 아들들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원은 죄입니다.
정욕의 아들,
죄의 열매,
부끄럽다기 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점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된 우리의 정체성 앞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존재가 축복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는 우리의 존재가 비참한 미래를 향하여 줄달음치는 비극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해 왔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비참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도덕하고 정신 나간 사람들의 종교에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이와 같은 지식들이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결여 되었기 때문에 정체성을 진리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 가인과 아벨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죄의 열매인 이방인에 대하여 결코 하나로 결합되지 않은 평행선상 위에서의 경주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시해서 이스라엘을 내세우셨고, 이스라엘로 이방인과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이방인과의 관계어서 직접적인 갈등관계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직접적으로 갈등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이방화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과 징계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정결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가족이기를 추구하는 의도에서 나타난 갈등과 징계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들로 기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정결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전한 신앙의 삶의 모습을 드러낼 경우 하나님의 축복이 영광을 누리게 된 반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이방화 되어갔을 때에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징계가 드리워져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임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사랑하시지 않는 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고 그들을 향하여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비참한 운명의 미래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이방인의 이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바른 신앙에 접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근원은 죄에서 시작되었고, 정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 곧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한 사람이 아닌 근원이 죄이고 정욕에 뿌리를 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해 계획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영원한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아들 이삭과 근원이 죄로부터 태어난 바울의 표현에 따른 종의 아들과의 구별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실지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아브람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브라함의 상속자이지만 실지로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었기 때문에 상속자의 자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상속이란 단순히 아브람이 가진 재산을 이어받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속은 아브람의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