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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진노를(롬4:15)

생명있는 신앙 2014. 7. 11. 06:54

율법은 진노를

 

우리는 언약에 관하여 구체적인 설명들을 듣지 못하고 다른 말들만 길게 듣고 오다가 율법이라는 주제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며, 반드시 율법을 주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사도는 언약의 동기를 율법으로부터냐? 믿음으로 부터냐? 라고 법이 주어지게 된 동기에 대해서 믿음과 율법을 대비해서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곧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부터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상속은 율법으로부터 라고 주장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열등의식을 일으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당당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세상의 상속자라고 분명히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식이 없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속자는 이 세상을 물려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당당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세상의 상속받은 사람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너무도 분명히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상속받은 사람이라는 명확한 신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라 칭하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대해 자기들의 위치에 대해서 얼마나 왜곡된 지식에 빠져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세상의 상속자에 관하여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상속자는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무엇을 상속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로부터 분리 하여 이끌고 나와 가나안을 돌면서 이룬 가족들과 자기의 재산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상속자라는 말은 [ 야라쉬 ] “붙잡다, 상속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기가 이끌어온 자기의 후손들과 부족을 자기에게 후손이 없으므로 다메섹 엘리에셀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거의 유언적인 언어로 자기 투정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속이라는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셨습니다.

[예레사]토지, 영지,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창 12:7에서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나타나셔서 약속해주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브람에게는 자기의 토지가 없습니다. 그는 정착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고 자기의 땅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가나안에 기거한지 오래 되었으나 자기와 가솔들을 위해 성을 쌓지 못하는 떠돌이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돌로 축조된 성이 아닌 가죽으로 된 장막 안에 기거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흩어져 사막의 미아가 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나를 이어 이 집단의 후계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한 것은 토지와 영지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수유 땅이 없었기 때문에 말에도 없는 것을 예상하고 말하지 않았고,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의미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실 것은 영토였습니다.

이 영토는 자기에게 주실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아브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유지가 될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도 자기와 함께하고 자기가 마음에 염두에 둔 지명한 사람에게 부족을 맞기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셔서 그들에게 가나안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인간적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까지 인간적인 의미를 가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뜻도 인간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은 창조의 계획을 바로잡으시는 것이었으며 이 세상에 그 계획을 명확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곧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인간적인 정욕와 의지가 완전히 상실된 때에 하나님이 순수한 역사로 일하실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시려면 여러분 안에 있는 타락된 정욕을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이 일은 간단한 자기 싸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열심을 내는 자기로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실천해 주셨습니다.

정욕도 이 세상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아야만 했는데 그에게는 가솔들이 있고, 자기는 가솔들의 수장이기 때문에 자기 책임을 위해 자기 위치를 지켜야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브람에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모두가 아브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책임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의식으로 사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대부분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과 세상의 책임과의 사이에서 갈등하지도 않고 세상과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종교 의식적 삶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소돔 전쟁 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그날까지의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종교적 의식을 가진 상태의 삶입니다. 우리도 아브람의 삶을 표준으로 하여 우리의 삶을 비춰보면 믿음을 인정받은 상태와 그 이전의 상태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 우리가운데에는 확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그 날의 경험을 자기의 의식으로 느껴보지 못하고 종교적 의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되어집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기 성찰은 그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소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그날 밤 아브람은 아주 초라한 자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가나안에 이르고 10여년 동안 온갖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잘 모면해 왔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람은 자신의 초라한 진정한 모습 자기 정체성을 파악한 것입니다.

현재 자기는 단순한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견고하게 돌로 축조된 성을 가진 부족과 겨루는 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상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하루 살이이와 같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비참한 처지의 운명적 상태를 보았습니다.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임했고, 공포와 무서움이 엄습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신의 운명이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너무도 위태로운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졌습니다.

저는 이 시각을 하나님을 만나고 알았던 지식과 그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서 아브람을 조명함으로 인해 말씀의 지식으로 자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지식으로 자기를 보았을 때 삼백이 넘은 군대를 훈련하여 적들과 대적할 수 있고 수많은 양떼와 소떼가 있으며 자기중심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우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보잘것없는 판단인지 알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자기의 판단은 휴지조각과 같이 바람이 불리면 사라져 버릴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주위의 대적들이 일어나 한번만 공격하여 공격해 온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자기를 지켜주고 유지되도록 해주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에 다다를 수 없고 이 광야에서 시랑이의 밥이 되지 않고 버티면서 이렇게 살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을 아브람은 알았고 자기의 속에서 함께하시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연약함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아브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조명함으로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의 지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상태를 거듭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창조 세계에 드디어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진리 지식에 의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전적인 진리의 지식에 의한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제 어린 아이가 태어난 상태처럼 진리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드디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만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극히 일부분의 지식만이 진리의 지식일 뿐이고 게다가 이 지식은 이미 있는 모든 지식과 구별된 지식이기 때문에 융화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타락되어 있는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으나 그 안에 하나님을 만남으로 들은 지식의 말씀들은 진리이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심으로 그 씨를 뿌렸고, 그 씨는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에 심겨졌다고 아브람의 영혼에서 지식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 지식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은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기 때문에 거짓된 지식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조명하여 이해함으로 오히려 진리를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고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만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지 못했지요.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떠나 에녹에 거하며 성을 쌓고 타락된 문화를 창조해 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로 볼 때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닌 지역에 국한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요? 확실히 가인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인의 영혼의 지성에서 만난 하나님을 인식하는 지성이 왜곡되게 지식을 생산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왜곡되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인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의 지성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에 의해 진리대로 하나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 수납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율법을 주시는가?

그것을 알면 사도가 말하는 율법이 누구에게 주어졌으며, , 그리고 그 목적을을 분명히 밝히므로 율법과 믿음의 사이에서 언약의 위치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