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
진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헬라어 όργή “분노” “분개” “진노” 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θυμόϛ “열정”"욕정" “분노”“ 진노” "격노" 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된 동의어로 이 단어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없습니다.
όργή 는 헬라 신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서 생활상 기본적인 도덕이나 법률중 하나를 위반함으로써 야기되었고, 이로 인하여 질서가 회복되고 신의 뜻이 성취된다는 의미로서 이해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이루게 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κατεργάξομαι 는 전치사 kata(~에 대하여) 와 έργάζμαι(‘일하다’ ‘노력하다’) 에서 유래하였으며 동사로서 “이기다” “성취하다” “만들다.” “준비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분노하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명령하실때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지적인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쌍방의 인격적 지각이 동일하게 작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각과 사람의 지각이 같은 코드로 연결되어 communication 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행위언약을 명령하시려면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과 의도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는 “소의 귀에 성경을 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소통, 이는 쌍방의 지적인 이해를 요구합니다.
이는 너무 엄청난 사실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자기의 인격으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지적인 교감을 가진 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아니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쌍방은 지적인 지각을 가질 수 없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의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판단의 코드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런 지각을 가질 수 있도록 창조하셨고, 나아가 행위명령을 하셔서 사람의 의식에서 인식되고 이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지적인 지각으로 명확하게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지은 존재들에게 동일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명령하고 요구하며, 소통하는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동등의 입장에 까지 설수 있는 거만하고 오만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명확한 지식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불만과 오만과 거만을 서슴치 않고 드러낼 것입니다.
마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천연덕스럽게 하나님을 향하여 변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순수한 타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도 존재하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도 존재하실 뿐입니다.
서로 얼굴을 돌리면 각자 자기의 울안에서 자기의 삶의 터전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놋 땅으로 가서 성을 쌓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영역에 오실 수 없습니다.
자기의 영역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영혼 안에 있는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이 소통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히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제가 다시한번 말씀을 드리지만, “자기 정체성의 발견”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우리의 정체성을 거울과 같이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읽어보십시오.
읽는 사람마다 의미를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를 통해서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스라엘-이방이라는 삼각관계 안에 어느 편으로든지 연결되어지는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옆의 그림에서 보면 3가지의 관계를 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창조적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택한 백성, 미리 부르신 백성, 약속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족으로서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지으시기로 계획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죄의 결과적 관계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관계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여 정욕을 일으켜 태어났을 뿐 하나님의 창조계획에는 이방인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잉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허용적 작정의 관계입니다. 이는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심으로 허락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정욕을 일으키고 이방인들을 낳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이방인에 속합니다.
성경은 이방인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우리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고, 하나님도 모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태어나게된 순수한 죄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존재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영원한 지옥에 버려져야하는 비참을 앉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비참뿐입니다. 복음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지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왜면하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겨지지 않았고 새겨질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죄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존재에게 성령의 조명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구원을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 구원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열매라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해 보내셨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것,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
우리의 미래는 영원한 지옥의 비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죄의 열매인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을 마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8:23)”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사람이 우리에게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게 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사도는 로마서 7장에 가서 의미들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근본적으로 율법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가진 목적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