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고린도방언(고전 12장10)

생명있는 신앙 2009. 12. 3. 09:46

본 내용은 방언 연구의 일부분을 편집한 내용입니다.

 

고린도서 방언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행함을 ,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 고린도 교회의 방언문제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관한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아래의 조건들을 살펴보면 본문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고 기뻐함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 참으로 죄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사모하는 자에게 방언 주심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시므로 나타나는 방언의 현상들이 다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이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방언이 성령님의 마음에 합당할지 아니면 합당할지는 모르나 아들이 떡을 달라면 돌을 줄자가 어디 있으며, 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자녀들이 신앙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은 방언정도야 성령님께 그다지 큰문제 될것이라고 생각하실지 판단할수 없으나, 성령께서는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허용하시는것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기도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짓과 타협하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면을 통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합니다. 2000여년을 넘어 시간 이동을 하여 그시간으로 가 본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지만 지금 그 시간을 동경한다는 것 자체가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간 이동에 관한 생각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생각인지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주는 마음은 참으로 놀라우리만치 은혜스러운 것입니다.

예전에 신앙의 갈등과 고민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개의 은사를 누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고 계속 묵상중인 주제이니다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있어서 불신자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묵상을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눌리는 큰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큰 고통의 아픔이 있었고 깊은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있고난후 나의 죄들이 슬라이드 모니터로 실행되는 듯한 수많은 죄들을 목격하고 깊은 슬픔에 빠져 한없는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슬라이드 한장 한장이 마치 시간이동을 하는 것과 같이 이전의 삶의 세계로 지나쳐 온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슬라이드와 같은 시간이 현재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동은 정말로 은혜스런 일이고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그런 것은 없지요?

그러나 방언에 관해서는 정말로 시간 이동을 해서 그 사건의 장소를 직접 목격 했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건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글을 쓴 것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에게 실망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것을 거절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성도들에게 주셨을 것이다. 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은 광야에서 힘과 정력이 모자라 고기를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매추라기를 이빨사이에 끼이도록 먹게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함으로 서서 하나님의 영광의 그늘 아래 거하며 기쁨을 함께 누리려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우선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혹시 통변의 또다른 은사가 필요한 비 인격적인 행위를 기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행하심, 능력, 영광을 노래해도 한이 없는 즐거움일탠데 굳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혼란함 속에 빠져들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지어낸 기쁨과 내 마음에 생각하는 그런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속이는 마음을 갖지 않고 깨끗한 것일수록 기쁨이 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됩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연구를 해 겠습니다.

1). 공통본문연구

     연구하고자 하는 본문은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 문제 인데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에 폭넓게 언급되어 있다. 먼저 언급된 본문의 순서대로 살펴 보봅니다.

 

본문에는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들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10)"라고 기록되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본문에 기록한 저자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에 관한 개념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확인하려고 생각을 바꾸어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필자는 앞에 설명한 "방언에 관하여 "라는 제목에서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의 개념”을 설명을 하였다. 바울이 방언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에 관한 중요한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학자들은 사용되는 단어에 의해 의미가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내용으로 설명한다는 의미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서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와 독자들이 다르듯이 고린도서와 사도행전의 차이는 사용하는 문자와 단어는 저자만이 가지는 독특한 의미와 개념들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 지식들을 하나님에게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공통의 분모를 가지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저자가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는 단어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어와 저자들이 사용하는 문자로부터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아주 많은 지면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음에 차근차근히 설명을 하고 이곳에서는 성경적인 의미에서만 방언에 관한 내용으로 말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교회에서의 은사에 관한 말을 하고 있급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과 공통적인 내용은 (1) 고전 12:28~31, (2)14장 1~39, (3) 행전 19:1~7,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성경에 사용된 본문과 같은 공통 본문

(1)고전 12:28~31 은 본문과 같은 내용이므로 공통본문이라고 볼 수 없고 본문의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2)14장 1~39 은 본문의 내용에 관한 설명이므로 방언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3)행 19:1~7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는데 ‘방언’에 관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개념을 말하는 공통 본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떤 독자들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행 19:1~7을 이해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방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코 바울의 방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공통본문에서 나타난 본문을 연구하고 우리가 살펴 보려고 하는 분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 역사적 배경연구

역사적 배경연구란 연구하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에 관한 역사성에 관한 연구입니다. 과연 이 본문이 차지하는 역사는 어느 시기이며 누구에게 본문이 전되었으며,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연구 분야이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지만 대부분 정통적인 신학자의 입장에서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결코 간과하 않은 해석입니다. 이 연구에 따라 본문 고린도 전서 12장9~10은 역사적 시간은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습니다. 그러면 보나마나 바울이 고린도서신을 언제 어디에서 왜 기록하였는가? 그것이 그 배경이 역사적인 배경이 될 것입니다.

바울의 방언을 말하려고하면 사도행전 19:1~7을 연구해 보아야 하고 사도행전 19:1~7을 알려고하면 사도행전 10:44~46에 나타난 베드로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낼료의 집에서의 방언에 관한 것을 연구하여 그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방언의 내용을 알려고 하면 사도행전 2:1~11에 나타난 방언을 알아야 합니다. 곧 바울의 방언을 알려면 위의 세가지의 일치한 방언에 관한 개념을 확보하고 그것을 고린도에 적용하는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에서의 사역

 

우선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도중 고린도에 들려 교회를 세웠습니다. "행 18:1-11에 누가가 기록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서를 제 3차 전도여행도중 에베소에서 기록하였고 그 시기는 AD 55년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내용들이 숨겨져 있는 장면을 많이 지나쳤는데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고 지나가야하는 내용들입니다. 

사도행전 18:1~11 에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교회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세례를 준 사람이 몇 사람 없다고 고린도서 1:14~15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 곧 잃어버린 영혼들이라고 표현하는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게 되었고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를믿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례가 중요하지 않았고 양육이 더 중요한 과재였으며 고린도에서 바울이 성령세례를 행했다는 기록을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고린도에서는 성령세례를 통한 은사가 나타난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하여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로 말미암아 성령 세례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후 사도행전 19장1~7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아볼로제자들에게 안수하고 성령세례를 베풀 때 방언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의 마음 중심에 나타난 관심을 한가지 더 볼 수있습니다.

사도행전 초기 2장에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도행전 10:44~46에 나타난 고넬료 집에서의 베드로로 말미암아 나타난 성령세례, 그리고 사도행전 19:1~7에 나타난 에베소에서의 성령세례 라는 맥락을 연결하면서 누가가 말하려고하는 의도가 약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도행전에 말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가 큰 틀에서의 맥락은 아니지만 오순절 성령세례와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세례와 그리고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세례를 동일시 하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에게 있어서 방언에 관해서 기록하는 것을 사도행전에 중요한 관심사 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오순절, 고넬료의 집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성령세례와 방언주장은 당시 바울의 사도권의 심을 받고 있는 여러교회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바울이 베드로와 같은 성령에 의한 사도라는 주장을 강하게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고린도 같은 사역의 현장에서 나타난 성령강림의 사건등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바울의 성교사역을 함께 동행하고 보았는데 고린도에서는 에베소에서와 같은 그런 성령세례의 장면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고린도에서는 성령세례로 인한 방언의 역사가 없었고 바울자신도 스스로 고백하기를 고린도에서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없으며 오직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고전1:14~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방언에 관한 어떠한 영향을 줄만한 일들이 제2차 전도여행 동안 나타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방언에 관한 문제가 등장했고 그 문제는 교회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오늘날 교회도 역시 고린도에서 일어난 성령세례의 진위 여부가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해야하는 문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와 또다른 7가지의 문제들이 일어나 교회가 혼란스럽고, 교회는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로 4분되었고 은사문제로 바울의 교회에서의 지지도는 약화되었으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더욱 혼란스럽게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에서 이런 일은 나타나고 있었고 그것이 바울의 사도권을 향한 구체적인 거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권에 관한 도전을 받고 있었고 먼저 갈라디 교회에서 바울을 뒤따라오면서 일어났고, 에베소에 도착하자 마자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방언에 관한 문제를 많은 량을 할애하면서 기록하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방언에 관한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과 같이 방언 문제가 교회에 전체에 확산되어 교회가 잠식되어버릴 만큼 혼란스러워진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쯤해서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서의 성령 사역에 관한 문제를 살펴 보기 위해 역사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회원의 구성을 살펴 볼필요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누구이며 과언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속해 있었는가에 관한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는 세울때 고린도에는 이미 로마에서온 아굴라 부부가 그곳에서 있었고 소수의 무리로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교회에서 설교를 할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아굴라 부부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에베소까지 건너와 교회를 세울수 있는 협력자가 되었다는 것은 바울의 전한 복음이 지극히 정통적이었고 복음적인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작은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었고 오순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오순절을 경험한 자들에게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방언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또한 아볼로에게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거나, 그리고 베드로에게도 아니고 바울에게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갈릴리에서 부터 예그리스도꼐서 생존하였을때 이미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에 작정한 유대인 들이었을 것이며 또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순절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다락방에서 나타난 부활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세례의 역사의 현장에서 세례를 받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므로(핸전 2:10) 오순절방언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로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에서의 방언사건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과 방언을 경험하지 않고 바울을 추종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혼란이었을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경험하고 방언을 목격한 사람들이 볼때 바울에게서 오순절 성령세례와 같은 역사, 곧 사도인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세례와 같은 역사가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과거 바울의 신분에 관한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고 이 말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발바닥에서부터 안개처럼 솟아 올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의심과 회의였고 그 회의는 곧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2) 저자의 사상적 배경

본문은 바울 사도가 직접 기록한 내용입니다.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에서 본서를 기록하였고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 아볼로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를 베풀때에 방언의 현상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저자의 사상적 배경을 연구함으로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성경을 오역하는 오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경험한  방언은 고린도서를 기록할때 저자 자신의 방언에 관한 지식이 됩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때 처음 방언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에게서 비로소 오순절 방언과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로 말미암아 나타난 같은 현상을 에베소에서 경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목적이 바울의 사도권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기록한 것이 확실하며, 비로서 에베소에서 나타난 성령세례와 방언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에게 나타난 동일한 성령세례가 있었고 이것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임재 표징이 사도바울에게 나타남으로 인정받는 사도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므로 바울 자신이 방언에 관한 분명한 지식은 곧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안수할때 나타난 방언 현상을 방언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때 나타난 방언은 누가의 기록과 같이 오순절~고넬료의 집~에베소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방언은 오순절 방언이며 그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방언이라는 것을 고넬료의 집에서 나타난 방언과 같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방언 나타남을 확인하였고, 방언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이 방언이라고 말할때는 반드시 사도행전 19:1~7에 서 나타난 에베소에서의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머리속에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의 방언은 철저하게 오순절, 고넬료의 집, 그리고 에베소를 나열하듯이 각 지방 방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하는 방언은 각 지방방언이고 고린도서에 기록한 방언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각 지방방언을 말하는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3) 본문의 의도

우리는 본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적인 배경와 저자의 사상적 배경을 연구하여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자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자리에서는 본문의 사실적인 내용보다는 본문 중에서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방언에 관해서만 알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방언은 사도행전에서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다른의미처럼 보일수 있으나 방언의 의미는 각국의 지방 방언인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어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가는 현상들이 14장에도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수 있으나 확실한 말의 의미는 각 지방의 방언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고린도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생각 속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 오순절~고넬료의 집~에베소에서의 방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방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기 배로 낳지 않은 아들 의부자식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아들입니다. 곧 의붓아들이 진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위해 안수할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고 성령임재의 표징이 나타났으며 그들에게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방언이 그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이 진리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가 보았고 확실히 경험한 그것이 아닌 다른 방언을 고린도에 기록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의붓자식을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자기배로 낳지 않았는데 아니야 너를 낳을 때 내 배가 아팟어 라고 말하면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4) 성령의 의도

 

5) 해설

앞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동안 성령 세례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두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서신인 고린도 전서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가 언급되고 특히 방언에 관한 내용이 큰 문제로 등장하여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을 차례로 지적하면서 7번째에 대한 답변으로 방언에 관한 문제를12:10,30; 13:1,8; 14:2,4,5,6,13,14,18,22,23,26,27,39,에서 언급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이미 오순절 다락방에서 나타난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오기 전에 일정한 리더자가 없이 흩어져 있다가 바울에 의해서 교회를 이루게 되었고, 바울의 일년 반 동안 사역으로 많은 성도들을 모아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게 되었으며, 바울은 새로운 전도지를 찾아 고린도를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후임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울 사람을 세워두지 않고 떠났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교회를 인도할 적격자를 세워두고 떠났을 것입니다. 

사단은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후임으로 책임을 맡아 선택된 사람은 바울과 같이 능력 있는 지식을 겸비하지 못해서 교회를 온전히 유지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여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파당을 나누게 했으며 일부 교회의 회원들이 각자 자기의 주장을 내세웠고 결국은 여러 가지 이해 문제가 엇갈리게 되어 결국은 의견이 대립하게 되었고 드디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심각할 만한 문제까지 거론하다가 결국 파당을 나누고 만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교회 안에서 방언을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뽐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F. F. Bruce가 말하는 데로 이방인의 종교적 주술행위를 빌려와서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들의 은사 행위는 교회에 심각한 와해를 자초하고 분란을 가중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모함 소리를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다른 사도들과 다른 모습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은사 문제였으며 이 부분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약간 상이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여 그들이 판단하기를 바울은 지식적인 면에서 월등해서 구약을 해석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는데 열심을 가진 휼륭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도들과 같이 이적과 기적으로 나타난 표적이 고린도 교회에서 극히 적었던 점이 다른 사도들과 현저하게 다른 점으로 부각 시켰던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의 모습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고 방언을 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자주 나타났던 것으로 생각 될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관심을 가진 사건이 약 20년 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몇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주장이 바울의 사도권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는 이적과 기적이 동반되고 있었습니다. 그 첫 열매로 방언을 말하는 일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인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은사 문제의 서두에 언급한 “12:1-3의 의미를 알아보겟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영적 은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져 한쪽은 바울파 또 한쪽은 그리스도파, 또 한쪽은 아볼로파로 나뉘어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어조로 비난하고 책망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이 서신은 고린도에 보낸 제 일 서신이고 고린도 전서는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베드로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큰 능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1)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 강림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베드로와 비교해 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성령 강림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가 그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또한 누가의 기록을 영감하시는 성령께서도 반드시 기록에 포함하도록 인도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서 베드로와 같은 성령 강림의 역사가 고린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서 성령의 충만한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증거 했고, 여러 이적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성령 강림의 역사와 같은 사도로서의 결정적인 능력들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령 은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은사문제를 비중 있게 다룹니다. 

고전 12: 1-3 Περϊ δέ των πευματικων, άδελφοϊ, ου θέλω υμας άγνοεϊν.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알도록 말하는 의미일까? 아니면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이제 새롭게 말하려는 의도일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는 고린도 교회의 은사 충만 주장은 교회를 세우던 그때에 자세히 가르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변질되어 무질서하게 되었기 때문에 서신에 언급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은 전혀 그렇게 증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분명히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도만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고(고린도 전서 1:22-23),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διό γνωςίζω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알려 주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방언과 은사 그리고 온갖 이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교회를 세웠다면, 그가 보낸 다른 서신에서 발견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바와 같이”이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전에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문구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바울은 이런 경험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고린도 서신 가운데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이방인으로 있을 때의 일을 기억하라”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온갖 종교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종교들은 지식이 없었고 또한 온전한 교리도 없었으며, 구원의 확실한 지식도 없는 말 그대로 우상에 이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상 숭배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본래 어떤 지식을 근거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지식도 없이 단순히 권위에 억눌린 숭배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2절과 3절의 말은 신령한 것을 언급하기 위한 서론입니다. 

이 말에 의한다면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에 근거한 은사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 다른 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듣지 않았던 것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과 그의 선생임을 거부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능력 있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유명세를 등에 업고 존경을 받으려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는 고린도에 있을 때 은사와 성령 세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새롭게 언급한다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나 은사에 관한 논쟁이 없었는데 바울이 언급했다고 하는 것은 불 속에다 기름을 붙는 격입니다. 

그들에게 이미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의 사도권이 도전 받고 있는 마당에 은사문제까지 언급하여 자신을 더욱 불신하는 쪽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 언급한 은사의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 가운데 스스로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은사를 강력히 행하여 자랑하려했던 사람이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 이였을까?

 

앞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했고 그들 가운데에는 이미 오순절 때에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나마나 베드로파나 그리스도파에 해당한 사람들이었고  베드로파와 그리스도파에 속한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들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소란스럽게한 말들을 듣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하고 그들도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 속하는 것이 정통을 붙잡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신앙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방언으로 말하고 은사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진실한 내용보다는 은사를 더욱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과 이적과 기적을 복음보다 과장되게 추종하려는 주장이 강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신앙보다는 신령하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물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한 의미는 은사 문제로 골치아픈 고린도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더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지금 교회에 일어나 있는 모든 방언 문제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만한 논제가 될 수도 있는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방언에 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어디에서 방언을 경험하엿을까? 그리고 그 경험이 고린도서에 기록할 만한 개념의 방언인지 아니면 바울만이 주장하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감추어진 지식에서 바울이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지 발견해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방언에 관하여 많은 장을 할애하면서 언급하고 있는데 과연 그에게 방언은 어떤 것이고, 그는 어디에서 방언을 경험하였는지, 과연 고린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 과 같은 방언의 문제가 베드로에게 나타난 고넬료 집에서의 방언과 오순절 다락에서 나타난 성령강림에서 비롯된 방언, 또다른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방언의 경험을 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서의 사도적인 표징 같은 역사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고린도에서 있었다면 성경은 분명히 말할 것이고 성경이 그 말을 언급한다면 그 주제는 방언에 관한 분명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바울에게서 어떤 면에서나 자신에게 나타난 방언의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난 이상현상으로 인한 방언이 옳은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 판별할수 없는 것입니다. 

 

필자는 앞에서 이미 사도행전의 방언에 관해 언급하면서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 역사의 현장을 확인 하였습니다. 이시기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기 1년 여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성령께서는 고린도에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아시고 바울에게 방언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 은사에 관하여 분명한 답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2에 따르면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다녀 에베소에 당도했고 그곳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안수하며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고 이때 강림한 성령은 오순절 다락, 고넬료의 집에서의 역사와 동일한 사건임을 사도행전 저자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사도행전의 기록이 철저한 증거와 확인을 거쳐 분명한 사실만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다락, 고넬료집에서의 방언, 에베소에서의 바울에 의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동일한 성령의 역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바울에게 인식된 성령강림에 의한 방언의 개념은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확인할 수 있고 바울은 이곳에서 나타난 방언을 성령의 방언으로 인식된 “바울의 방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의해 확실히 증거한 성령의 증거에 따라 오순절 다락과 베드로 사도에 의해 나타난 고넬료 집에서의 방언과 에베소에서의 방언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서 동일 개념의 방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바울이 고린도서신을 기록 할 때는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으로 인한 방언을 경험한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볼 때 고린도에서 일어난 이해 할 수 없는 다른 방언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의 방언은 사도행전19장 6절에서 인식된 방언의 개념으로 고린도 서신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특수한 토양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외치고 가르쳤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유대인들은 상당수 세례를 이미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교회로 모이지 못하고 교회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