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세상에서의 우리의 역할(마 5:13~16)

생명있는 신앙 2009. 12. 7. 04:52

Toronto 에 온지 처음 예배입니다.

 

자유교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찬송 : 11장

기원 : 시 108

성시교독 : 41번(이사야 65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나 마을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은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13장

기도 : 구성학목사

성경 : 마 5:13~16

설교 :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

 

본문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본서의 저자 마태였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자신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좆으라 하시니 좆으니라(마태복음 9:9)

마태는 자신이 세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를 생각할 때 마다 자기 자신을 항상 직시하고 있는 사람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와 현재 마태의 신분 그리고 마태를 부르시는 주님을 살펴 볼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식민지였고 유대인들은 모든 주권을 로마에 잃어버리고 지배당하는 처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로마의 통치 방법이 통치에 있어서는 유화적이고 문화와 종교를 대부분 인정하는 상태에서 군사와 정치적으로만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와 문화 그리고 언어에 관해서는 현지의 상태에서 유지함으로 지배를 받는 지역마다 각자의 종교와 언어 그리고 문화는 유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총독이 파견되어 지배를 하게 되었고 지역을 분할하여 왕을 두어 통치하게 함으로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나 실지 생활이나 삶에 있어서는 단순히 피지배민족이라는 것 말고는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부자유한 상황이 아주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장 우선 세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면서 정책을 편 것은 문화와 종교와 언어는 예전 것을 그대로 인정하되 정치적으로 필요한 군대나 혹은 세금과 같은 것은 로마법에 충실히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총독으로 부임한 관리들은 저마다 과도한 로마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 뜻하지 않게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민지배가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에 대한 자유를 부여함으로 반발을 막는 요건이 되기도 했었지만 나아가서 로마에 지나치게 충성하려는 제사장들에 의해 종교의 빛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했습니다.

사람마다 세금을 부과했는데 거출하는 방식은 유대인들을 고용해서 유대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유대인들에게 자량으로 세금 부여권을 맡겨 세금을 책정하도록 하여 세금으로 인한 적당한 잉여 소득이 발생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호기심을 갖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세리가 되면 생활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되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세리인 마태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마태에 관해서 알려면 그가 기록한 복음서를 자주 읽어 봐야합니다.

그러면 그의 문장 실력으로 그의 지식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 1장 과 2장을 살펴보면 구약에 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의 전통종교 지식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었고 역사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건장하고 해박한 유대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4:37~39), 신명기(마 4:4),시편(마 4:6, 23:44), 이사야(마1:23, 3:3, 4:14~16, 8:17,12:18~21, 13:14~16, 13:35, 15:8~9,21:5, ), 예레미야(마 2:18), 미가(마 2:6) 등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메시야도래에 관한 유대 주의적 신앙과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는 사람이었고 이사야 선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는 예리한 직관 등은 놀라리 만치 예리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태가 세리가 되었다면 우리는 깊이 있게 그에 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마태복음을 연구하면서 마태가 세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상황을 생각하던 끝에 이런 생각을 해 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으니 개의치 말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고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태는 유대주의적인 전통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베들레헴이나 혹은 유대지역의 전통 있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많았고 가정형편은 말할 수 없이 가난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유대주의 종교의 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으나 막상 가정형편과 생활의 어려움에 부딛혀 자기희생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마태가 세리가 되지만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지라 정직하게 세리를 하다 보니 많은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겨우 집안을 꾸려 나아갈 형편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마태에게 뜻하지 않게 고민거리가 다가왔습니다.

곧 바로 세례 요한의 출현이었습니다.

마태는 평상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자주 읽었고 메시야의 도래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하기는 자기가 세리로 있는 그 순간에 메시야가 오시면 어떻게 하나 라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요단강에 나타난 세례요한은 그에게 아주 비극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서를 언급 나타난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기를 메시야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인 마태는 세금을 거두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두 귀를 쫑긋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났다고”

마태는 그 말을 듣던 순간 이사야 선지서를 생각하면서 자기 대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 자기를 처참한 죄인을 만들어버린 상황을 절망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시지만 저는 그 비극적인 순간은 만난 마태의 마음에 복받쳐 오른 절망과 처절한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배우고 알아 왔던 메시야의 도래가 자기 시대에 다가왔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또한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하고 민족의 반역자가 된 죄인 된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마태에게 부딪힌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철저히 배웠던 유대 종교교육에 의하면 메시아가 올 것이고 메시아는 머지않은 시기에 나타날 것이며 이미 수년전에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있어서 베들레헴이 피바다가 되었다는 사실과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메시야 도래와 백성들의 무지를 마음깊이 생각하고 메시아가 도래할 시기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고 있을 때 가정형편의 어려움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죄인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세요!

마태의 행동을 살펴보십니다.

마태는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유대 광야를 가봤습니다.

마태는 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합니다.

그림을 그리듯이 상세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도 비교적 또렷한 기억을 되살려 들었던 장면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이 선포하는 외침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도래를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나지 않는 세례요한의 모습이 마태의 눈에는 상세하게 보입니다.

이런 기록은 목격자만이 기록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 자리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었고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거침없는 책망을 퍼붓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마태는 이 말을 듣고 있다가 아주 놀랐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정말로 유대종교의 최고의 율법학자들과 최고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세례 요한의 책망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리인 자신에게는 너무 높아 오를 수 없는 경지를 요구하는 것 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직은 성령에 의해 눈이 열리지 않아 모든 것을 판단하지 못한 마태는 자신의 세리 입장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죄인으로 추악한 모습으로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들은 다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데 나만 홀로 버림받은 자처럼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정말로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마태의 모습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요단강에서의 일입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너무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이 내용을 목격자가 아니고서 이렇게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은 3:5~17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자주 세례요한이 있는 곳을 갔었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까지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리가 된 마태는 세리의 일을 소홀히 할 정도로 메시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결국은 자기의 세리라는 직업으로 인해 절망하고 고민하는 상태에 빠져 버렸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상세한 세례를 받는 장면, 그리고 그 순간 나타난 하늘이 열리는 장면등이 한폭의 그림을 설명하듯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격자의 진술임을 부인할 수 없고 목격자는 이 장면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마태는 구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가 된 것은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의해 자신을 희생하고 가난에서 가족을 구하려는 희생으로 세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비로써 메시아로서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을 기록합니다.

첫 외침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세례였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중심으로 항상 마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정보에 주위를 기울였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곳은 달음질하여 갔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일을 하셨고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약한 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 들었고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으나 마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민족의 반역자인 죄인인 세리였고 유대 민족주의 종교에 의하면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 가까이 갈수가 없는 더러운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서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곤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마태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세리인 마태의 인생 앞에 나타난 메시아로 인한 좌절스런 아픔은

마태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환경이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마태는 세리로 있는 상황에 메시아가 도래한 사건에 대해서 너무도 원망스럽고 낙심되었으며 삶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본문을 읽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직 마태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기 전입니다.

마태는 세관을 벗어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여러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 유대 광야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는 세관의 일을 중지한 체 광야로 간 것이 아닙니까?

이미 광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세인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고 사두개인도 있었습니다.

병을 고침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모였습니다.

마태도 그중에 한사람으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요단강 건너편이었습니다.

 

마태가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 군중 앞에 서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셨다고 늘 말합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후대에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받은 마태가 오기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오자 예수님은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아직 마태는 부름을 받지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관에 세리였고 민족의 반역적인 직업을 가진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낱낱이 새겨지고 가슴에 박혀 오랫동안 기억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마음에 옥토가 되게 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선포하시던 그 자리에게 예수께서 마태에게 “마태야 이것을 받아 적어 나중에 성경에 기록하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의 인생과 그의 삶 그리고 현재 마태가 처한 상황 그런 모든 환경에 의해 마태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고 싹이 자라고 성경으로 새겨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곳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서 여러분에게 선포되어진 말씀을 새겨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의 밭에 새겨 지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놓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간절히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죄인으로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이 있지 않는지요?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사 6:9~10)”

주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져 종교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주일이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사람들의 종교형태는 거룩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서있게 하고 싶습니다.

산상수훈을 설교하시는 주님 앞에 있는 마태를 보십시오.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기회를 잃어버린 낙오자가 메시아 앞에 서있는 절망스런 마음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 앞에 서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현재의 상태는 그가 알기에 죄인이고 민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신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메시아이신 예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구절구절마다 자기에게 너무도 정확이 맞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의 심령은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심령은 지금 낙담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처절합니다.

저 말씀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려운 상황에 부디칠 때 저의 심령의 상태를 느꼈습니다.

하늘의 천사의 소리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무 복잡합니다.

아무것도 싫습니다.

그저 죽고만 싶을 뿐입니다.

마태의 마음을 아십니까?

너무도 좌절스런 모습입니다.

메시아 앞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읽으면서 놀라고 또 놀랍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가진 마태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새겨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그것을 복음서에 상세하기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마태가 이사야서에서 인용하듯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나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생명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의례히 외쳐지는 주일 설교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교회에로 모일 때 구원의 말씀도 있고

찬송의 시도 있고

성도의 교제도 있는데

이런 매 순간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밭이 기경되거나

우리의 삶속에서 간절함이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태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읽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는 각자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달음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목표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살고 있습니다.

마음은 기경 되어 있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작 필요로 하는 구원의 긴박성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성하다는 사실을 상실했습니다.

얼마를 벌 것이며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인지 그것만이 삶의 관심입니다 .

보냄을 받은 세상을 위해서 뭣을 해야 할 것인지 관심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너무도 이말씀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금과 빛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세상에 이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은 정말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마로 말씀하신 것을 교회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성도로 사는 동안 “종말을 만나는 사람처럼” 주님을 고대하면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치 마태와 같이 메시아를 고대했다가 죄인의 모습으로 서있는 처절한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기를 종말을 만난 사람처럼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도적과 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 광야에서 설교하시는 예수님 앞에 마태처럼 서 있다면 주님은 슬퍼하실 것입니다.

용서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깨어서 바르게 서서 주님을 맞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보실 때 미쁘다 칭찬하시도록 ...................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삶을 살아

주님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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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7:24~27)

2009년 12월 6일 토론토 Godwithus Canada Inc, Office에서.'

자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