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설교연구의 예3 (나를 좇으라, 마9:9)

생명있는 신앙 2009. 12. 8. 04:03

본문

 예수께서 거기서 더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마 9:)

 

2009년 12월 13일 주간 우리 교회는 이런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같으면 성탄에 맞추어 준비는 할 것이지만 우리는 아직 시작인고로 이렇게 합니다. 내년에는 절기에 맞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1. 등장인물 

  예수님, 마태, 제자들, 무리

 

2. 사건의 내용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은 저자 마태에 의해 기록한 것임으로 역사성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며 앞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과 마태와의 심리적인 관계를 통한 주님의 사역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고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지는 부름에 관한 확실한 응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3. 본문 요약

   예수님께서는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금을 내시고 세금을 거두고 있는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고 세금을 내셨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비난에 물고기 입에서 달란트를 가져오게하고 그것으로 세금을 납부하시는 기적을 행하시기도 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세관에서의 할일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예수님의 목적은 마태를 부르려 오셨으나 그 누구도 그 비밀을 알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태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4. 신학연구

  1). 공통본문연구 ( )

       막 2:13~14,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시고" 라고 기록하고 마태의 아버지를 기록함으로 저자 마가가 잘알고 있는 집안을 설명하고 있는듯 합니다. 하지만 마가가 잘알고 있다기 보다는 마가의 대부분의 복음서 내용은 베드로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설교) 내용으로 볼수 있기 때문에(마가복음연구에 참조) 베드로가 마태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볼수 있습니다. 주제의 결론으로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맟추어 본문을 마무리하는 것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이 일치합니다.

       눅 5:27~28, 

       누가는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복음과 동일한 내용으로 마태가 예수님ㅇ르 자기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만찬을 함께 소개하고 5: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는 촛점으로 본문이 연결됩니다. 

공관 복음의 저자들은 마태 자신과 동일하게 마태의 부르심의 초점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라는 주제에 맟추어 본문들을 기록했지만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통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본문의 내용은 마 9:13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 관해 기록하는 것이 주 목적으로 볼수 있습니다.   

 

  2). 역사적 배경연구

        유대 식민지배에서 생활상 가운에 하나인 세금을 징수하는 기관인 세관에 관한 기록으로 당시 로마의 유대의 정치적인 지배를 엿볼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이때 소외받고 버림 받았으며 인정받지 못하며 따돌림을 당한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걷어내는 메시지가 마태의 집에서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장면을 지쳐 보고 있는 의인들이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상세하게 보여주는 메시지를 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들이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보다도 더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실지로 이방인은 죄인취급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버림을 받았다는 유대전통적인 사상에 의해 유대의 역사 밖에 있는 사람들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에 속하고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나 유대에 관한 전통 종교의 지식을 배운 유대인들 가운데 죄인으로 낙인 찍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 따가운 눈총과 배척은 뜨거운 자외선보다더 피부를 병들게하는 강렬한 자외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의인들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눈에 세리는 민족의 배반자요 하나님을 버린 죄인중의 죄인이었습니다. 가족중에라도 세리가 죽으면 가족의 무덤에 장사 지낼수 없고 그 시체가 버림을 받거나 아니면 이방인과 같이 자기의 무덤에 별도로 장사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씀의 주제 결론에 따른다면 지난주 설교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자기 자신을 늘 살피고 자기의 연약을 인식하며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좌절과 낙심 그리고 삶에 대한 회의와 사회에 대한 떴떴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본문을 설교하는데 중요한 내용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3). 저자의 사상적 배경연구

        저자는 마태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소명에 관한 내용을 직접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공통본문에서 살펴 본것과 같이 저자가 자기의 소명을 언급한 것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관한 것으로 말하는것이 주 목적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세리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도 보고서를 보면 빌라도가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을 만나고 그 경험을 로마 황제에게 보낸 내용입니다. "비록 그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나 제앞에 까지 다가와 서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기 왔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동안 나는 이 비범한 사람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응시하였습니다. 그는 신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이 아직 그려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도 두렵고 떨려서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

죄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볼때 느껴지는 마음일 것입니다. 마태가 바로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수없이 바라보았고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망과 아픔과 고통속에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세상 자기 동족들로부터 쪼아대는 눈총의 자외선같은 강렬한 살인적인 눈빛을 항상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통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신 것처럼 묘사하는 저자의 기록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신에게 다가오셨고 인생의 문제를 단순간에 해결하시는 놀라운 분이라는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주는 더 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슬픔과 좌절, 안타깝게 환경으로 인해 꿈과 기회를 잃어버린 한 젊은이의 슬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에서 버림받음, 이를 앉고 사는 사람에게 느낄수 있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비애 같은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부르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한 모든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일부의 마태가 자료들은 세관에 앉아서 구전으로 들은 것이 있을 지도 모르나 대부분 마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들은 것일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볼때 마태는 메시아로 나타난 예수님앞에 자주 나아갔으며 먼 발치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자주 듣고 목격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부름을 받기 전까지 메시아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깊이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고 메시아라고 의식하고 자주 예수님앞에 나아갔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태의 강렬한 소원은 세리로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상태를 용서 받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4). 본문의 의도

       앞의 본문까지 내용을 살펴 볼때 마태는 정말 아픈 인생의 삶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우울증 환자처럼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세관에 있는 그의 모습은 모든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고 때마침 지나가시는 예수님에대해서 얼굴을 바라 볼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고 고개를 떨구며 부끄러운 죄인의 신분으로 예수님 앞에서 외면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셨기 때문에 마태는 응답할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선택이었습니다.

세관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가 앉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세리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여러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마태를 보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사람중에 마태가 선택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전에 이미 알고 계셨고 자주 목격했으며 예수님 앞에 자주 나타난 마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아셨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날 마태는 예수님께서 가까이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전 장소에서 다른 길을 가시려면 세관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날만은 세관에 있었고 땅이 꺼져라 한숨지으며 가슴속에 슬픔으로 울부 짖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

마치 어디에서나 마태를 보고계셨던 것처럼 부르시는 예수님,

언젠가처럼 다정하게 부르시는 예수님앞에 한 젊은이가 세상을 버리고 일어서는 환희와 기쁨 그리고 참된 소망과 용서,

이 기쁨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에 나타난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배푼 잔치,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베푼 잔치에서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용서와 보호,

이 엄청난 기쁨이 마태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라고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놀라운 성령님의 선포입니다.

 

  5). 성령의 의도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을 만나는 것은 주인의 뜻이다".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자 해도 만날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의 것이 될수 없습니다.

시장에 가면 수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주인의 뜻입니다.

주인은 주인이 마음에 합당한 물건을 선택합니다.

(이말에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덛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시지 않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그사람의 지금 환경은 전혀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자만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열심과 또한 집중력있는 관심, 그리고 노력이 수반된 간구등이 선택을 위한 인간의 어떠한 도덕적 기준도 고려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인으로서의 기준입니다.

주인을 앞에두고 날뛰어 주인을 물어뜯고 욕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주인을 만나기를 희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주인이 자기를 불러주기만을 학수 고대하고 모든 권한을 주인에게 일임하고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관에 있는 사람들 뿐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주인이신 예수님 주위에서 역사적인 인물들이 될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요. 제자가 될 기회가 있으나 제자가 되어야 겠다는 축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자기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도덕으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성경과 신앙을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성적을 매기려하고 성경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세요.

성경에 나타난 도덕은 하나님의 도덕을 기준으로한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판단하면 성경은 한낯 종이에 기록한 글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윤리와 도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려합니다.

최고의 이상, 최고의 도덕, 최고의 철학에 비추어 하자가 없어야만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오류가

비뚤어진 성경관과 신관, 그리고 종교에 대한 가치관들이 타락되어버린 관점에서 시작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에서 사랑으로 나약하며,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이상을 가진 존재자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과 같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더하여 최고의 보호자이신 성령하나님의 역할이 더해있습니다.

하나님은 양부모에 더하여 성령하나님이 더하여진 인간보다 하나더하신 분이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지금 이시대에 이곳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유대를 걷고 있었고 마태가 운영하는 세관을 지나가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비극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아니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오기 전에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면 그 얼마나 슬픈일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기를 원하셧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부르신이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마태를 부르시는 것처럼 부르시고 계십니다. ooo아 나를 따르라.

 

5. 교리적 연구

  1). 하나님의 섭리하심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선택이나 행위에 있어서 너무나 자유스러우시도 예수님 자신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들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행하시고 계시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하신을을 전폭적인 협력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세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전적으로 예수님 자의로 하셨으나 예수님은 모든것을 자의로 하시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마태를 부르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이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시고 성령하나님은 이것을 온전히 이루실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조성하시는 놀라운일을 하신 것입니다. 계획하신 성부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마태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를 부르실 것을 예견하시고 다가오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앞에서 중풍병자를 만나셨는데 그자리에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마태의 집에서 "내가 온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므로 모든것이 이미 정해진 약속대로 움직여 지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고, 이런일이 순전히 예수님의 자의적인 것이고 성부 하나님의 기쁨이시고 성령하나님의 조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삼위하나님의 사역이 성도 각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협력하여 사역을 하셨고 모든 하나님이 다 함께 성도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것은 성령 하나님의 사랑이 더함이고 육신의 부모는 협력은 가능하지안 성령 하나님처럼 상황을 조성하시고 마음을 움직이시는 사역을 하지 못합니다. 두분 부모님의 강동적인 사랑에 나의 영혼의 감동하는 것이지 두분의 영혼이 나에게 오셔서 기쁨을 심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에 직접적인 사역을 하셔서 더 깊이 더 내 영혼을 새롭게하시고 하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게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며 무한한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십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영혼을 거두신다면 그 영혼은 당장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여 죄인을 얼마나 상세하게 사랑하시는가 본문을 통해서 살필수 있는데 이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6. 적용

   이번주는 이렇게 설교를 하겠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놀라운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 되어졌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삼위하나님의 세심하고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에서 인간의 의지를 활용하시는 놀라운 일을 살펴 보고 성도가 언제든지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게하면 성공적인 신앙의 삶을 살수 있다는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이 함께 하심을 깨닫고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죄사함을 받고 기뻐하는 마태처럼 잔치를 베풀수있는 즐거움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