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순서
찬송 : 56장
기원 : 시 121
성시교독 : 1번(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다같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46장
기도 : 박완규목사
성경 : 마 9:1~7
설교 : 마음에 덧뿌려진 씨앗
본문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 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설교.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도구가 꿈입니다.
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을 이끌어가는 생존을 위한 꿈과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꿈이 있습니다.
역동적인 꿈은 이룰 수 있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생각이나 마음에서 그려지는 막연한 희망과,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활동하는 꿈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활동하는 역동적인 꿈을 사람의 마음에 심으시고 그것으로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이 꿈에 의해 사람들이 움직이고 세상이 바뀌어 갑니다.
이 꿈에 의해 사람들의 삶의 환경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도 이 역동적인 꿈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역동적인 꿈을 현실화 하기 위해서 사람이 움직여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금씩 함께 노력한 결과 나중에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나 사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직들이 마음에서 발동하는 꿈에 의해 활동하고 움직입니다.
그 꿈은 삶을 바꾸어 가는 역동적인 활동을 하게하는 원천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의 환경이 바뀌고 나아가 마을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더 나아가 세계가 바뀌어지지만 한 사람의 계획한 꿈에 의해 여러 사람의 삶과 미래를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에게 이끌림을 당합니다.
여러 사람의 미래의 삶의 환경이 바뀌고 결국 나아가 이 땅이 바꿔집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심어 놓은 꿈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는 정복 욕구가 모두 있습니다.
이 정복 욕구는 사람이 발이 닿지 않는 곳에 길을 내고 나아가 정복합니다.
개발을 합니다.
새롭게 조성을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도록 새롭게 조성을 합니다.
잡초와 풀들이 우거진 들판을 잔디가 돋아나고 아름다운 나무가 있게 하고 호수에 물고기들이 뛰어 노는 환경으로 바뀝니다.
갈수록 아름다운 집들이 생겨납니다.
해로운 것이 없고 자연의 피해에도 이겨 낼 수 있는 아름다운 환경을 개발하고 바꾸어 결국은 천국과 같은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즐기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는 정복의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정복 욕구라는 꿈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저에게는 본심으로 말하는 진정한 꿈이 있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큰 것도 아닙니다.
저를 드러낼 수 있는 명예도 아닙니다.
편안하게 인생을 살게 하는 부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는 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과 그를 섬기며,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하라는 꿈에 이와 같은 꿈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삶에 짓눌려 계속되는 아픔을 앉고 살고 있습니다.
꿈을 향한 한발자국도 내어 디디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
아픈 사람들을 위해 단 한시간도 봉사하지 못했습니다.
제 욕심에 내가 치어 사람들에게 고난 떠 넘겼습니다.
저로 인하여 슬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향하여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얼굴을 떠올리기 조차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저의 인생에는 자기가 꿈꾸어 온 것과는 반대로
쓰러지고
좌절하고
낙망하고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슬픔이 가득 인생을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인생에 나타난 수많은 아픔들을 살펴보면
제가 꿈꾸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들이 무거운 짐들로 다가와 나를 괴롭히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삶들을 되돌아보면서 항상 죄인 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더욱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낮추고 나를 더욱 내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득 채웁니다.
무능한 저의 인생이 더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고 희망과 꿈과 비젼과 그리고 그리소를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성경으로 갈수 있도록 인도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나타난 수많은 실망스런 삶들은 “본의 아니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의 아니게”라는 말은,
일의 과정 속에서 내가 계획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일의 결과가 나타난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생각과는 다르게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일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실수 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의 결과가 나타나 난처하게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본의 아닌 결과입니다.
예상하고 꿈꾸워온 계획된 삶과 전혀 다른 일의 결과가 과정 중이나 혹은 결과에 나타난 것입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 이 인생들의 열매가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만들지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의 과정 속에서 그런 실수들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하고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가득한 슬픔 열매가 맺어지도록 했을 까요?
죄송합니다만
하나님은 내 인생에 맺어진 슬픔 삶들과 관계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만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절망과 아픔과 좌절들을 원수로 생각하십니다.
저는 이런 결과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성경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욕심에 미혹되었다거나
아니면 가리지가 제 인생에 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 잘못은 하나도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가 원하지 않은 그런 결과들이 우리의 인생에 나타난 것은
우리의 삶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의 삶에 덧뿌려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인생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재를 뿌리는 그 무엇인가 제 마음속에 있어서 저로 하여금 저의 인생을 잘 관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를 외면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것으로 나의 삶을 주관하게 했습니다.
자만과 오만이 함정을 만들어 놓고 저로 하여금 정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 내가 하는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내 속에 있는 인지 능력으로 꿈과 망각에 취하게 합니다.
그리고 삶속에 슬픔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함으로 위기를 대처할 수 없고 결국에는 쓰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제가 추진하는 모든 일들이 의롭게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한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판단이 삐뚤어지고
생각이 삐뚤어지고
면밀하게 상황을 살피는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우리가 인생을 평탄하게 사는 방법에 관해서
여호수아 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복되고 혈통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시편기자는
시편 1편 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사람은 자기의 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에 뜻하지 않는 것들이 덧뿌려져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유지 할 수 없다고 늘 경고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위대한 선각자들이나 근 현대를 막론하고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더 충실하게 묵상하고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지난 두 번에 걸쳐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읽고 살았는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가정형편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가난했었으나 어머니로 부터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는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마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인용하는 각종 구약의 말씀들이 증거가 됩니다. '
그는 구약의 말씀들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투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에 관해서 기록했고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한 마태는 자신을 살펴봤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 세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으로 말하자면 죄인입니다.
그는 좌절하고 절망했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한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가족을 위한 희생의 선한 대가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결과라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서 실의 빠져 낙심 마태를 부르시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모든 자기의 하는 일을 그대로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행운아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마태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결코 인생을 따분하게 생각할 시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자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표를 만들고 계획하며 미래의 꿈을 이룰수 있는 기초를 우리 마음에 세우는 것입니다.
먼 미래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을 발견하고
기뻐하도록 새로운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사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지난날 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우리의 인생을 이제 새롭게 조명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말씀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하나같이 떠밀려 왔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온갖 시련과 아픔과 슬픔과 문제와 고통과 좌절과 괴로움이 우리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온몸은 병들과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우리의 사업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고
자금은 고갈되어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어설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생일을 즐거워 할 수 없는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발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고통의 중병을 앓았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지난날들을 잊어버리고 싶을 마음입니다.
우리가 중풍 병에 걸려 버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짓밟았고
사회는 매정하게 우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요.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2.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오만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4. 우리는 우리로 실패하게 하는 마음에 뿌려진 실패의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지 못한 소경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오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만이 주님의 돕는 손길을 외면했습니다.
우리의 교만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버리움을 받아가는 중풍병 환자이면서
우리는 오만과 자만의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의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우리 의 꿈은 실패라는 비극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덮어 씌워진 것은 영혼의 중풍병이었습니다.
육체의 중풍병자를 보십시오.
자기의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사를 온전하게 표시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현대 의학이 중풍병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수많은 혈관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 파열하여 뇌에 피가 섞여지고 뇌는 굳어져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라는 하드웨어가 잘못 프로그램된 소프트 웨어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같고 부분 부분 망가지고 헝클어진 숫자의 조합으로 기관을 마비시키는 다운된 상태와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라도 이런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런 고통을 피하려면 음식을 잘 가려 먹는 것이 해답입니다.
너무 고지방을 음식을 많이 섭취하여 혈액이 끈끈해져서는 안 됩니다.
너무 편식을 해서도 안 됩니다.
운동을 전혀 안해도 안됩니다.
너무 식사량이 많아 비만하게 살이 쪄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성도들의 건강에 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건강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조차 관심이 없었습니다.
목사부터 먹는 것의 모범을 보여 자기를 다스려 건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육체를 잘 관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각종 성인병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집사님들이 병들어 쓰러지고
장로님들이 성인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마귀나 사탄이 병들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물러가면 병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병들면 기도원을 갔습니다.
모든 것을 끊고 기도에 전념해서 병이 나은 사람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당뇨나 암과 같은 질병은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있으나 대부분 음식을 잘 가려먹고 절제하고 운동을 하면 어느 정도 예방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의 건강에 관한 건전한 삶을 지도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소홀히 하고서
병들면 안수하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울고
마치 자기와는 무관한 재수 없이 다가온 재앙처럼 생각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책임을 면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고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잘 먹으면 건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상당수 당뇨병, 고혈압 등으로 각종 성인병에 억눌려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저희 연배가 되는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갱년기로 고생을 하고 미래의 질병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살다가 결국에는 각종 성인병으로 노년을 질병의 고통으로 보냅니다.
이게 다 우리가 너무 잘못 알고 있었던 결과들입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과 성격에 관한 관계성을 연구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육식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난폭한 행동을 많이 하고, 현대 기술로 개발한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먹는 사람들의 성격은 폭력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미미한 정신 질환이 있어 우울증과 같은 증상이 많고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연구가 커다란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결국은 인스턴트 식품이 거절되고
생식주의자들이 생겨 났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육식위주의 식사는 사람을 포악하게 하고 스트레스에 취악한 반면,
지나친 생식 위주의 편식은 육체의 균형을 깨뜨려 결국에 지나친 고통을 겪어야 하고
각종 화학조미료는 각종 성인병 환자를 증가시켰습니다.
절제하지 못한 포식은 비만과 당뇨병을 일으켰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현대의 의학으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와 버렸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인간의 육체의 건강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성도들의 건강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혼에 만 치중한 편식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구하노라(요3 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역들을 하셨습니다.
그 사역의 대부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죄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습니다.
강도와 같은 완악한 사람들에게 평화의 마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체의 건강도 치료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영혼의 중풍 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실지 본문은 육체의 중풍병을 당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에 관한 마태의 기록을 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마태, 마가, 누가, 세 사람이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각 저자들마다 받은 자료의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중품병자를 들것에 들려 왔습니다.
당시 중풍 병 환자를 대우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질병에 걸리면 가족은 환자를 길에 버리는 길 뿐입니다.
아주 먼 곳에 사람을 싫어다가 버리고 죽게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길거리에 버려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버림을 당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실려 왔다는데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살펴 볼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아주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쉽게 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불구의 몸이 되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를 버린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길에 버리지 않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남의 눈치를 피하며 당분간 살았습니다.
아니면 이 사람이 중풍병이 걸린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친구들과 이웃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버릴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것은 순정한 사랑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친구나 가족을 구하려는 한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풍병 환자를 들것에 들고 온 것은 그만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달려 온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온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이 많아지고 너 깊은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자꾸 막아지고 다른 방향으로 말씀이 전개 됩니다.
결론.
우리의 영혼은 이미 중풍이라는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영혼이 이끄는 방향으로 살지 않고 자꾸만 욕구를 일으키며 욕구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치료하시고 그 영혼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루게 하십니다.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선포는 영혼의 치료 뿐만 아니라 육체의 치료를 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살펴 보십니다.
우리의 환경을 돌아 보십시다.
여기저기에 우리의 인생 환경 쓰레기들이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냄세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억누른 환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 억누른 환경은 바로 죄의 환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날 우리가 어리석게 살아온 시간들을 주님앞에 고백하고 회개하며 오늘 이순간을 새로운 인생을 출발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중풍병을 벗어버리고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출발하는 기적의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순간을 우리것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아멘...
찬송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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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7:24~27)
2009년 12월 20일 주일 예배 토론토 Godwithus Canada Inc, Offic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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