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

진리로 거룩하게.

생명있는 신앙 2011. 5. 25. 04:55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2011년 고난주간 시리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4)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대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5)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한복음 17장 16)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



1,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우리 시대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속에는 쓰레기와 같은 불로 태워질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하여 다시 쓸 수 있는 값진 물건들도 함께 버려져 있습니다. 다시 쓸 수 있는 재생이 가능한 물건은 그 자체가 다시 새롭게 장식되어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그것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을 값지게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것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1999년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탄생-1951년 4월 29일 전립선암으로 사망)을 꼽았습니다.  그는 철학자이며, 수학자이고, 물리학자, 기계공학자입니다.

그는 마지막 운명의 날 그의 생애 일기장에 “멋진 삶을 살았노라 전해주시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내세가 그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남긴 의미로는 정확한 의미를 담을 수 없으나 미래가 없는 삶의 종지부를 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멋진 삶을 살고 인생의 한 무대를 떠나는 그가 정말 멋지게 세상을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188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노이발닥에서 유대인계 기독교인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카톨릭계 레오폴디네의 5남 3녀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철강의 후원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으며 예술의 후원자로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부루너 말러, 라인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별 같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였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형들은 아버지와 갈등을 가졌고, 맏형은 미국으로가서 행방 불명이 되어 불귀의 객이 되었으며, 둘째 형은 전쟁터에서 청산염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그의 탄생의 환경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하였습니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다가 린츠국립학교 곧 히틀러의 1년 선배가 되어 1903년에 입학하였지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는 등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습니다. 베를린으로 옮겨 사를로텐 부르크의 기술전문 대학(오늘날 베를린 공대의 전신)을 들어갔다가 다시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의 멘체스터 공학대학으로 가서 항공 엔진과 프로펠러 제작을 연구하였고 이시기에 수학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켐브리지로 가서 버트런드 러셀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고난 주간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에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쳐 긍구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은 진리에 관한 접근 방법을 깨닫는 도구로 세속에 뛰어난 지혜를 빌려 온것처럼 제가 세속에 있는 지혜자들이 찾고 있는 고민을 통해 그것들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찾으려는 열심히 없는 무지하고 맹목적인 신앙에 빠져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위한 신앙생활에 빠져 있는 모습을 개혁하려는 의도로 부득이 세속에 속한 사람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이 보기에 아주 선하고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다소 사람들과의 어울리지 못하는 독특한 면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느껴지는 천재적인 소유의 성격을 가진 사람의 독특한 성경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기독교인이며 사업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자녀들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가정은 평온하지 못한 상태로 어렸을 때 부터 많은 고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인지 그는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자기를 이기기 위해 각고의 수고를 하는 인생을 살았으며 자기 속에 자기가 자기를 억누르는 고통스런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의 고독을 즐긴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여러 날을 교회에 나아갔을 것은 분명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며, 신앙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으며 알수는 없으나 기독교에 관해 무관심한 인생을 살았다거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가정환경 속에 자랐습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책이나 그의 주장들을 살펴 볼 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신앙을 의지하지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면을 볼 때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불행한가? 라는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며 거리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 소유한 부로 인해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그들이 호화로운 삶의 환경에서 남들이 누리지 못한 다양한 문화의 혜택과 경제적인 유익을 누리고 잇을 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선물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이 천재에게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나 어거스틴 그리고 개혁자들의 후예중 천재 신학자들인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드나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만났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잡힌바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속적인 가르침이 있어 그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새겨졌다면, 아니 그가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예배할 때 만났던 목사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 지적인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리를 향한 방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를 붙잡지 않으시고 그럴 세속에 지혜자로 만드신 것은 오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필요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세속에 물들어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 일에 게으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하나님을 드러내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오늘 고난 주간 첫날 이 사람의 이야기를 서두에 언급한 주된 이유는 주님 앞에 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언어에 관한 관심을 갖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비트겐 슈타인이 ‘논리 철학적 논고’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켐브리지에서 연구원이 되었으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을 강의하는데, 그의 논문과 책에서 언어에 관하여 세계인의 관심을 갖게 하는 말들을 남기게 됩니다. 그가 비록 세계인들에게 철학자로서 칭송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그의 영혼은 하나님 형상을 담도록 지음을 받고 지성에는 본유적 지식을 부여 된 존재로 지음을 받아야 했으나 아담의 범죄로 본유적 지식을 망실한 상태로 태어남으로 사는 날 동안 고뇌와 집중력으로 얻은 고도화된 지식들이 본유적 지식을 대신하여 지성에 새겨지게 되었고 그 지식이 활성화 되지 못하는 고통의 상태에서 자기의 만족에 때른 별도의 지식을 정리함으로 스스로 깨달은 지식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고 기뻐하며 세상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죽도록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가 죽어야 한다거나 본유적 지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새로운 지식들을 자기의 영혼의 지성  안에서 새롭게 정리하여 남들이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고 고뇌하며 살아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결코 인간으로서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인간의 참된 기쁨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 있으며 유한한 인간에게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임을 깨닫는 것이 참 된 진리에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트겐 슈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철학자들의 영혼에 있는 지식을 씻어버리고 영혼에서 활성화되지 못하도록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고통에 던져 넣으심으로 그 영혼의 지성에서 고통으로 인하여 지식들을 생각할 수 없도록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는 날 동안 즐거웠다고 외치고 세상을 떠난 철학자는 그 즐거움을 벗고 이제 지식을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으로 던져져 버린 비참에 처해 있습니다. 그가 지성에 새겨진 지식을 활성화시키려하면 할수록 영혼의 고통은 가중되고 더욱 괴로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영혼들의 지성에서 오염된 지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단 한 점이라도 분출 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격리시켜 버리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 영혼은 불멸하고 육체의 옷을 벗은 후 본래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육체로 사는 날 동안이나 사후에 자칭 타칭 지혜자라고 칭함을 받을 지라도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때에 영혼 안에 새겨진 자기의 지식이 그릇됨을 보고 그 지식을 지울 수 없는 자신의 비참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감이 있을 것이고(마24:50~51). 본유적 지식을 잃어버린 상태로 태어난 비참에서 그 지성은 자기의 오만과 육체 안에 살면서 수많은 경험적 지식들을 불가피하게 지성에 새기지 않을 수 없고, 영혼이 본래의 고향인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경험적 지식들을 버리지 않고 소유한체로 돌아갔으며, 지성에 남겨진 경험적 지식들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결코 조화되지 않은 쓸모 없는 지식들이기 때문에 이를 씻어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돌아갈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에 있는 본유적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은 지식들이기 때문에 이 지식이 영원한 세계에서 활성화 된다면 그 세계를 오염시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창조세계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나아가 천사와 같은 다른 존재들에게 까지 오염시켜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득이 돌아오는 수많은 영혼들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유적 지식을 가지지 않고 태어난 인간의 영혼이 부득이 경험적 지식과 미미하게 남은 본유적 지식의 산물에 의해 육체 안에서 사는 날 동안 영혼의 활성을 가지며 살다가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진리 지식들과의 충돌로 인하여 겉잡을 수없는 혼란을 겪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지식간의 충돌로 인하여 그 어느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영혼의 충격으로 느끼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꺼지지 않은 불타는 지옥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육체로 있던 날 알 수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무수히 많이 들었던 것처럼 “일생을 연락을 즐기며 살았던 부자와 그 부자의 집에서 종으로 살았던 하인이었던 나사로가  중풍병에 걸리자 버려져 죽음을 당한이후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이르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저 불 못 가운데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생생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심과 같이 지옥에 격리된 영혼이 자기의 영혼에 새겨진 경험적 지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퍼져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처럼 핑계할 수 없는 사실 앞에 지혜자들이 남기고 간 버려져야할 쓰레기 같은 지식들에 의해서 오늘 도 수많은 인간들이 무서운 열심히 온 세상을 더욱 더럽게 오염시키는 일들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염은 하나님의 진리에 맞서 대적하고 있으며 하나님보다는 자기가 옳다고 뻐기고 서 있습니다. 그 지식의 시작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시작한 인류의 사상사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인 각 인류의 문명의 발상지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리스 신화가 세계의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지역에 따른 문명 발상지와 인류의 거처를 중심한 각기 다른 지식들이 시작 되었다 할지라도 모두가 한결같이 이미 세계는 각 민족에 따라 고유의 사상이 진보되고 있으나 온 세상은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진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개혁시대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포스트 모던사회가 이르기 까지 쉬지 않고 진보하는 경험적 지식은 민족들의 사상을 뛰어 넘어 지구상어디에나 공통적인 사상이 되어 왔습니다.

전환기와 개혁의 시대 혹은 사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마다 언제나 교회는 새로운 도전을 받았으며 사상사의 변천과 함께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을 오염시키려는 철학자들의 등장에 변할 수 없는 진리인 복음으로의 대응이 달라져야 했습니다. 이것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최초 인류에게 부여하여 주신 본유적 지식과 그것을 가지지 않고 태어나 이 세상을 살면서 습득하고 발전시킨 경험적 지식간의 물고 물리는 대립과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적 논고’라는 논문에 나타난 언어철학의 개진은 인류 사상사에 또 다른 진보를 개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교회는 언어와 지식과의 관계있어서 분명한 답을 하야 하는 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에너지를 집중하여 “말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말과 지식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제 그 답을 오염된 결과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을 마쳤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너무도 정직한 대답처럼 보이지만 이 말이야 말로 형이상학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입을 다물라는 세상의 경고인 샘입니다.

교회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사상에 대답을 할 수 있는지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거의 반세기를 넘긴 시간 동안 잠잠히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젊은 주님의 양들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세상을 방황하고 영혼의 만족을 얻을 곳을 향하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유리하며 방황하고 있을 때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이제 저들의 죽은 모습과 혼돈스런 모습을 보고 승리의 개가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교회가 이 질의에 답을 지연하고 있는 동안 습기가 많고 어두운 곳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라는 곰팡이 균과 같은 언어 철학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불확실한 인간의 모조적인 사상으로 전락시킬 사상이라고 공격받고 있고 그 공격이 교호에 속한 어린 영혼들의 지성에 파고들어 순전한 영혼을 사냥하는 독극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 지식의 본질과 인식, 언어와 지식과의 관계, 등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과제들이 천재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교회가 공격을 받고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며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 왔던 수많은 교회의 개혁자들과 같은 천재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을 주님께서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타락된 세상의 지성사가 급박하게 변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상황에서 교회가 주님을 머리로 하고 견고하게 버티어 설 수 있도록 헌신된 종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가 일어나 교회의 위치를 경고하게 결코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선포함으로 오염된 타락에서 비롯된 경험적 지식들의 공격을 잠재우고 승리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설 것이며 초고속으로 내리달리던 세속화는 멈춰 서서 자기의 가는 길을 재고해 볼 것이며, 엄청난 회개의 소용돌이가 교회에 몰려 올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언어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이 세상이 자기의 길을 이끌고 가는 그것이 거짓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사의 변동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게 될 개연적인 여지들을 잠재우고 세상을 잠잠하게 하며 자기 백성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또다시 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견고하게 버티고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성군들의 저 장엄한 순종처럼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면 모든 것이 흐트러져 버릴 수밖에 없는 그것을 붙잡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빈틈이 없는 수에 의한 규칙들과 정렬로 성군들에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운행하도록 말씀으로 명하시는 그 권위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세상의 지혜가 전능자의 심판의 보좌 앞에 고개를 떨구고 심판을 받아 그의 지혜를 쓰레기 더미위에 던져지고 그의 영혼에 새겨진 그 지식들로 말미암아 영원한 불 못에 태워지게 하실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앞에 사람들의 초라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꿈꾸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영혼의 지성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을 만드신 자가 누구입니까?

지식과 언어가 결합되어 하나 되도록 하신이가 누구입니까?

영혼의 지성에 지식이 새겨지도록 하신이가 누구입니까?


16세기 교회의 개혁이후에 나타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한 접근의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사상들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더욱 미로 속을 향하여 더 깊은 무지의 본류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혼돈이며, 그들의 도달하는 목적지는 알 수 없는 무지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대로에 있으며 무법한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을 마음대로 활용하면서 커다란 빚을 지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거짓을 꾸며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 자신이신 진리의 지식을 말하지 못하여 입을 다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악한 행실이 이 땅 위에 생명으로 보냄을 수많은 하나님의 젊은 백성들이 미혹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미신적 종교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 배수로 증가하여 계속해서 영역이 넓혀지고 탐구 반경도 넓어지듯이 사상가의 영역도 더 넓고 방대해져 결국은 통일을 이룰 수 없는 혼란에 이르게 되고 이 혼란은 각기 자기의 영역을 형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처음 시작을 있게 한 창조주의 마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증가의 배수 영역이 진리에 이르고 통합된 영역에 이른 창조주의 기쁨이 무한히 지속되는 증가를 이룬 다면 이를 버리거나 말릴 창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무한히 펼쳐지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의 조화가 창조주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영화로운 영광이 노래하며 창조주가 원하는 그런 세상이 이 땅위에서부터 우주에 펼쳐지고 있다면 영원에 처하는 사람이라 한들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새로운 땅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태초에 지음을 받은 때부터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하는 인간들이 타락이라는 비참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어떤 삶을 선택하든지 사람은 자기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중차대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같은 자유스런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오점을 남기고 지속적으로 세계는 더러워지고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얼굴에 주름살이 패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하나님께만 아픔이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 자신에게 더욱 아픔이었고 고난과 비참,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쉬지 않고 주의 종들을 보내 말씀하십니다.

그럴 지라도 우리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은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의 귀는 죄악을 향하여 열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 시키셨도다(사 53:6).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역사 위에 일어난 이 일이 과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우리가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고 그 일이 무엇인지 관심을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눈은 소리 나는 방향을 항햐여 귀를 기울이고 서로향하여 무슨 소리인지 묻고 있습니다.

뭔가 이 땅위에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천재지변이 아닙니다. 땅이 갈라지고 바닷물이 요동치며 해안을 삼켜버리는 쓰나미도 아닙니다. 전쟁의 영운이 귀환하는 환영잔치도 아닙니다. 새로운 왕이 나타나 등극하는 일도 아니고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환영도 아닙니다.

그 일은 2000년 전에 이 지구위에 일이 있어났습니다. 지혜자들이 코웃음을 치며 냉소를 지으며 조롱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 사람이 한둘 태어나니? 하루에서 수백만명이 태어나는데 마굿간에서 태어난 그가 우리와 뭐가 다르니?

그도 사람이야!

소란 피우지마!

우리의 지혜자가 말하잖아!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너희는 너희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하는 구나!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라고 말하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우리의 지혜가 세상에 뒤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헌신된 생각을 가지고 주를 알기에 더 열심을 가져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사상가들의 고뇌와 집중력을 가진 생각보다 더 깊은 생각으로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고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이 사상가들의 말하는 고뇌의 결과들에 매료되어 유혹 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요한 복음 17장 12절에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시면서 부탁하신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 17:9).”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대로 “네게 주신 자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가 전심으로 할 일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것,


근본 적으로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ginwvskw. Knowledge, understanding.입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알아차리다, 이해하다. 인식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의 단어에 관해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이해하고’ ‘아는 것’이라는 작용이 어떤 것입니까?

사람이 사물을 목격하고 그 사물이 무엇인지 영혼의 지성이 이해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작용적으로 설명하자면 사물은 사람의 눈에 비춰진 보이는 경험을 이해하기우해서 보이는 감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지성에 일치한 답을 골라내는데 그 답이 지식이고, 지성 안에서 눈에 보이는 사물과 지성에 있는 지식과 일치를 발견함으로 이를 영혼의 감정으로 느끼고 이 느낌을 육체의 감정에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는 작용’입니다. 만약 영혼의 지성에 눈으로 본 사물과 일치한 지식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때 영혼의 감정은 혼란과 두려움, 답답한 감정을 일으키고 이 감정이 육체의 감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영혼의 지성이 육체의 오감의 경험과 지식을 일치시키는 것이고, 지성에  반영된 경험에 관한 지식이 있을 때 비로서 영혼의 감정을 느끼는데 이것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 이해하는 것은 육체의 오감에 의한 감각이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과 일치한 감성이고 이 감성이 육체로 반영되어 느끼지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는 것은 영혼이 느끼는 감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영생”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일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경험합니다. 보고,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보고, 그리고 그에 관한 탄생의 비밀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한 일들, 이 세상에서 행한 일들을 살피고 경험함으로 감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경험들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일치된 지식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을 경험합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에서는 감성을 느껴지지 않고 육체가 느낌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알 수 없는 것,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직하라는 표현도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진리는 판명불가결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데카르트에게서 온 사상입니다. 이성으로 고민하고 생각하여 결론에 이르기까지 판단을 위한 집중력 있는 의심을 해 보고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판단이 되면 그것은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침묵은 철저한 부정, 곧 진리가 있다고 가정할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는 이유에 있어서 전혀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함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란?

영혼이 느끼는 감성입니다.


2) 본유적 지식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가 오감을 통해 감각된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필연적인 자료를 말합니다.

들판에서 뛰어노는 짐승들을 목격한 사람은 그 사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영혼의 지성에 감각을 반영하고 사물에 관한 지식을 찾는 지성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때 지성에 사물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과 일치한 지식으로 인하여 영혼이 감성을 가지게 되고 이 감성을 육체의 감성에 보냄으로 사람의 마음이 밝아지고 사물에 따라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지성에서 찾은 지식과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각되어 반영된 사물에 관한 상이 일치한 경우 지식에 의해 영혼이 감성을 느끼게 되지만 만약 지성에 사물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사람은 감성을 갖지 못함으로 사물에 관한 안정된 마음을 갖지 못하며 사람은 혼돈에빠질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에 사람이 안정적인 존재로 살도록 영혼의 지성에 지식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씀을 드린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한 이 4가지의 지식으로 이것을 영혼의 지성에 분명하게 새겨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지식을 새겨 주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operating system 이 없는 하드웨어 곧 소프트 웨어가 없는 컴퓨터에 불과합니다.

요즈음 I Pad 제품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에플사에서 I Pad 로 시작한 이 제품이 삼성의 겔럭시, 엘지의 어떤 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이 얇고 통신기능이 뛰어나 어디에서든지 Wibro 를 이용하여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제품들에 소프트웨어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Internet.만 서비스 안 되어도 구매자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육체로만 만들어지고 그 육체가 완전하고 흠이 없이 움직이도록 하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한낱 짐승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으셨고 그 형상에는 본유적 지식을 지성에 넣어 두신 것입니다. (다음에 이 내용에 관해서 덧붙여 설명을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최초 사람은 이 본유적 지식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함께 하게하신 그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부어졌던 본유적 지식이 상실되고 사람은 지식을 잃은 어두움에 처하고 만 것입니다. 고작 남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최초 사람이 하나님의 본유적 지식을 상실하기 이전에 경험으로 얻어진 그 지식 속에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한 일부분의 지식이 육체의 오감에 의해 감각되어 적용되어 새로운 지식으로 영혼의 지성에 남겨지게 되었고 그것이 후손들에게 전승됨으로 지식이 사람들에게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식들은 피조물과 경험에 의해 육체로 감각되어 영혼에 반영되고 영혼의 지성에서 작용하고 그 작용에 의해 새롭게 지성에 생성된 지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본유적 지식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유적 지식이 상실됨으로 사람에게 어두움이 밀려왔고 사람은 방황하며 유리하며 고통하는 비참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비참함 속에서 사람들은 전승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증가하여 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여러 가지의 지식을 깨우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성의 지식은 하나님과 창조에 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잃어버린 비참함 속에서 무지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의 신비와 사람 자신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한 어두움에 처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범죄하지 않으므로 지식을 잃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잘 반응하게 될 것이며 창조와 사람 자신에 관해서 아주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로 말미암아 지식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게 되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에 말씀하신 그 말씀에 때라 말씀에 불순종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강해서 아담과 화와와 자신과의 관계성을 생각하고 그들이 비록 인류의 조상이지만 후대에 태어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자신이 비록 아담의 후손이지만 관계성을 적용시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의 원죄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고 그 지식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관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아담이 잃어버린 본유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그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자신이 아담과 관계가 없다는 분명한 지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보여야 합니다.

먼저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본유적 지식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동일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손 그 누구에게도 본유적 지식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본유적 지식이 없으므로 이 문제에 관하여 바른 지식을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지성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유적 지식이 없으므로 자신이 아담의 후손인 것을 더욱 확증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자기 자신에 관하여 혹은 창조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3)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우주를 가득체운 수많은 성군들,

조금도 빈틈이 없이 질서롭게 운행하며,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차갑고도 랭랭한 어름덩어리와 같은 천채들이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불려오고 달아나는 일을 거듭하며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의 눈에 드러나 아름다움을 수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고통의 소리가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하는 소리이고,

존재함을 드러내는 표호입니다.

허공을 박차고 내어 달리는 그 육중한 움직임은 마술가의 속임수와 같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고

말하지도 듣지도 않고도 소리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으며,

보지도 않고도 자기만이 가야하는 자기의 길을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달립니다. 

그들이 아무리 크고 육중하며 그 누구라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솟구쳐 세상을 뒤집어 놓을 지라도

하나님의 작은 음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순종하려고 도열하여 서 있습니다.

저들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고

저들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기자리에서 공간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하나께 대한 순종입니다. 

언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감정 없는 광석과 기채 덩어리가 순종하거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온 세상이 자기의 것인양 오만을 들춰내고 자기 살것만을 생각하고 온 세상을 파괴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추악한 모습이 마치 정신없는 미치광이와 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하늘과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지자가 외쳤겠습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엿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2)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6:19).


온 세상 만물이 자기를 내신 하나님께 두귀를 쫑긋하고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잠시도 정신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늘을 덮고 있는 대지위의 구름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곳에 비를 내리라고 명하시면 지체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물을 쏟아 내립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더러 명하셔서 구름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게하라 하시면,

방금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쏟아 내리는 비가 그치고 방긋 웃는 맑은 해가 얼굴을 드리워 적시었던 대지를 뽀송뽀송하게 말려 버립니다.

귀도 없고 눈도 없으며, 만질 수 있는 손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대지 위를 운행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사람을 생각하시고 그들의 안식처와 입을 것 먹을 것을 생각하셔서 바람과 비더러 과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땅속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이 움직이지 않고는 잠시도 지체하지 못함을 아시고 그들더러 움직임을 자제하라 명하시므로 땅이 잠잠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돌려지게 되면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땅위로 솟구쳐 온 세상을 지옥의 아귀로 만들어 버립니다. 땅이 흔들려 바닷물이 뒤덮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아파하셔서 돕는 손길을 보내셔서 위로하시고, 재앙을 당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손에 손을 맞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오라고 쉬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부르시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늘의 성군들의 지체 없는 순종보다,

보잘 것 없는 먼지와 같은 이 작은 존재의 순종을 더 기뻐하시고,

어쩌다 세상에 속해 있는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면 천사를 보내 수종들라 하시고(히 2:5)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편 8:4, 히 2:6)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날을 밤을 지새시며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라고 하시고 사람들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무엇입니까?

이렇게 사랑하시고,

아들을 죽음에 내어버리시나이까?

아버지 하나님이여!

아들의 음성을 들으소서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고난의 아픔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서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아버지여!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은 세상이고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우리가 더럽힌 저주로 얼룩진 땅입니다.

이 땅이 사람의 피를 받았고

사람에 의해 파괴되고 망가졌습니다.

이 땅은 잠시라도 사람이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심장에 불을 품고 있아오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려고 진노하는 땅을 붙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땅이 분출하여 소리를 내며 말합니다.

입이 없는 그 땅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저주를 일삼는 사람을 살려두심이 공의로우심입니까?”

내가 가슴속에 가두어 둔 이 불로 저들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이 땅덩어리가

몸에 붙은 더러운 벌레를 털어버리려고 뒤 흔드는 짐승같이

곳곳에서 불을 뿜고 흔들어대며 이 땅에서 사람을 털어내 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지 않았다면,

이미 이 땅 위에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회개하려고 마음을 돌이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시고 더욱 힘 있게 이 땅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개혁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0) 2011.06.04
사람의 타락과 영혼에 관하여.........  (0) 2011.06.02
주의 얼굴을 사모하여.  (0) 2010.12.06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0) 2010.12.01
넘치는 세속화!  (0) 201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