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입니다. 타인의 착각은 잘 보이는데 자신의 착각은 어두운 곳에만 있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John Calvin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1)”라고 첫 마디에 말했습니다.
인간의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은 무한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하나의 지식이고 그 하나의 지식에 대한 정확한 답은 찾기 어렵습니다.
현대 과학은 인간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Genom Project를 구성하여 인간에 관한 생물학적인 비밀을 데이터로 저장하여 인간의 수명연장과 또는 영구 생명을 향한 쉼 없는 도전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수명은 더욱 연장되고 그에 비하여 과학은 더욱 발전한 가운데 있어서 머지않아 미래의 꿈인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것과 같은 희망 속에 빠져 있습니다.
최근에 사회적인 큰 문제가 되었다가 다시 연구 재게된 줄기세포 연구기술의 발명으로 질병의 획기적인 치료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인류의 미래의 행복을 낙관하는 주장들까지 있습니다. 줄기세포는 상업적으로도 이용되고 생명 공학뿐만 아니라 Bio 쪽으로도 많은 접촉점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의약품, 건강기능성 식품,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상품에 적용하여 만병통치 약 처럼 소개되기도 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수명이 수십년 연장되고 죽음의 문제를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질병을 퇴치할 수 있는 최첨단의 과학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이모든 것은 극히 지엽적인 것일 뿐 궁극적인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기를 가져오지 못할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인간이 문제에 빠지게 된 원인은 노화나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첨단 과학과 뛰어난 의술등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줄기세포 연구도 계속되고 인간의 윤리적인 문제도 계속해서 연구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사람에게 유익한일이기 때문입니다만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런 문제들로 사람에게 부여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21세기에 인류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신 바벨탑이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바벨탑은 인류가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홍수의 멸망을 가져왔던 죄악의 심판에 대하여 신을 향한 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또 다시 이 땅위에 홍수 심판과 같은 거대한 재앙이 다가올 경우 인류가 탑 위에 올라 인류를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건설한 탑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신의 간섭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인간의 도전을 드러낸 것으로 더 이상 신의 심판과 간섭을 포기하게 하여 인류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함으로 신으로 하여금 사람에 대해서 단념을 갖게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줄기 세포나 뛰어는 의술을 이용한 죽음을 이기는 기술이 시도되어 인류를 영원히 죽음에서 건지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인류를 질병에서 자유롭게 함으로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도전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도전은 범죄로 말미암은 불행에 처해진 하나님의 심판을 바꾸어 범죄 속에서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도전이 결코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은 최초에 지음을 받을 때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람 창조의 목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은 결코 바람직한 해결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사람으로 부터 솟구치는 야망에 이끌려 자기 존재 목적에 대한 사명감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각각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치 사명을 가졌거나 그 일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질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면 이 땅이 범죄 하였다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뭔가 이율 배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를 일컬어 어거스틴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삶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데, 이는 이 삶이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또 이 낮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까닭이니이다.”2)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법이 없어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고 사회에 헌신하며 최선을 다하여 정직과 성실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존재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이 땅위에 존재하는 목적에 답을 요구하면 자기들의 삶이 자기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소수일 것이며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존재의 목적대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 한 이후 사람의 삶이 터무니없이 무질서하고 선이 없으며, 악만 존재하고 도처에 시랑이들이 우글거리는 약육강식의 험악한 피 흘리는 생존 경쟁만이 존재한다면 어디 그곳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요소들이 있고 사람이 선하게 보이고 악한 형상을 짊어진 사람이 그다지 없는 것은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사람의 마음에 양심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악한 일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에 공헌한 인생을 살며 보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헌신된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소수의 악한 모습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이 더 많고 매력적이며 아름답게 보이고 만족을 느낄만한 아름다운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죽음의 문제이며 또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항상 부족한 행복을 느끼고 고통이 없는 삶속에서도 고통의 두려움을 느끼는 불안이 휘장처럼 둘러쳐 있는 것을 느끼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끎임이 없는 질문들을 하게 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시시각각 좁혀지는 인생의 끝을 향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의 원인을 이해하고 모든 사람에 편안한 삶을 살게 하려고 고뇌하고 궁구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으나 답을 찾지 못하고 시궁창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민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정신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죽음과 인류의 비참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제시하여 놓았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 창조에 관한 목적과 사람이 어떻게 그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에 이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던 하나님께서 6일 째 되던 날에 모든 만물 가운데 짐승들과 새들 그리고 땅에 움직이는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나님께서 의논 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에 나는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3) 라고 증거 하심과 같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이 말한바 사람이 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논하시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논하시는 것은 창조의 사역을 진행하시는 도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만족에 대한 부족함을 채우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영은 물체가 아니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으시고 만져질 수 없으며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출 33:19에서 “선한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의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의 총합을 선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지극히 아름답고 부족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질서로움을 의미하는 말로써 감정과 의지의 완전하심5)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매력적인 감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혼동하여 지극이 세속적으로 매력적인 의미를 아름다움으로 묘사하고 있는 오류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교사와 설교자들도 아름다움에 대한 몰이해로 자기중심의 아름다움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서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 이르러 짐승을 만드신 후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위하여 완전한 조화와 관리를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 안에서 의논하시고 사람을 만들기로 하시되 사람으로 피조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셔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려고, 만물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때는 다른 짐승을 지으심과 같이 예술적 감각에 따라 충만하시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 보다는 그 피조물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모양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하나님의 모양을 드러내고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임으로 사람은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보이셨고 그 생애 동안 하나님의 모양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공생애를 사셨으며 하나님을 충분히 드러내셨습니다.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애동안 하신 일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지음을 받으신 참 사람으로서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협의하시고 원하시는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바 대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2) 자율적 존재.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지으시고 그 영혼에 지성과 감성 의지를 넣으셔서 인격체로 만드시고, 지성에 본유적 지식을 넣어주셨고, 그 지식을 느끼고 알 수 있게 하는 감성을, 감성에 의해 스스로 행동하려는 성향을 일으키는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하셨다. 육체에도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는데, 흙을 취하셔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영혼을 불어 넣으심으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살아있는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영혼과 육체가 결합을 통하여 생령이 되게하신 것은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인격을 육체는 피조물과 같은 육체적인 인격을 지니게 하였으며, 특히 육체는 하나님의 모양을 가졌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피조물들이 육체로서 감각을 가지지 못하는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 형상을 사람의 지성에서 육체의 행위로 드러냄으로 하나님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지성에는 지식을 넣어 두셨는데 “본유적 지식”이라고 부르고, (1)하나님에 관하여, (2)하나님에 대하여, (3)창조에 관하여, (4)사람에 관하여, 라는 4가지 지식입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된 존재로서 서로의 유기적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 지식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합니다. 두 인격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로 결합됨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야 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수 있고 살아 있으면 생령이 되려면 두 인격체가 반드시 지식으로 서로를 매개하여 유기적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인격체의 결합은 개별로 독특한 기능을 대표하게 합니다. 특성상 지식은 물질이 아닌 영적인 부분에 가까움으로 지성에 있으므로 영혼에 치우치게 했으며, 감각은 접촉점을 가진 생물체인 육체가 맡도록 하셨으며, 의지는 두 인격체가 결합됨으로 마음이 형성되고 마음 안에 두개의 의지가 별도로 있게 하여 마음이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선택된 의지에 따라 육체로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지를 담는 마음이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으로 선한 의지를 육체로 행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고, 육체는 감정이 드러내려는 성향인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여 육체로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구를 행하게 하려는 의지가 일어나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7)라고 말하였습니다. 선을 행하게 하려는 의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을 드러내는 본성, 곧 본유적 지식의 성향을 행하려는 의지인 반면 악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의 반대 다른 의지8)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9) 이것은 두 의지가 마음 안에 있어 어느 것을 행할 것인지 결정을 위한 생각 기능을 가집니다. 마음은 둘 중 어느 한 의지를 선택해야 하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객관적으로는 사람의 전인적인 표현을 가진 것처럼 드러내는 기관 같이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지성과 육체의 감성에서 보내어진 의지가 성향을 표출하려는 강력한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의지가 없으면 생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과 하나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생각, 또는 다양한 의지에 의해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은 결코 의지 없이 스스로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생각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의지의 기능이 되며, 끊임없이 영혼의 본유적 지식과 혹은 경험적 지식에서 답을 찾고, 육체의 감정에서 드러낸 의지를 행위로 드러낼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완전한 스스로의 기능을 부여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하신 것이 자율적 기능입니다.
마음은 본래 영혼과 육체가 생존하는 존재로서 움직이고 활동하는 생동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그 그러낸 의지가운데 어떤 의지를 육체에 반영하여 행동하게 할 것인지는 분별하는 의지의 기능입니다. 지성에 지식이 있고, 감성에 감각이 있는 것처럼 의지에 생각이라는 기능이 있고 의지를 담는 그릇을 일컬어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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