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

그리스도인입니까? (3)

생명있는 신앙 2012. 6. 3. 08:53

 

그리스도인입니까? (3)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 2:20)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번에 이어 계속된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자기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죽었고 이제 자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는 이 두 가지의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나를 사랑하사.

저는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녁까지 참된 믿음에 관한 영혼의 지성에서의 혼란스런 투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신뢰하는 믿음은 인간성을 충족시켜야 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주제는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이라는 주제로 종착되어진다는 사실앞에 영혼의 신음과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몸부림의 시간을 지내야 했었습니다. 비몽 사몽간에 일어난 영혼의 지성에서의 혼란스런 투쟁으로 인해 육체는 피곤하고 머리는 무거워 맑게 정리되지 않으며, 정신은 흐릿해서 영혼의 시야가 촛점을 잃은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였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려고 충만한 은혜를 준비해서 우리의 육체의 귀에 들려주시려고 합니다.

나즈막하게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입맞춤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그 말씀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영혼의 지성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난밤 잠을 설치면서 고뇌하는 참믿음과 거짓 믿음에 관하여 영혼의 지성이 투쟁할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를 살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오늘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영혼에 심으셔서 무한한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조명을 밝혀드신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말씀을 조명하여 마치 빛으로 사진이나 그림, 문서를 정학하게 스캔하는 것처럼 말씀을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스캔해 달라고,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셔 행동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고 저와 여러분은 들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뛸듯이 기뻐하고 우리의 추악하고 더러운 삶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가운데 나를 사랑하사라는 말씀으로 우선 은혜를 받아야 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받았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에 역사하기를 원하는지 알고자 알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영혼이 이끌어내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있고, 왜 있으며, 우리의 삶에는 어떤 결과가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의 가장 성경적인 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에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심히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심히 아름다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주제가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하나님의 영광이 피조세계에 나타나기 전에 우리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싶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고,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겠습니다.

나의 출생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왔고 행동하도록 하는 모든 지식은 무지와 결함에 함의된 왜곡된 죄의 본질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지로, 결함으로 인해 조화롭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이 생각하거나 육체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무질서가 영혼의 지성을 지배하게 되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 이전까지 느꼈던 영혼의 지성작용이 깜깜하게 어두워졌고 영혼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알수 없으며, 그저 육체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대응하거나 자신을 위한 지식을 생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영혼의 지성이 생성하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지식을 생성하는 규칙에 따르도록 규정하셨기 때문에 혼란스럽지 않게 보여졌습니다.

그들에게 정욕이 일어났고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이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출생하였으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체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이들이 태어나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을 예정하시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세상에는 가인과 같은 사람과 아벨과 같은 두 사람이 존재합니다. 시편기자를 악인은 모태에서 멀어졌으며(시58: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라고 표현하시면서 하나니의 아들들을 대표하시는 말로 '우리는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다"(요 8:41)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과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믿지 아니할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태생에서의 구별을 말씀하시고, 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자기들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시편 22:10, 44:24, 71:6, 이사야 44:2, 사사기 16:17, 렘1:5). 

가인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결과를 통한 역할에 관하여 분명하게 게시하는 시사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시각들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인의 삶을 살펴보면 가인의 출생이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인간의 정욕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태어날 것을 이미 아시고, 그 출생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볼수 있씁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아벨을 쳐 죽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삶을 살다가 이세상을 떠난 악을 행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사람들의 인식속에 남겨집니다.

반면 아벨은 가인이 악행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인간의 비극과 아픔, 그 출저의 결국은 인간의 정욕이 낳은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가인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허락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그는 태어나서는 안되는데 아담과 하와의 죄가 그를 세상에 있게 하고 인간에게 비극을 드러내는 슬픔 사람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결 같이 가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을 미워하고 아벨을 불쌍히 여기고 셋의 후예 이기를 바랍니다.

사실이 그렇구요.

그렇다고 셋은 다릅니까?

그가 태어날때 하늘의 천사가 와서 출생을 축하하고 그를 위해 별도의 교육을 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한 사람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사람이라는 종족 보존의 원칙이 적용되어진 사람이라는 것 뿐, 영혼의 지성에서는 죄의 본질인 지식만을 생성하는 타락한 사람의 후예일 뿐입니다.

그 후예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출생지는 우리를 보장하기에 확고한 안전을 담보로 하지 않습니다.

셋의 후예이지만 가인의 후예일수도 있고 아벨의 후예일 수도 있으며 셋의 후예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어떤 후예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의 삶을 잘 살펴 보고 그의 삶을 조명하여 우리에게 비춰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조명을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들의 삶을 조명하려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신을 살펴 보고 여러분이 스스로 놀라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무한한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결론적으로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고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관심 아래 있었으나, 끝까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거절하고 홀로 떠나고 말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결코 함께 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벨은 죄의 희생으로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아담의 죄가 없었다면 그는 희생 제물이 될 수 없었고,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죄를 지을 줄을 알고 계셨고, 그 죄가 아벨을 죽일 살인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놀랍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은 아벨을 돕지 않았습니다. 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가인과 난자한 피를 흘리며 고통가운데 죽어가는 아벨에게 아무런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기적적인 간증들을 힘있게 말합니다.

자기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기적적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며 위험에 처해 있을땨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자기에게만 온통 관심을 가지신 것처럼 하나님을 말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신앙간증을 들을 때 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놀랍게 개입하시고, 기적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왜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하며 생명이 끊어지는데 개입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간증하시는 분에게는 큰 사랑으로 개입하시고 아벨은 버리셨을까?

이런 풀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에서 항상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관하여 의문을 갖게합니다.

참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

왜 아벨에게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에게는 개입하셔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가?

 

끝 없는 하나님의 인내

 

아벨의 고통스런 죽음에서 들여다 보이는 확실한 한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죽이지 못하게 할 수 도 있습니다. 군대를 보내 그를 막으실 수 있고, 아니면 자연에 속한 동물이나 짐승을 보내 아벨을 가인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건지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기독교였고 여러분은 이런 기독교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실패한 사랑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믿고, 죄를 많이 짖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 가난과 고난과 문제가 있고, 고통이 떠나지 않은 인생에는 신앙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우리모두가 이런 기독교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협소합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항상 붉게 충혈되어 있고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

죽어 고통을 당하는 아벨보다 가인에게 마음을 더 쏟고 계셨고, 가인이 아벨을 쳐죽일 때 하나님은 가슴을 찢으시고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가인이 팔을 들어 아벨을 칠때 그분의 눈은 너무 놀라 튀어 나올정도였고, 너무 놀랐기 때문에 오히려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가인은 아벨을 죽이려고 무기를 든 팔을 내려 아벨을 깨뜨렸습니다. 깨어진 그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온 하늘에 퍼졌으며 땅은 피를 받아 삼켰습니다.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어디있고 무엇을 합니까?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이들이 뭘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의 마음에 불안을 부으시고 심각한 아픔을 드러내며 아들들을 향하여 속히 찾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 간증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에 이상하게 탤레파시같은 것이 일어나 죄를 막도록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은 아벨이 죽었고 가인은 죽은 아벨을 감춰버렸으니 땅에 묻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범죄앞에 아무런 행위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막지 않으셨고, 살인을 제지하지 않으셨으며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지고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을 때 여러분의 영혼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계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죄를 막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과 불신과 회의적인 마음입니까?

반대로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고 있습니다.

아벨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죄인이며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정욕의 아들 가인에게 쏟아 부으시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아벨을 보아서는 결코 볼수 없는 내용입니다.

가인은 죄의 열매로 정욕의 자식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신분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한 핏줄을 물려 받아 태어난 형제이지만 서로 달랐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막연히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아버지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죄있는 모양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을 지라도 그는 실상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히 죄인의 아들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짖지 않았다면 태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죄의 자식인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알고 가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가인은 죄의 열매라는 구분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열매인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은 열등 의식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서슴치 않고 죄를 행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가인과 아벨을 우리에게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누구인가를 가장 먼저 살펴 보라고 우리에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교만하게도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 번갈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조명해봅니다. 그리고 가인은 사람을 죽였고 아벨은 죽임을 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벨을 동정하여 아벨에게 우리 자신을 비춰보고 가인에게 비취는 것을 무섭고 두려워하며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짓된 본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이 우리를 선하게 꾸미는 추악함이고 속임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가인을 비추어 보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오직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존재이며 우리 속에 죄의 소원이 우글거리고, 잠시라도 죄를 행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죄 자체라고 비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추악한 죄인의 모습에 비추어 죄를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비췸을 통해 우리가 가인과 같이 추악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 비로서 하나님과 우리자신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쉬지 않은 죄의 지식이 지성에서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추악한 마음을 가지고 아벨에게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가장하는 것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악하고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뼈속까지 죄의 정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때야 비로소 추악한 우리를 우리가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무한히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경고하시고 죄를 멀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인의 행동에 제제를 가하여 가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기 때문에 가인에게 제제를 가하시고 그로 하여금 죄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굶주린 맹수와 같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삼키려고 덤벼들때에 슬퍼하시기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인의 인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예비된 세상을 보시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가인을 징계하셔서 벌하시고 죽이신다면 그는 즉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의 나락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삶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지라도 그의 인생에 주어진 영원한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태어난 가인에게는 삶의 즐거움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무슨일을 하든지 참고 눈감고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혹시 그가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돌아설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며 무슨 죄를 지을 지라도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혹시 그가 돌이켜 회개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한가지 희망으로 가지시고 가인의 인생의 끝날 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모든 고소인들의 고소하는 입을 막고 없는 것으로 만드시고, 그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해두셨고, 그를 보내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되리라. (이사야 1:18)라고 말씀하셨고, 죄가 있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면 깨끗이 앃어지고 사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인생을 끝날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완악한 행위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비추어 가인이기를 거절하고 아벨이기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위선된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저는 또다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말해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을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위선을 벗어버리고 가인을 여러분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이 완고한 죄인인 것을 고백하십시요. 그리고 죄악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삶이 끝없는 하나님의 인내와 경주하고 있었던 삶을 철저히 용서를 구하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혼의 깊은 곳 지성의 샘에서 솟아나는 여러분으로 행동하게 하는 지식을 보실 것입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생성된 성령께서 조명하신 지식인지, 아니면 아직 확실한 확신이 없으나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의하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죄의 본질인 지식인지 살펴 보시고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비춰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자신이 참으로 죄인인 것을 알고 용서 받지 않으면 당장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무서운 공포앞에 부들부들 떨지 않으면 여러분이 지금 동의하는 모든 동의는 거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라고 외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무엇때문에 죄에 일관된 인생을 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악한 마음을 가진 거짓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이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사실을 행하신 것을 말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사랑하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아벨에 자기를 비추어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선하게 판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아벨을 아십니까?

알고 그에게 자신을 비추어 일치된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벨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먼저 그는 아버지 아담안에서 함께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담 안에서 자기의 의지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로 아벨을 가인에게 보내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아벨의 삶이 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삶은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의 영혼이 아벨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가인이 죄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영혼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네가 죄를 범하여 오늘 내가 여기에 있고 너의 죄의 정욕이 나를 세상에 있게 했다.”

그러면 네가 세상에 있고난 이후는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에 이르지만 나는 지옥에 간다

바로 너의 죄가 나로하여금 지옥으로가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죄인들이 자기들의 존재에 관한 분노입니다.

그들은 이 분노를 표출합니다.

물론 가인이 죄에 관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창조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관하여, 라는 지식을 전혀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서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지옥으로 가는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놀랍게는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지성은 정말 어두워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여러분은 정말 이런 것들을 이해하시고 계십니까?

그러면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향하여 어떻게 대하는지 이해가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신자들에게 보내실때 어떻게 보내셨는지 이해가 됩니까?

진정 여러분이 아벨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아들은 이미 천국을 얻었고 이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들을 희생의 제물로 보냅니다.

그들을 죽음의 현장에 보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멸시하고 천대하고, 무시하며, 조롱하고, 때리고, 핍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보다 더한 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행할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함으로 자기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행하는 모든 악행에 대해서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당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라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주어야 합니다. ‘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고,

그가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줄수 있고 그의 만족을 조금이라도 채워줘야합니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은 죄의 대가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지옥을 향하는 처참한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인들)로서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고, 손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산상수훈이고 그 말씀을 읽을때 성령께서 조명하셔서 우리의 영혼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대로 행할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벨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지식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죽을 수 밖에 없는 희생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제물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분명히 인식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존재로 저와 여러분을 보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손에 죽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들을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죄인들을 이기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그분에게서 우리가 배운 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에게 비춰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죄때문에 죽어야 하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몸을 버리신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몸을 버리고 희생을 당하는 죄로 인한 비극적인 삶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장본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들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태어나지 안아도 되는 정욕의 열매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성경이 확실히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운데 누가 정욕의 열매이고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인지, 곧 가인편과 아벨편인지 결코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인편에 속한 사람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반열에 들어선 증거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었고, 책을 통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편에 속한 죄인인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무한히 기뻐하시고 계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바로 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젠가까지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의 증거를 읽고 놀라 몸서리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라(11:11)” 라는 증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글 뿐만 아닙니다. 여러곳에서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넘어짐으로 은혜가 버림 받은 이방인에게 넘처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이방인에게 은혜를 넘치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정욕의 자식들이어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자이더니( 2:14)”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분명히 버림받은 약속으로부터 배제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그 구원의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자기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효과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래 우리는 가인과 같이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 수도 없는 이방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래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란 전혀 불가능했었습니다. 

우리의 탄생의 근원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정욕이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했고,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단순히 허락에 의해 탄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반열에 서 있는 이것이 기적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하는 선택된 사람들의 원죄에 더한 죄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쳐 온 것입니다.

본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고 성령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택한 백성들에게 조명되어지도록 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로 옮겨 온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직접 보내셔서 원죄의 수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무죄한 분의 죽으심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벨의 죽음과 같지 않습니다.  아벨은 아담의 범죄로 함께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무죄한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무죄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인과 우리 자신의 태생의 원인을 잘 살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태생을 아십니까? 우리의 태생은 가인의 태생과 같습니다.

본래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죄악인 정욕의 결과들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정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불신자로서 죽음 이후에 지옥에 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열매로 이 땅에 태어나서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또 정욕을 불일듯 일으켜 죄의 열매를 생산하는 거듭되는 죄를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의 열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 내어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예비된 불행한 미래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없으며, 불행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앉고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태어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존재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무한한 영광을 옷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존재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지혜로운 작정과 허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작정과 허락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창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에게는 지음을 받은 그 존재로서의 가치를 드러내는 의무가 부가 되었습니다. 피조물에게 요구하는 의무는 조화와 완전이었고, 이것을 아름다움, 곧 선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만물은 이 요구대로 존재함으로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완전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는 만물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구별된 자율적으로 스스로 완전함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는 존재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과, 자율적으로 스스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와 구별되게 지으심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구별되지 않지만 그 의무에 있어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존재함으로 아름답고, 사람은 사람이 아름답게 했을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전자는 주관적이고 후자는 객관적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로서 의무에 대한 부담이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존재함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함으로 부담이 없습니다. 후자 즉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무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가치의 요구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율적으로 스스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외모를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느냐에 따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와 내면의 가치에 더 중요한 기준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영광이 존재함으로 부어진 것이고, 그 존재에 대해서 부가된 의무를 행할 때 더욱 완전한 존재로서 자신과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드러내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에서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에 대한 계획은 피조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셨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무한한 영광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존재해 보는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곳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된 것이지만,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부여하신 자율로 인해 허락을 용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하신 계획에는 선택과 허락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공존 되어지도록 하였고, 이 둘을 일률적으로 구분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되어 사람의 지식으로 판단 하지 못하도록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독특하게 지으신 사람에게 부여된 자율로 인해 사람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허락을 허용하신 것이고 그 허용의 결과들이 죄의 열매들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들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에게서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가인이 끝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자기를 돌이켜 회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출생이 죄의 열매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음성을 듣고 하나님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만, 진리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의 결론을 죄의 열매 곧 정욕의 열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님께서 정욕으로 말미암아 저를 낳았다는 결론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효도할 작정으로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영혼의 지성에 새기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인생의 끝날에 저는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막을 내리는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저와 함께 하는 것이고 저를 낳은 저의 부모님께 무한한 효도를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것과는 무관하게 전혀 관심이없이 사는 사람을 보시렵니까?

가인이 분노하고 혈기를 드러내고 살의를 가진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에 대한 열매로서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물론 가인이 그런 마음으로 살의를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그가 자기의 출생의 배경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4:25).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가진의 죄가 아니라 아벨의 죄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게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벨의 죄로 인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말하는 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아 짓고 그들의 정욕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어떻게 아벨의 죄로 인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원죄와 자범죄라는 구분으로 접근하여 이해합니다.

원죄는 타락하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자신과 함께 모든 인류를 죄에 빠뜨려 모든 사람을 죄인이 되게하는 원인이 되는 죄를 의미하고, 자범죄는 타락하여 죄에 속한 사람이 자기의 판단과 행위로서 범한 개개의 죄를 말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원죄는 모든 인류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속하게 된 하나의 죄로서 공동의 죄를 의미하고 자범죄는 공동의 죄속에서 개개인이 범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로 볼때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은 가인과 아벨이 죄에 속하여 죄인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죄인으로서 자기의 개별적인 죄을 더하여 짓는 것입니다. 물론 아담의 죄로말미암아 하나의 죄인 원죄에 속한 사람은 죄인으로서 그의 모든 행위가 죄의 행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죄로 드러나 보이지 않은 선한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모두가 죄입니다. 단 그 행위를 개개의 죄라고 말하지 않을 뿐, 죄속에서 행한 행위임으로 죄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그 모든 행위가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일 뿐이고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는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3:28)”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분명하게 알수 있는 것은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은 죄의 영역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죄의 영역에 살기 때문에 결코 선을 행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를 행한다면 죄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그 외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까지도 죄의 영역 안에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선이 있었고 그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되었다면 그것은 죄인에게 베푼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행하는 행위를 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영역안에 있는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에게 은혜로 계시하셔서 하나님의 받으심이 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일이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죄인들의 행위를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일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이 아벨에게 성령의 조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한가지의 의문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왜 아벨에게만 성령의 조명을 주셨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앞에서 충분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에 동일하게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정욕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지만 가인은 죄의 열매인 반면 아벨은 정욕속에 감추어 놓은 하나님의 선택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였어도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는 성령의 조명이 있었던 반면,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자기의 고집대로 일관하는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성령의 조명이 있지 않았거나 조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명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구별된 두 사람이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이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하였던 가인에게 속한 사람인가? 아벨에게 속한 사람인가? 물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죄의 열매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번성하게 하실때 계획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으로 분명히 구별되고 이 구별은 삶의 끝날에 가서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는 믿음, 다른 하나는 죄의 열매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그루의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반면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한해서 이런 원리를 깨뜨리셨습니다. 그것이 곳 참감람나무를 배어내고 돌감람 나무 가지를 접붙여 새로운 나무를 만드신 것입니다.

정욕의 열매였으며, 가인처럼 하나님을 알 수도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는 죄의 열매로서 영원한 지옥이 예비 되어 있는 깜깜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유다서), 유다 서신을 받아든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없는 비참한 인생이라는 사실 앞에 두려워 떨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존재라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뻤으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난 이후부터 우리의 인생은 거침없이 깨뜨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은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이 구원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확실한지 아십니까?

그 예비된 그 어두움의 나라는 우리가 결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구원의 긴박성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우리의 미래를 보이시면서 한가지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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