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

그리스도인입니까?(5)

생명있는 신앙 2012. 6. 17. 22:03

그리스도인입니까?(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하는 것이라( 2:20)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약간 어려운 시간을 함께 해야겠습니다

이 말씀은 부분 부분, 여러번에 걸쳐 말씀을 드린 내용인데 정리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므로 여러분들이 진리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면을 통해서 읽으신 내용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의 지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임을 언급해 드립니다.

자기 몸을 버리신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타락 이후 지식이 편향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셨다고 할때 “완전하다라는 의미도 역시 자기 중심으로 편향된 지식을 고집합니다. 이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성에 가진 모든 사람들의 지식들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불완전한 지식이기 때문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인입니다.

앞에서 충분히 살펴 본대로, 사람은 짐승과 같이 감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한 후 그 지식으로 행동으로 드러내며 사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구조를 가진 존재입니다. 지식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는데 지식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세가지의 필수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육체가 오감을 가지거나 마음에서 의지를 행하기 위해 지각된 지식을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는 것이고, 둘째는 반영된 그 표상을 조명해 주는 일이고, 셋째는 조명을 받으므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에서는 이런 조건적인 작용에 의해서만 지식이 생성되며 이렇게 생성된 지식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영혼의 감성 작용에 의해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이 지성에 경험을 가진 지식으로 기억을 갖고, 지각된 지식은 의지를 통해 육체의 마음으로 반영하여 행동하도록 하는 영혼과 육체의 작용에 의해 생성, 기억, 행동의 작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을 가지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낸 행위가 있다면, 그 행위는 짐승과 같은 감각에 반응하는 행위이고 이 행위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되거나 다시 반복하여 행동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동하기 위해 지식이 필요하고 기억된 지식은 표상을 조명하여 발전되거나 향상된 지식을 생성하여 향상된 차원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갖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기위해 표상을 조명해주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때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에 의해 행동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사람에게 지식을 주셔야만 하고, 지식의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식의 모본을 부여 하셔야만 했고 그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되었고, 본유지식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유지식을 상실하였으면, 영혼의 지성에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표상을 조명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으며, 결국 사람은 짐승과 같은 상태가 되지 않았느냐, 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으나, 영혼의 지성의 역할은 지식을 생성할 뿐만 아니라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서 지각을 받은 후 다시 저장하여 육체가 감각을 가지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할때 그 저장 지식이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기 때문에 지음을 받은 후 타락하기 이전까지 생성된 그 지식이 본유지식을 대신해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된 지식은 본질상 진리이지만 이 지식이 최초 아담이 오감을 통해 가진 감각의 표상과 동일한 표상을 조명할때만 항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상황이나 환경 혹 다양한 변화에 의하여 처음 감각된 표상에 더해진 어떤 다른 표상들이 덧붙여져 있거나 다른 상황에 속해 있을 때 진리가 조명할지라도 변하거나 더해진 만큼의 부분에서 무지나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경험된 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된 지식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진리 지식이 아니라는 것은 감각된 표상에는 최초 감각된 상황과 다른 어떤 요소나 상황이 첨가 되거나 더해짐으로 인해 변화 만큼의 표상을 더하여 반영할 때 최초 경험되지 않은 부분을 이미 생성된 지식이 조명 할때 무지와 결함을 가진 지식을 생성함으로 결함을 가진 비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이 표상을 조명할 때는 본유지식이 조명할때 표상과 동일한 상태에서 지식이 생성될 때 그대로 진리이고,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면 부분적으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은 진리일 수 없기 때문에 이 지식이 자기 중심의 편향된 지식을 갖는 것은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 조명하는 지식이 자기의 지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 중심으로 편향된 지적 감각을 갖기 때문에 모든 생각이 완전한 지식이 되지 못한 오류일 수 밖에 없고, ‘완전하다에 관한 의미 자기 중심으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편향적인 지식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실지로 사람들은 완전하다라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결함이 없고 실수하지 않으며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상태라고 인식합니다. 이는 자기 기준에 있어서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의미를 부정적인 부분으로 두고, 자기 개념의 선으로 좋다고 판단되는 자기가 가진 지식에 의해 조명에 의해 일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다의 의미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하다라는 의미는 완전하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존재가 스스로 자신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의미를 이해하며, 옳은 것을 결정하여 더 나은 의미의 완전을 성취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경우 그것도 완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완전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만드신 것이고, 지음을 받은 존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진 사람을 잘못 만드신 것으로 판단하는 지성적인 작용이 편향적인 지성의 상태에서 얻은 지각이지 진리에 의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지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가 결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음으로 더욱 자율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완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사람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요구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타락의 길에 빠졌으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결과가 불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했기 때문이며, 완전한 사람이 자기의 선택에 의해 어떤 행위를 하든지 완전함을 더욱 확증하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책임이 부여하신 것이 완전함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완전한 존재입니다. 비록 지금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을지라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주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고 완전함으로 그 지으심에 대한 자율적인 보답의 반응, 자기 행위애 대한 자기의 책임, 자기의 식에 의한 자율적인 결정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나님께서는 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지음을 받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이어서 생산하도록 생육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는 창세전부터 하나님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이 아담에 의해 탄생되도록 예정 되어있고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생산을 위하여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이나 딸들을 낳을 것이고 이들이 계속해서 후손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개입함으로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택 이외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정욕의 열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원인중에 하나였는데, 이 원인에 의하면 그들에게 정욕도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욕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완고한 거부를 보았고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조명해 주시지 않았다는 결론을 확인했습니다. (죄의 열매1) 이것을 성경은 약속의 자식과 종의 자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식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부류로 구별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버림 받기 위해 태어난 정욕의 자식으로 구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정욕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생산되어질 것에 관한 여부가 허락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도를 빌어 이를 말하기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이더니( 1:12)”라고 했고, 약속의 자녀들과 종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구분되어져 있으며, 우리와 모든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은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잉여의 자식들도 구별하여 칭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후손들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예정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죄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존재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다윗이 말하기는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5)”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이방인에게는 죄의 결과를 의미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어머니의 죄의 유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라도 자신이 죄중에 잉태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정욕의 열매들인 우리가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정욕의 산물을 그대로 행하고 사는데 우리가 존재하고 숨을 쉬며 세상을 보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았다는 슬픈 사실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터전이 지극히 추할진대 우리가 구원이라는 큰 영광을 누린다는 것은 전혀 기대 할 수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에 속해 있고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뭣인가 잘못 꿰어진 실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구원이 과연 참된 구원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의 열매들인 이방인들은 곧 종의 아들로 지칭되고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여도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완강하게 거절한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한바와 같이 우리가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무수히 많은 이방인들이 이 땅에 태어났다가 비참한 운명의 바다로 흘러가는 안개와 같은 삶을 살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의 운명을 알수 있으며, 어떻게 자신의 존재의 비밀을 인식하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기뻐하거나 슬퍼 할 수 있습니까?

실지로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입니다.  우리도 엄연히 하나님의 상속에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이르렀다고 가정했을 때 상속을 위해 자녀의 명부에서 우리의 이름을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름이 없음을 알고 분노 할 것입니다. “왜 우리를 낳았으면서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느냐고 떠들어 천국을 뒤엎어 버릴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때문이 아닙니까?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지 않을탠데 …………..하고 그들의 원망 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은 죄는 자기들에게 심판을 받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정욕으로 낳은 후손들까지 심판의 재물이 되게하여 더욱 분노를 넘치게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이세상을 떠나고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저 나라에 갔을 때에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결코 알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고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3:6)”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본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아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아 죄를 씻어주시고 십자가에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된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 표현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다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버림 받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니라(1:13)”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다른 의미를 가진 것 같은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자들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를 항상 현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으로 사람을 낳는 것을 의미하는 영적인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지, 모태로 태어날때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로 구별되게 태어나는 육적 탄생을 염두에 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말씀을 통해 약속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예전에는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후손을 약속의 아들로 보셨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말씀을 믿는 사람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칭하시고 이런 사람을 지금 말씀으로 낳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육적인 탄생의 구별에서 영적 탄생의 구별로 분명하게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이 탄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고 적용되게 하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하는 것은 얻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8)”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3:5)”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제시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 참조)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문은 열렸습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죄의 열매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 그 자격은 하나님의 자녀 들에게만 있었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일입니다. 죄의 정욕의 열매인 이방인들인 우리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열려지게 된것입니다.

복음이 아닙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신분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의 여섯부족과의 차이점은 바로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과 같은 버림받은 이방인이라는 구별이었습니다.

이런 구별은 창세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정욕을 일으켜 죄악의 열매인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고, 그 결과로 우리가 오늘 여기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순전히 우리의 탄생은 저주였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복으로 뒤바뀐 것 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땅에 널리 퍼졌고,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 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버림맏은 이방인이 말씀에 사로잡혀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쉬지 않고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그 들은 말씀의 조명을 받아(요한복음 16:13) 사람에게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선포 되지 않는 곳에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고, 그들이 믿음을 소망하고 믿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지라도 진리가 없다면 그곳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보냄을 받은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전할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의 열매들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4)”라고 분명히 말하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우리 이전에 구약시대 이방인들이나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만났거나 보냄을 받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끝까지 완고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

사람에게 죄가 일어난 이후 죄는 사람을 사로잡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일만 행하게 했습니다. 그 원인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 때문이고, 그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이 함의하고 있어, 온전하지 못한 지식이 되어 사람들은 죄의 요구에합당한 행위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염된 거짓 지식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지식때문에 사람들은 안정과 질서를 잃고 평안을 잃었습니다.  지식속에 함의 된 무지는 방향을 잃은 배와 같이 좌표 없이 흔들리는 지각을 주고, 결함은 지식을 왜곡시키는 지각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에게 이런 지각들을 가진 결과를 아시고 확실히 수정된 분명한 지식, 곧 진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본유지식이고 이 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불안과 왜곡된 지식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본유지식을 상실한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혼이 가진 지각들에는 불안, 초조, 두려움, 불만족, 등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모든 기대하지 않은 지각들이 무지와 결함으로 부터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지식과 높은 판단력, 고도의 도덕감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가진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이 함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적 깊이가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지식에 함의된 결함으로 인해 평안, 사랑, 기쁨, 참된 소망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불안, 근심, 걱정, 초조, 두려움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와 결함을 가진 지식 곧 죄의 본질에서 지각되는 정서들인 것입니다.

지식은 지각을 갖게하고 지각된 지식이 의지를 일으켜 마음에서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근원은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지식이 없이는 결코 행동되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 되는데 사람 자체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자연론자들은 사람은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구조속에는 지식을 생성하는 대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생물학적인 구조가 증명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 말로서 스스로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구조의 본질에 관하여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생성하는 기능을 가진 그 구조가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하며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는데 지식이 생성되도록 조명해주는 지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의 대상인 사물의 존재 자체와 인식하기 위한 지식이 표상으로 지성에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감각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각을 가지거나 인식하려는 지식은 그것들을 인식하기 위해 감각된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지식이 조명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명도 없는데 감각된 표상에 관한 지식을 생성한다거나 인식하려는 지식에 관하여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한다면 각 사람마다 생성하는 지식이 일치하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다시말하자면 여러사람들에게 그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a 라는 어떤 사물을 보거나 듣는 등, 감각을 갖도록 하여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 되었을 때 지각을 갖게되는 생성된 지식이 서로 일치할 확율은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을 생각하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곧 한번도 경험이 없으며 사물에 관한 어떤 한 부분이라도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사물을 감각하여 반영된 표상을 지식으로 생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식의 자연생성론은 과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인식록의 활발한 논의가 계속되는 과제중의 하나인데 피조물인 사람의 구조적 기능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어떤 기능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고 불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조적 논리에 의해 각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생성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각기 자기가 생성한 지식은 생성되어 진체로 진리이지 그 지식이 거짓과 오염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지식은 진리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이 현대 사상에 팽배해 있고 그 사상이 포괄적인 지식에 적용할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자연주의자들이 말하는 인식론에 관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신 것입니다. 이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피조물인 사람에게 부여하심으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지식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기 때문에 하나의 표준이 사람에게 제시되어 모두가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통의 지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이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제시되고 이 지식에 의해 사람의 지식에 생성되어진 지식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하나님께서 모든 지식을 가지시고 계시고,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에 두셨고,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 안에 있으며, 지성에 표상이 반영되면 그 본유지식이 표상을 조명함으로 표상에 대한 지식이 조명되어 지성이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식 생성 작용이고 이렇게 생성된 지식대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때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식을 생성함으로 서로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부여하신 지식이 근거가 되어 그 지식의 조명에 의해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 지식을 상실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은 지식에 의해 생령이 되었고 경험과 지식을 생성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 생성하는 지식으로 자율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의 영혼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고,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은 상실하고 그 기능을 잃고, 감각에 의해 반영된 표상에 대해서 조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감각을 가졌고, 그 감각에 대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고 그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져야 하는데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얻은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는데, 표상과 이미 얻은 지식과 일치하지 않은 많은 요소들이 표상에 산재해 있어서 지식은 산재한 그 요소들을 무지로 하고 결함된 부분을 결함으로 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후 사람은 전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만을 생성하게 되었고 이 지식을 무지와 결함에 오염되어 불명료한 지식이라 하고 불명료한 지식으로 지각을 갖고 의지를 일으켜 행위를 하기 때문에 이 지식을 죄라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는 죄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모든 지식이고 타락된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인 것입니다. 실지로 무지와 결함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체로서 어떤 인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식과 결합하여 강력한 죄가 되게하는 것은 지식 자체를 진리로서의 지식이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지와 결함은 발생하거나 생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는 아니지만 본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관계없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 지식은 다른 지식을 숙주로 하여 기생해서 숙주인 지식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사람이 육체의 오감이나 지식에 의해 감각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본유지식이나 이미 생성된 자기 지식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가진후 의지를 이용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악을 행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이 것들을 받아들임으로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불순종의 지식을 생성하고 만 것입니다. 이 지식이 지각을 갖고 의지로 행하게 함으로 비로서 죄의 열매인 악을 행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을 거절한 것이 되고, 이런 거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는 결과로서 본유지식을 상실하게 된것입니다. 본유지식이 상실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되었던 지식만 남게 되고, 이 지식이 본유지식을 대신한다고 앞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최초 사람에게서 죄의 본질은 어떻게 생성되느냐? 하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상세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본문의 사건에 관하여 많은 연구들을 이어 왔으나 그 구체적인 사실을 해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짐승으로 뱀이 등장하여 하와를 유횩하는 장면이 의인화 된 것인지 아니면 실지로 뱀의 유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뱀속으로 들어갔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뱀은 확실히 유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실을 보증하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해서 심판하실때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왜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뱀을 지으실때 영혼을 주지 않으셨고, 영혼이 없는 뱀은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할 수없으며 오직 감성 뿐입니다. 지식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의 하나님과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의견을 낼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하시면 말씀을 받고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피조물이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하여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지식이 있어야 하고 사람과 같이 지식을 생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기 지식을 생성하여 자기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하나님께 제시할 경우 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시는 것처럼 뱀에게 물으시지 않고, 즉시 뱀에게 저주하시기를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물을 불러내실때 상태를 있게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와는 뱀과 대화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유혹을 받을 때 뱀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질문에 대답하고 서로 의견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면 뱀은 하나님과는 대화를 하지 못하고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요? 대화의 내용을 보면 뱀은 고의적 의도를 가지고 사람에게 접근하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했고 이 뱀을 일컬러 신약 성경에서는 옛 뱀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시각으로 보면 뱀은 뱀 자신의 짐승이 아니라 사단이 뱀을 이용해서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곧 뱀은 실제 뱀이었으나, 사람과 대화하는 실체는 뱀이 아니라 뱀을 도구로 해서 사단이 하와와 대화를 한 것입니다. 만약 사단이 뱀을 가장하거나 몸을 빌려 하와를 유혹했다면 타락한 우리의 지성으로서는 사단이 행한 속임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에 관한 지식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가지지 않은 사단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함으로 지성에 표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표상이 없기 때문에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사단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각할 수 없으며 지각되지 않은 사단과는 대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존재했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대로 옛 뱀 곧 사단이라고도 하는 그 존재는 뱀이라기 보다는 뱀의 몸을 빌린  사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갖게하고 그 감각을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후에 지식의 조명을 받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 관한 지식을 생성한 후 지각을 갖게 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지각을 갖지 못하면 사단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단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실지로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오감에 감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하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뱀의 몸을 사용한 것이고, 뱀을 지각한 사람은 뱀과 대화를 했지만 실지로는 뱀안에 들어 있는 사단과 대화를 한 것입니다. 만약 하와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생태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지 않은 상태라면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 있었을 것이고 그의 지성에서는 뱀에 관한 지식이 조명되어 온전하게 지식을 갖고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타락한 것은 뱀에게서 사단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의 오감이나 지성의 지식으로 표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뱀을 이용하여 하와에게 다가왔고 하와의 영혼에서는 뱀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그와 대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단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잠시만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사단은 영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뱀을 이용하여 하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그 감각을 자기의 지성에서 표상으로 받은뒤 그것을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육체를 가진 사람과 음성으로 대화를 하는 것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면서 의지를 실행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지로 뱀을 이용하여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고 사람을 유혹하는 의지는 실행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의지를 일으켜 행동을 하는데, 사단은 육체가 없이도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천사도 당연히 의지를 가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천사들은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느냐 하는 것은 많은 연구가 요구됩니다.

그럴지라도 사단이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하는 일을 사람에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서 사람은 자신의 완전함을 드러낼 것인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아니면 불순종 할지라도 피조물로서의 완전함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종종 유혹에서 넘어져 불순종을 하게 된 하와는 스스로 완전하지 못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사람의 자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 된 것입니다.  즉 사람 자기의 편향된 지식이 사람에 대한 어떤 기준을 갖고 있고 그 기준에 적용되어야만이 올바른 것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는 아담과 하와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지 그것은 전혀 관계없이 피조물로서 완전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와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녀의 영혼의 지성에서 작용하는 본유지식과 그에 의해 생성된 자기 지식이 뱀의 말을 들은 감각된 표상을 조명하게 된다. 이때 하와는 본유지식이 조명과 자기 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지식을 동시에 지각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와의 영혼이 갈등을 하게 된 원인입니다. 만약 하와의 영혼에서 하나의 지식이 표상을 조명을 하면 그 조명에 의한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갖게되어 마음에서 지식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하와에게는 두개 이상의 지각을 갖고 이것을 마음에 반영함으로 행위를 하게되는 마음이 어떤 지식을 선택할 것인지 갈등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그녀가 가진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여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하와의 영혼에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지식이 생성되게 한 것입니다. 하와는 이 두 지식 사이에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 갈등은 마음이 선택한 지식에 따라 하와에게 일어나는 결과는 순전히 자기의 결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히 객관적인 존재이며 완전한 자율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하느냐 그것은 순전히 자기에게 있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기의 것입니다.

이런 갈등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말에 더 신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단의 말은 신뢰할 수 없는 말입니까?

보냄을 받으심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되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하였도다( 21:32)”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드러내시는 대상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가인에게 더 사랑을 나타내셨고 아벨을 가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에게서는 버림을 받은 이스마엘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으며 풍족하게 살도록 채워주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에게도 에서를 많이 사랑하셔서 그의 삶이 윤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보내 하나님의 사랑을 시기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시고 아들을을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했고 끝내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기도 했고 그들에게 사랑을 배푸셔서 풍족한 삶을 살게 하기도 했으며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기도 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기다리시고 오래 참고 인내하시고 기다려도, 다가오지 않은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을 구원받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바와 같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와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부여하시지만 사람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하여 알지도 못하고 끝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아니하였다고 일괄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최초 인류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에게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가오셔서 끝까지 기다리셨으나 끝까지 가인이 돌이키지 아니하고 돌아서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그후로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 야곱의 형 에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하나님을 배하고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하셨지만 그래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는 선지자를, 이방인에게는 이스라엘을 보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한가지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죄의 노예로 정욕대로 세상을 살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심.

예수께서 공생에 마지막 기간에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영광 중에 예루살렘에 입성셨을 때 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시니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사람들 돈바꾸는 사람들, 비들기 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웅성 거렸습니다. 이는 제사 때 마다 백성들이 제물을 드리는 일에 편의를 위해서 대제사장들에 의해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를 성전을 청소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이일 당시 사람들에게 부당한 것이라고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마련해야 하는데 많은 번잡할 일들이 있었거나 아니면 규례를 이용하여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편법으로 허용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일을 부당하게 보셨으며 비들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고 상을 뒤엎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의 권력층과 지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터였는데, 예수님의 행위는 그들에게 더욱 예민하게 감시의 눈초리를 놓지 않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내 아들을 존대하리라( 20:1-15)”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죄있는 모양으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그의 모든 말씀은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으로 진리이고, 부정적이든지 긍정적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모든 감각된 표상들을 조명하여 생성된 지식의 말씀으로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리이고 스스로 자신을 진리라고 표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4:6)”

내가 진리를 말함으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8:45)”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지금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8:40)”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3:21)”

또한 하나님께 속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8:47)” 라고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인들이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선지자로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감히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사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셨고, 그 책망에 그들의 양심에서 찔림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가 포도원 주인과 농부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오랜후 포도원은 농사가 잘되었고 농부들은 배불리 먹고 살게 되었을때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이 그동안 농장에서 얻은 소출을 가지고 살았으니, 이제 세를 얼마간 받으려고 기 위해서 종을 보냈습니다.  종은 농부들에게 가서 주인의 전갈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되었으니 얼마간 세를 납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농장의 농부들은 다른 종이 다시 보냄을 받아 온것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냈습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아주 죽도록 두들겨 패서 거반 죽게 해서 들것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이 아들이 왔으므로 세를 주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농부들이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이는 이 농장의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고 이 농장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자 하고 아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에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말하고 포도원 농장의 주인을 우리들이고, 종들은 선지자나 목사와 교사를,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보내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냄을 받은 종들을 심히 때리고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보냄을 받은 종들의 충성심을 보십시요.

그들은 먼저 보냄을 받은 종들이 비난을 당하고 조소를 당하고 능욕을 당하였으나 보냄을 받을 때 충성을 다하고 자기들이 죽기까지 매를 맞고 욕을 먹어도 조금도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고 순순히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보냄을 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종들은 자기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를리없습니다.

그들의 지성에는 하나님의 본유지식이 조명하여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감각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충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능히 이길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영혼의 만족할 만한 완전한 지식의 감각 때문에 모든 불안과 근심과 고통의 감각을 능히 이기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중에 죽음을 맞이 할 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아픔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하나님의 마음이 있어 농부들을 불쌍히 여기는 불타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농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두움에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무지먹지한 일이라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어떤 위협앞에서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전혀 소홀히 할 수 없는 충성스런 종들입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비잦과 조소를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들은 분노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당해야만 합니다. 종들은 그들에게 그런일이 있을 것을 알고도 보냄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종들은 자신이 보냄을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많이 애탔을 것이며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종을 위해 눈물로 탄원하며 힘을 보탰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본성에는 무한한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난을 받으셨으나 대항하지 않으셨고 죽이려고 모함을 하고 공격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는 탄원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종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진리의 비밀을 깨달은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무수히 많은 매를 맞으며 옥에 갖히며 비난과 조소를 당하며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의무를 행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과감히 내놓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헤 그의 삶을 두번에 걸쳐 살펴 보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함께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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