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입니까?(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믿음을 지적인 동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조명하심에 의해 그 말씀이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되어 영혼의 의지를 통해 사람의 전인의 마음에 반영하여 전인적으로 감각된 반응으로 나타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성이 어떤 표상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가진후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조명 하심으로 복음 그대로 지성에 새겨지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하여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지성에서 생성하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해 받아들인 지식이므로 성령에 의하여 믿음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학적으로 ‘중생’은 영혼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에서 그 생성된 지식을 지각하여, 지각된 그 지식을 전인기관인 마음에 반영하여 육체에서 감각되며 의지적인 반응을 가진 행동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1]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영혼이 진리를 생성하는 힘을 상실하였는데,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성령께서 직접 조명하여 지식을 갖도록 함으로 진리를 갖게하고, 이 진리를 감성에서 지각한 후 즉시 마음에 반영하여 진리대로 의지를 일으켜 전인으로 행위를 하는데, 이 행위는 살아있는 행위이므로 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의 행위와 죽은 사람의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행위의 주체가 되는 지식에 따라 구분되고, 한마디로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타락의 본성에 의해 자기 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한 지식으로 행하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지식이 성령에 의해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그 지식을 지각하여 지식대로 의지적인 감각을 가짐으로 행동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감각을 가진 것을 말함으로 중생과 믿음은 양면의 얼굴을 가진 동전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에 의한 행위는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의 행위가 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은 행위를 함으로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고 믿음을 가질때부터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도는 믿음이 외부에서 온 것(롬 10:17)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을 우리의 지성에서 ‘지적 동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으면 성령께서 그 복음을 그대로 사람의 지성에 새겨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게 하는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만난 가인이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분명한 구별을 통해 이미 들어왔고 지금 다시 그 의미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고 분명하게 사도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의 지성에 새겨져 사람이 그 지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의 말을 빌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고 말했으므로, 믿음은 사람의 의지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은 자기의 지적인 동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가 동의하면 믿는 것이고 동의 하지 않으면 믿음을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영혼의 지성적인 작용에 대한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지성이 이렇게 작용하는 것을 무엇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게 다 꾸며낸 이론에 불과한다고 말합니다. 보편구원론자들의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지라도 그 말씀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가인의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가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을 떠났고 죄악 세상의 문화를 만드는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철저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10장 8절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해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된 말씀들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해서 설명하는 도중에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롬 10:5),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롬 10:6)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면서 얻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비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율법과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반응을 의미합니다.
율법도 하나님께로 나온 지식이고, 복음도 하나님께로 나온 지식입니다. 율법은 결과로 행위를 요구하고 복음은 결과로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 지금까지 들은 바대로 율법과 복음을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대비하고 지식을 생성하여 보는 것입니다. 율법은 듣고 본바대로 우리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한후 지각하여 전인으로 감각을 가진 것이고, 복음은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진 후 지각을 가지고 전인으로 감각을 가진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율법은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서 해석해야 하지만, 복음은 지식이 그대로 우리의 지성에 지식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적용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우리가 언급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는 달랐지만 분명히 사도가 말하는 의미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의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말에 의하면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구별을 갈라디아 3장2절에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하고 이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서술해 갑니다.
그러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의 뜻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으로 새겨지고 그 새겨진 말씀대로 사람이 인식하고 행위를 드러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이 같이 말하되 누가 이 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라(롬10:6~7)” 그러므로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말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사람의 의식을 통해 사람에게서 나온 인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말씀대로 생각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며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써 사람의 의식을 통해 지성에서 생겨난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지성에서 생성하는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지성에 그대로 새겨지고 말씀대로 지각을 가지고 그것이 마음에 말씀대로 반영되어 말씀대로 행하도록 의지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에서 볼때 사람이 행하는 의지의 지식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자기의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말씀이 마음에서 나오도록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Herman Bavinck 박사도 그의 명저 개혁교의학 책에서 믿음을 지적인 동의라고 말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들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 말해야 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을 말하기에 앞서 그가 남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서신을 모두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것을 자기의 의지나 지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믿도록 선물을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을 가지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을 그와 함께 복음 전도에 힘을써 온 이방인 누가에 의해서 생생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6:13~18에서 하늘에서 모습을 보이시고 구체적으로 사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 이름이 아직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없는 신앙에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충성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를 이단을 믿는 무리이며 그들이 이스라엘을 와해시키는 위험한 단체라고 생각하고 핍박하며 잔인하게 교회의 기둥들인 사도들과 집사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열심을 가진 종교적 열심에 인정을 받고 사람들로 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의 지성은 당시 유대의 최고의 지식을 이해하고 있었고 최고의 지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장래가 유망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베우고 깨우친 지식으로 볼 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미신적인 종교이며, 그리고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사람으로 태어나서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유대의 법에 의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존재로서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당시에 여기 저기에서 많이 일어난 이단자들(행 5:36)과 같은 동일한 무리라고 생각했고, 자기 스스로를 지식에는 능한 사람이라고(고후 11:6) 여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 위에 빛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임하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이 잘못되었고 생명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이 분명했고,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자기가 믿고있다고 생각하던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닙니까?
자기는 잘섬기고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일입니까?
우리도 가끔 우리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일치한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성경에 비추어 결함이 없는지 살펴 보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빠지지 않고 공적 예배 시간에 참여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하며,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열심을 내고 봉사하며,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도 간혹하며, 성도들끼리 모여 찬양하며 교제를 갖는 신앙생활을 하면 휼륭한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여해서 감격을 하든지 안하든지, 설교시간에 무엇을 말하든지, 감동이 되든지 안되든지, 예배시간에 참석만 하는 것으로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면 하나님과 관계에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골치 아프게 깊게 빠져들어 목사를 괴롭힐 이유도 없고 신앙 지식에 관해서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충실한 신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그런거 따질 필요 어디 있습니까?
그냥 믿는 거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믿음은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믿음이었고, 이 믿음은 처절한 자기와의 분투와 싸움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믿음이었고(마10:38,눅 14:27, 막 8:34), 성령의 인도가 없이는 아무도 결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조명하신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것이 자기의 지성에서는 결코 생성될 수 없는 지식이었으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은 자기의 지성에서 지식으로 생성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기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자기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자기의 지성에 지식을 비추시고 그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고 우리의 의지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고 알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롬 8:16)”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는 우리의 영이 스스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유지식은 없고, 대부분 타락 이후에 생성한 우리의 자신의 지식에는 어떤것도 하나님을 알려주는 지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표상이 지성에 반영되어도 그것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생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2]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있었고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늘 계시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전달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이스라엘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해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이 계시 않은 곳으로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디로 가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으로 갈까요?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3]
바울은 이런 감각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을 알았고, 유대인으로 있을때 알았던 모든 지식이 생명없는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바울의 교훈은 우리 자신을 보게하는 휼륭한 교훈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옛 사람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라고 지금 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는 로마서 6장의 말씀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바로 이 핵심 지식으로 이끌고 있는 말이고 이 지식에 의해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바울은 사도행전 26:13~18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적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에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둘어 비취는 빛,
그의 두 귀에 들려오는 감각된 음성,
자기에게서 생성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
사울이었던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이었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사울의 영혼에 일어난 반응은 중생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그 감각에 의해 예전에 유대교에 있었을 때의 모든 지식이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일 후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머물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깊은 지식을 깨우치는 진리에 대한 수행을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4]
그때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에 전할 것인지 자신을 수련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나 주의 형제인 야고보 외에는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를 만나 그에게 복음에 관한 지식을 토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그의 지식을 제 조명하는 KEY 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여야만 했고, 그가 만난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 머물머 보낸 시간은 주님과 교통하는 진정한 자기가 아는 지식을 조명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지성에 있는 모든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지식이 재 조명되어 수술 되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짓과 참 믿음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난 지식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아버지로 말미암은 지식이었습니다. (갈 1:1)
그가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교에 있었던 지식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는 선지자로서의 자격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말씀을 공회 앞에서 증언함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을 받으심으로 선지자로서의 권위도 상실했다고 알았습니다. 그 지식은 자기가 배웠고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고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고민하게 하는 주제였던 것입니다.
그는 거부할 수 없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아주 분명한 사명과 지식을 조명받아 그의 지성에 완전한 진리의 말씀으로 지각되었습니다. 이 지식은 흠이 없었고 무지와 결함이 조금도 함의 되지 않은 완전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을 조명하여 그 지식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의 속 사람은 정리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수정해야하는 지식들과 율법에 관한 지식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의 저 웅장한 성전 안에 있는 권위는 거짓으로 가득채워져 있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 쉬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하는 것을 자기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였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창조시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 아담에게 일어난 원죄의 문제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사실과,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유대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전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사울은 죄가 단순하게 율법의 요구를 범하거나 버림 받기로 예정된 이방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5]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라고 담대히 말한 것입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은 희브리인이었고, 유대인이었을 때에는 이런 시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인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선민이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께 성실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다하면 하나님 앞에 완전한 백성으로 구별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사상이 뒤바꿔졌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들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에게 나타난 변화였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장사지냈었고 죽음을 확인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으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정당한 일이었고 지극히 하나님께 충성된 일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는 지극히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조상들의 신앙에 열심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의 최고 학문을 수학하고 있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열정, 충성, 지식이 미래 유대의 희망이 되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도 가던길을 멈추고 우리의 신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과연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지, 성경이 말하는 신앙으로 부족하지 않은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에 빠져 자기의 신앙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을 갖지 못하는 맹목적인 상태로 추종하다가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비추어 눈을 멀게한 후 그리스도께로 부터 직접 말씀을 듣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런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미련하게도 성경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일부 사건들이 모범으로 계시되어 사람이 자기의 지식으로 깨닫고 이해되도록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건을 비추어 자긴의 신앙을 살펴보는 일은 자기 스스로 할 일이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빛을 비취는 일을 기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께서는 유대 곳곳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씁니다.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자기안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시는지 친히 행동으로 모두 보이셨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에게 나와 간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결코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소경도, 절뚝발이도, 앉은 뱅이도, 문둥병자도, 심지어 오라버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자매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로 그 발을 닦던 창녀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버림 받은 인생을 숙명처럼 살아가는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질병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기를 소망했고, 어떤 소경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서 몇개월씩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 앞을 볼 수 있는 치유를 받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친구의 중풍병을 치유하시기 위해 들것이 들고와서 치유를 받으려 했을때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들어 갈 수 없어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리는 믿음을 보임으로 친구가 고침을 받았으며, 어린 딸이 죽어 슬픔에 잠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애틋한 아비의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고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시고 밤이면 목놓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셨고, 보냄을 받은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바치셨습니다.
주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이 이 땅위에 뿌려져 안개와 같이 온 세상에 퍼졌고
그의 눈물의 향기를 받은 사람들은 오늘도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너무 기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집중하셨고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목노아 호소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 할 수 있었고
주님의 눈물과 슬픔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영광의 보좌옆에서 눈물을 흘리시고계십니다.
우리의 위선적인 신앙과 오만하기 이를 대 없는 방자한 태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세계에서 구원하신 그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너희들 같으면 나는 예수 믿지 않는다! 라고 손까락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신자보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사랑이 없으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불법과 거짓을 더 많이 행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즐거움을 위해 만든 허영과 오락에 더 깊이 물들어 있으며, 더추악하며 인정이 없으며 사랑이라고는 겨자씨만큼도 발견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여러분들을 위한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눈에서 피 눈물이 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한 그 죄의 추악함이 부족하여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더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내고 있습니까?
저는 지난 수년간 많은 교회들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봤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저의 마음은 견딜 수 없는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예배드리는 교회에 발걸음을 하셨다가 사람들이 당신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예배의 형식에 관심을 쏟고, 마음은 콩밭에 두고 몸은 예배드리는 곳에 서 있는 저들이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한말씀도 하시지 않고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즐거움을 쫓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예배 시간에 참석하는 것을 오히려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셔서 불쌍해서 적선해주려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강단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그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신비한 비밀의 힘이 사람을 통해 쏟아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비밀의 힘은 사람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는 역동적인 말씀이 되도록 부추키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라는 만능의 키를 자기의 정신의 핵으로하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늘의 비밀의 힘을 끌어내려 합치면 불가능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십자가의 희생도,
죄속에서 태어난 속성의 변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비밀의 힘을 받아 용기있게 세상을 대처해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비밀의 힘에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는 말씀이 강단에서 하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그 말씀에 힘을 얻어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슬픔은 이 땅에 오셔서 흘리시는 눈물보다 더 많이 흐르고 있어서 세상을 적시는 빗물이 되기도 합니다.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는 잔해하려고 다메색으로 가는 그 길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와 같은 위선과 거짓과 하나님을 향한 배반, 온통 성공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들이 거룩하다고 하는 예루살렘 성전안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7]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2008년~2012년에 한국의 정치의 중심에 서서 한국을 이끌어온 사람들을 알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고소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교회가 끼어 있습니다. 정치의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 들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의 중심에서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벌거벗은체로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교회는 소망이 없는 세속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한가지 질물을 드립니다.
스스로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히 답을 하시고 아래를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드립니다. :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실성을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이해하고 마음에 느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했다는 지식을 인식하고 알게 됨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명한 구원에는 뛰 따라오는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복음이 그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고 지각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가 들은 복음이 자기의 생성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기신 지식으로 자기의 영혼에서 지각 되었다면 그는 그 지식으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에 대하여 의지적인 반응늘 나타내는데 그것이 복음으로 행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가 성화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체적인 변화로서의 성화의 행위가 없다면 그 구원은 의심해도 됩니다. 아무리 예수가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삶속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지적인 동의이지 성령의 조명에 의해 심겨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아닌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은 구원에 대한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마음에 심긴 구원이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예전에 살았던 삶의 변화라고 말하기 보다는 새겨진 지식으로 삶의 행위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의 향기가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성화의 삶 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인식하고 알아 그것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현재 교회들에는 구원을 받은 신자보다 구원을 아는 지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다메색 도상에서 느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중요시했던 예루살렘 성에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유대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의 높은 지식, 유대의 최고의 존경을 받는 명예, 거룩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 드리는 제사,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으나 예배를 했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기드론 시냈가에는 명절만 되면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의 피가 강을 이루었고 죽어가는 짐승들의 숫자는 이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소원을 아뢰고 기도도 하고, 제사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자상들은 유대에 일어나는 예수 이단으로 인해 모여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기를 예수 이단을 박멸하여 나라가 조용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속히 보내셔서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며 속히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백성들을 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 매우 당혹스러우실 것이며, 소름끼치는 그들의 무지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성안에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에는 진지함 보다는 감동스러울 정도로 선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외면하고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은 이방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기뻐했었습니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하며, 감사하며, 십일조를 드리며, 교회에 속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습관처럼 믿어온 신앙생활로부터 자신을 성찰하여 성경에 비춰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울은 주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생명이 없는 종교적인 삶속에서 살아 왔던 날들을 되새기며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했는지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교회를 핍박한 행위에 대해서 도저히 용서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고독한 시간을 선택했고, 세상을 가까이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가 배워 온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습니다.
에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님의 말씀은 그의 귓가에 떠나지 않았고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집에 있을때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들었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라는 말씀처럼 바울은 그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1])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을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식을 주신 지식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1:28)하신 말씀이다. 아직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말씀을 받았으나 아직 생동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로서 말씀하실 때 사람의 육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감각하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되자, 지성에서는 표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한다. 지식이 생성되었다고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감성에서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그 지각된 지식을 전인 기관인 마음에 반영하여 육체의 감각 기관에서 감각을 가짐으로 지식에 대한 인식을 감각한다. (신명기 8:3, 눅 4:4, 마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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