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입니까?(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라(갈 2:20)
오늘 주제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지난주 약간 말씀을 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마무리를 하고 오늘의 본문의 주제로 들어가겟습니다. 아마도 오늘 시간의 절반 정도가 지난주 전하지 못한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미쳐 전하지 못한 내용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내용에 있어서 여러분의 지성에 중심에 있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리려다 만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주제의 시작 부분에서 마쳐야 했습니다. 그래서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소 주제로 첫째로 “복음에 나타난 의”,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셋째로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를 말씀 드려야 합니다. 이 내용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능한 제가 전달해 드리는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처럼 새겨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바울이 예수를 믿게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의미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께서 심판 받으실 때 율법에서 금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생각 했기때문입니다.(마 26:63~66)
그러나 다메색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자신의 행위가 율법의 요구에 부합한 행위로 알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사람을 죽인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자기들의 의를 위해 죽였던 사람이 나타나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해석할 방법을 즉시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나타남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으로 바울의 어떤 힘으로도 재어할 수 없는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권위로 말미암은 현상입니다. 그가 목격하고 경험한 것은 예수는 분명히 부활했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혹세 무민하여 민중을 이끌고 율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내용을 왜곡하는 유대의 사상으로 볼때 지극히 이단적이며 백성들을 혼란스럽게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십자가에 죽게 했는데, 지금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를 불러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사람으로 따로 세우려고 한다고 하는 말씀까지 들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중의 한사람이었다면(12사도가 아님) 예수님에 관하여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사울은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자기의 지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증거를 자신의 지식으로 거부하면서도 조명하시는 성령에 의해 혼란스러운 마음의 갈등 속에서 성령의 조명에 거부할 수 없는 영혼의 지각으로 마음에서는 복음대로 인식하고 있었을것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임하면 그 말씀은 거부 할 수 없는 사로잡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이 그를 떠나지 않음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전에 알았던 모든 지식이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아나니아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사울의 지성에 조명하심으로 복음대로 지각되게 하고, 지성에 지식으로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볼 수 있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120문도에게 일시에 임하신 성령이 사울에게 임하셨고, 이때 제자들로 말미암아 외쳐진 복음이 아나니아 입을 통해 바울에게 다시 선포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외치신 처음 촉구,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도래를 선포할때 외친 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말이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들려 졌을때 사울은 모든 상황들과 당시 자기가 멸시하고 무시하던 그 선지자의 말들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성령의 이끌려 주님의 보냄을 받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유대의 최고의 학자라 칭할 수 있는 바리새인의 수제자인 사울에게 아나니아는 담대히 복음을 말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떨리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마음대로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를 핍박하고 교회를 잔해라는 사람이며 스데반을 죽이는데 결정을 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 호랑이 콧털을 건드리고 것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담대했습니다.
죽음로 두려워하지 않은 주의 제자들이었고 더군다가 주님의 명령에 의해 이방인의 제자로 따로 세우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아나니아 제자는 담대히 복음을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전한 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공생에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잔해하는 표독하기 이를 대 없는 잔인한 율법주의 자가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그토록 미워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앞에 무릎을 꿇었고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한 주님의 제자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유대의 최고의 학자가 이지 가장 비천한 멸시 받은 십자가의 사도가 되고 있씁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의 지성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적용하는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지금 아나니아가 복음을 전할때 바울의 영혼 지성에는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바울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말을 이해하는 지각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객체 없는 지식이 바울의 영혼에 여과 없이 새겨져 인식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고 말씀을 듣는 사울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사람의 본성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지식입니다.
사울은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보냄을 받을 때 부터 이름을 바울이라 칭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부터 사울을 바울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이제야 믿음이 요구하는 분명한 답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나타날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고, 지각됨으로 말씀대로 행동하는 인식을 갖는 것이며, 이후로는 자연인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생성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또다른 믿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하나님아들은 믿는 믿음 안에서” 라고 말하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는 것이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일으키는 믿음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10:17)에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아나니아의 증거를 듣고 있는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엇던 율법의 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의 의가 정당하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해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해 충실한 예루살렘의 관리들이 십자가에 죽이는 우를 범한 것이 선지자들의 말대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처음부터 율법이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 해야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인도자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율법은 사람을 저주아래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행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고 말한바와 같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의를 행할 사람이 없고 저주를 얻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모든 사람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저주를 받으셨고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다시 사심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인데, 자신에게 분명히 보이신 예수님이 누구인가? 다시 사셨다면 율법과는 관계 없는 분이 분명하다는 것인데 그가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사람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고 다시 사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창세 후 최초 사람들의 범죄를 분석함으로 온전히 이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
사람이 왜 죽습니까?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는 것은 죄로 말미암았고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와서 왕 노릇하몄으며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야고보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약1:15)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른 것은 죄가 원인이 되었고,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었는데, 실상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더욱 사망에 이르는 정당한 선언만 할 뿐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롬 3:19~20, 갈3:10~11). 이처럼 죽음의 문제에서 해방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나타나시고 자기에게 이방인에게로 보내시는 사명을 주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율법이 보내진 이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도 하나님께 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원인에 대해서도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성경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아나니아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으려면 지적인 동의이든지 아니면 성령의 조명에 의한 믿음을 가지든지, 그의 마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것과 다시사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확실힌 고백과 함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자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지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가 미워했던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가 인생을 바꾸어 새로운 지식의 터전에서서 지난 과거를 살펴보며 자기가 배웠던 모든 지식드를 살펴 볼때 비로소 그것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을 불태우고 있었던 지난날들의 모든 유대 학문이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완전히 삐뚤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것,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는 것,
다시 사신 예수님.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만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는데 이 모든 말씀이 대부분 사도 바울에게 전달 되어 듣게 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서도 이미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발견한 것은 영생이었습니다. 그 영생을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로 이 영생은 최초 사람을 지으실때 사람에게 주신 것인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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