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 사물을 인지 식별하고 기억 사고하는 작용 및 그 결과.
인식론은 고대, 중세 존재론적 사고의 틀이 해체 됨으로써 특히 근세의 철학에서 표면화되어 철학의 중요하고 기본적인 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주관-객관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인식의 구조나 기원의 문제를 두고 감각론, 유물론, 관념론 등의 갖가지 인식이론이 전개 되었다. 현대의 현상학, 프레그마티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인식이 성립되는 전체적인 장에 주목하여 전통적인 주관, 객관적인 인식론의 문제 설정을 뛰어넘거나 상대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먼저 인식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함에 있어서 동물과 기타 생물체를 사람과 구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물과 기타 사물들은 지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각에 의한 감성 작용으로 인식하여 반응함으로 행동을 합니다. 동물이 인식한다는 것은 감각에 대한 감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물의 감성 작용은 두뇌의 기능에 의해 생리작용으로 육체가 반응 활동을 한다. 이것은 동물의 구성이 육체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육체로는 동물과 같은 감각적 감성의 작용에 의해 생리반응에 의해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런 감성의 작용에 의한 반응도 지성의 작용에 의해 지적인 인식을 통해 육체가 반응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인식에 관하여 동물과 사람이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 것으로 구별되지만 사람의 인식은 단순히 지성적인 것인 아니라 지성과 감성의 결합입니다.
지성과 감성의 결합은, 먼저 감성의 기능인 감각이 우선 작용하여 지성에 감각된 표상을 반영 해야만 지성작용을 할 수 있고 기능적 작용으로, 육체가 감각을 가지거나 이미 감각을 가지고 인식된 지식이 아닌 다른 형태로서는 지성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지성작용이라는 것은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보관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생성된 지식을 보관하는 것은 감각에 의해 반영된 표상에 대하여 재차 반복적으로 지식을 생성하지 않아도 되도록 이미 가진 지식의 조명 되도록 보관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였을지라도 반드시 그 지식을 모두 보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는 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는 가질 수 없는 영혼의 감성이 있는데, 지성이 생성한 자기 지식과 외부에서 유입된 지식을 구별할 필요가 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에 존재한 지식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영혼이 생성한 사람 지식과 사람과 만물을 존재하게 한 창조자 지식입니다. 이 두 지식을 구별하고 인식하는 것을 영혼의 감성에 두었고 지각되도록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격적이므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기능이 있으며, 지성은 지식을 생성 보관하며, 감성은 영혼의 감각 기능을 하고, 의지는 영혼의 활동 기능을 하는데 육체와 결합되어 있을 동안에는 육체의 의지와 결합되어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된 지식과, 육체의 감각을 통한 반응을 인식하여 육체로 행동하게 하는 전인의 기능을 합니다. 육체도 영혼과 동일한 세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능은 감성이고, 외부의 객체에 대한 감각을 얻어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하고,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지식을 기억하고, 의지로는 영혼의 의지와 결합되어 인식과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식은 영혼의 지성이나 감성, 혹 육체의 지성이나 감성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구성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고, 각기 별도의 기능적 작용을 하되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는 결합되어 마음을 형성하고 하나의 전인을 대표하는 기관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의지의 집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인식기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인식은 지성이나 정신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성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주장들이 통설로 받아들여졌고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정신과 “이성”의 역할을 하는 지성의 위치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두뇌가 그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근거에 뚜렷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확인과 함께 두뇌는 지식에 따라 생리적 반응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기쁨, 즐거움, 환희 같은 지식을 가질 때 두뇌는 생리적 반응으로 그에 해당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온몸에 같은 감각과 인식을 드러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리적으로 육체에 해를 가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육체의 감각과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분명한 증거는 사람의 육체는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을 감성이 지각한 후 전인기관인 의지에 반영되면, 의지가 그 지식을 육체의 두뇌에 반영하여 지식에 따라 생리적인 작용으로 인식하거나 활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혼의 기능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사유에 속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꺼려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이나 인간을 동물과 구별 시켜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보는 “이성”에 관한 종래의 주장도 역시 형이상학적이며 지극히 Non Pictorialize이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끝없이 붙들고, 확실한 영혼의 작용에 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감각능력에 상대하여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이성”은 인간의 어디 부분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에게는 분명히 이런 능력이 있지만 작용적 기능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존재는 Non Pictorialize 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 “이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검색해보면 신약성경에서 3회 사용합니다. 행 25:27, 유다서 1:10과 벧후 2: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5:27에서는 불합리한이라고 번역되었고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번역된 “이성”은 헬라어로 “알로고스, alogos, a[logo"” 를 번역한 것입니다.[1] a[logo"”(알로고스)는 부정 접두사 아(a[)와 로고스(logo")가 결합된 형용사로,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서에 언급한 “말씀”[2]과 같은 '로고스(a[logo")에 부정 접두사 아(a[)를 더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말씀이 없는”이라고 번역되어야 하나 문맥상 말씀보다는 이성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자들이 “이성과 말씀”을 동등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기 보다는 로고스가 말씀과 이성을 다같이 함의한 언어인 것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벧후2:12에서나 유1:10의 단어는 “이성 없는” 이라고 번역하는 것 보다는, 사도 요한의 말씀의 의미처럼 로고스(a[logo")를 사용하여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문이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해주는 한 번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요한복음에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곤란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는 틀린 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사상에 의하면 말씀은 사람의 생명 씨앗이었고, 사도 요한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생명이었습니다. 이 생명은 육체로 숨쉬고 활동하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본질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나 유다서에 기록된 a[logo"” 는 “이성 없는”이라고 번역하는 것 보다는 생명을 의미하는 “말씀 없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 뜻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한국어 성경에서 같은 말로 번역된 이성이라는 단어는 실지 철학적인 의미의 이성과는 일치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의 구성 가운데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적 역할을 나타내는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정신 작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정신 작용의 질서로운 조화에서 나오는 결과라고 본다면 실지로 순수한 정신 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를 이성이라는 별도의 작용적 기능으로 명칭을 주고 판단을 어렵게 한 것은 사람의 모든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인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기에 앞서 그 역할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주변 설명들을 들었습니다.
인식이란? 앞에서 사전적 정의에 의해 설명한 것처럼, 사물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결과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적인 면으로는 정신작용으로 자극을 받아들이고, 보관하며, 인출하는 과정을 말하지만 이런 의미들이 가지는 주장들은 영혼의 기능이나 그 존재에 관하여 전혀 고려되지 않고 결론을 도출한 정의들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살펴 볼 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인식을 하는 것을 정신 작용으로 볼 때, 정신은 무엇은 도구로 하여 인식을 가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연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이 수 억년 동안 변화를 거듭해온 생명체로서 자연적으로 인식 가능한 정신 능력을 가졌을 것이고, 그 정신 능력으로부터 지식이 생산되었으며, 그 생산된 지식으로 인식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이 하는 일 가운데 사람을 지은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산하도록 한 것일 것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자연은 먼 훗날, 사람들이 새로운 종의 생물체로 진화되었을 때 아무런 생물체로서의 형체를 가지지 않은 지식에 의한 놀라운 생명이 지식의 진화로 말미암아 생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과 같이 육체를 가지지 않은 초자연적이면서 지식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어떤 형상을 가질지 알 수 없으나 자연론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아마도 진화된 초자연적인 존재인 지식의 지배를 받으며 시녀 역할을 하며 지속적으로 진화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론자들의 주장이 옳으면 최고의 지식을 가진 신도 진화되어 생존하게 된 존재일 것이 분명하고 그 신은 지식이 진화되어 사람의 육체에서 독립한 존재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추측은 아무도 모르고 자연만이 그 사실을 알 것이지만 결코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을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사람의 존재에 대한 개념에서 불확실한 근거를 이론으로 하고 그 근거가 된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순수하지 못한 지식에서 비롯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끝없는 미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비롯된 정신이나 이성과 같은 정확하지 않은 기관으로부터 인식 작용이 일어난다는 생각은 결코 진리의 목적지가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방황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전제로부터 접근하여야만 인식의 개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에 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볼 것입니다. 그러면 인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 그리고 인식함으로 인해 존재로서의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1]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동물과 구분되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정의가 성립한다. R.데카르트는, 만인에게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추어진 이성능력을 '양식(良識)' 혹은 '자연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로부터 이성은 어둠을 비추어 주는 밝은 빛으로서 표상되어 왔다.
이성에 의하여 우주에서의 제사상(諸事象)을 어떤 비례적·조화적 관계에서 바라볼 때, 어둡고 불분명한 혼돈(混沌:chaos) 속에서 어떤 법칙적 관계 속에 정위(定位)된 조화적 우주(cosmos)가 출현한다. 본래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理性), 혹은 그 라틴어역으로서의 라찌오(ratio)에는 비례·균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밝은 빛으로서의 이성에 대비한다면, 감성적 욕망이나 정념(情念)은 어둡고 맹목적인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것은 광기(狂氣)일지도 모른다. 기쁨·슬픔·분노·욕망·불안 등의 정념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내부로부터 폭발한다. 이것을 이성적 의지에 의하여 통어(統御)하지 못하면 정신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 여기에 이성에 의한 정념지배라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I.칸트는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인하는 행동에 대하여, 의무 혹은 당위(當爲:Sollen) 의식에 의하여 결정된 행위가 이성적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겐 자율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하는 이성적 능력이 있어서, 그것에 의하여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
이것이 이론이성과 구별되는 실천이성이다. 감성과 대립하는 의미의 이성은 자발성의 능력으로서 파악할 수 있지만, 그 경우 거의 오성(悟性)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가끔 오성과 대립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예로부터 개념적·논증적인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에 대하여, 진실재(眞實在)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보다 고차적인 인식능력으로서 오성 혹은 지성(知性:intellectus)이라는 말이 쓰였다.
그러나 계몽기 이후 우위관계(優位關係)는 역전되었다. 칸트는 오성이 감각의 다양성을 개념적 통일로 가져다 주는 피 제약적(被制約的)인 인식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판단의 일반적 제약을 어디까지나 추구하는 무 제약(無制約)의 인식능력이라고 하였다. 또한 G.W.F.헤겔에서는 오성이 추상적인 개념의 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구체적 개념의 능력이며, 오성적 개념에 의한 대립의 입장을 초월하여 이것을 살아 있는 통일로 가져다 주는 작용이었다.
이성은 또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원리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누스(nous)설(說)도 그러한 예이지만, 가장 전형적인 것은 헤겔의 세계정신(世界精神)에 대한 견해로, 역사는 세계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며, 거기에는 어떤 이성적인 원리가 일관되어 있다고 한다.
[2] 요 1:1
'개혁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찬미하는 교회(골3:16) (0) | 2013.10.13 |
---|---|
죄의 나무 (0) | 2013.03.18 |
그리스도인입니까?(8) (0) | 2012.07.22 |
그리스도인입니까?(7) (0) | 2012.07.05 |
그리스도인입니까?(6) (0) | 2012.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