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기둥

하나님의 아들 1, "주여 뉘시니이까? 2"

생명있는 신앙 2012. 9. 15. 10:38

하나님의 아들1  22:8  (주여 뉘시오니까?2) 

5, 이에 대제사장들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라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려져 들으니 소리가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오늘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청년의 때를  학문을 배우며 꿈을 키워가며 민족을 위해 어떻게 일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민족의 사상 철학을  자기의 정신에 담아 자기와 함께 성장했던 고향에 돌아와 자기의 형제들에게 현재 자기의 상태를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고백할 때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라고 빌립보서 3:5~6에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성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자라,” 22:3,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가 신앙 고백에 관해서 자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이전 예루살렘에 있을 때, [유대의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있으며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고 오늘날 너희들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자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물을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너희들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자라라는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도는 예전에 자신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섬겼던 그날들 동안 하나님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당시에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열심을 가지고 섬겼던 신앙이 초보적이어서 열심을 낸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을 찾는 방황이었는지 살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함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 하거나 아니면 간접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이 경험에는 반드시 지식이 동반되고, 지식을 사용하고, 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가인과 아벨을 많이 비교하여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지겹도록 가인가 아벨에 관한 말씀을 들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인류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자 비취는 조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들의 조명 아래 서 있습니다.

그 아래서 각각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빛 아래 우리 자신이 조명되고 우리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며 우리의 모습이 밝혀지게 될 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과 같고 어떤 사람은 아벨과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들 아래 자신을 조명하고 성찰하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주 자신을 점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1.     우리를 조명하는 그 빛이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조상들로부터 조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그 지식대로조상에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그들의 대표적인 행위와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내적인 지식에 관한 것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들에 의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가인은 불순종의 조상을 대표하는 악인으로 묘사되고, 아벨은 순종의 조상으로 의인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짖지 말고 다스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다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만의 성을 쌓고 그곳에서 악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증거가 우리를 조명할 때 우리와 가인과의 차이점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구별된 차이점들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것은 가인에 대한 외면이라고 할까요, 거부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가인과는 구별된 사람임을 인정하려는 주관적 판단인 것입니다. 

아벨에 관하여 성경은 많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고, 형의 질투와 분노에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짤막한 내용만 증거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의로운 행위를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조명되는 것입니다.

이런 조명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가인과 같이 완고하게 하나님을 떠나거나 불순종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아벨과 같이 순종적인 사람이라고도 못한 것에 대해서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아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에게는 너무 지나친 불순종을, 아벨은 자신 스스로 미치지 못할 의인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인과 아벨에 관하여 조명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뚜렷하게 일치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뿐만 아니라 그들에 관한 지식이 결여 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들은 지나치게 핵심적인 의미들만 드러낼 뿐 자세하지 않아서 그들을 알 수그들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인류의 조상인 가인과 아벨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들에 관한 밝은 지식의 빛을 가지지 못함으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조상들과 동떨어진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한 핏줄임을 강력하게 인식하는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우리보다 훨씬 이전 어느 먼 나라 이웃으로 태어났다가 운명을 다하고 사라진 한 인류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인 가인과 아벨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증언인 성경.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난 것을 직접 경험이라고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제 3자를 통해 간증이나 증언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되어질 때 경험되는 것을 간접 경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모든 증언들의 내용을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라 그 기록들에 나타난 성경시대의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그 경험들은 역사상에 분명히 일어난 일들이지만 대부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경험들입니다.

앞에서 들었던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사도가 빛에 꼬꾸라져 넘어진 상태에서 보고 듣고 질문하는 사실도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일어난 역사상에 있었던 한 개인에게 나타난 생생한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증언을 들을 때에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그들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 경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증거나 혹은 제 3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을 경험하게 하시는 방법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시대에 사람들에게 직접 만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성경의 증언을 통해 나타나시는 것과 같이 동일한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성령(16:13)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의 역사를 발견할 수 없고, 진리가 없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며, 반대로 진리가 있는 곳에는 역사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체험은 진리가 선포 되어지고, 진리가 있는 곳에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 또한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지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진리이면서 성령의 증언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서 조명되어 우리를 사로잡아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은 경험을 하게하고, 말씀이 우리 영혼의 지성을 밝혀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앞에서 가인과 아벨을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이들을 자주 거론한 것은 그들이 우리인류의 조상이고 우리의 모본이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

이 두 사람을 우리에게 조명함으로 우리의 신분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

먼저 가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조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그에게 적용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의 관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말씀이 자기에게서 반응되지 못하므로, 말씀과는 별도로 자기의 생각에 따라 살아갑니다
.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이런 상태를 아시기 때문에 가인의 수준에 맞추어 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나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가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인식하고 자기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불신자들이나 스스로 신자라고 자처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 아벨에 관해서는 아주 짤막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고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이 한마디가 주는 의미는 매우 많은 지식을 제공합니다. 혹자들은 많은 지식을 다양한 지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양하다는 것과 많은 것은 다릅니다
.

먼저는 그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그도 역시 아담의 후예로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진리와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는 적용 되어진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을 구별하는 뚜렸한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볼 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이 가인에게 인식되도록 하신 것이므로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진리와 성령이 가인에게 역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이를 자기지식으로 이해해 버린 것입니다.

반면 아벨은 진리와 성령에 의해 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적용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도 하나님을 알고 아벨도 하나님을 알지만 그 둘이 알고 인식하는 것이 구별됩니다.

동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인식의 내용이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차이입니다.

아벨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진 반면, 가인은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3.     우리를 조명하는 앎, 지식,

가인과 아벨을 우리에게 조명한다는 것이 그들 육체의 모습 그대로를 우리에게 조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들을 얻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가질 때 우리에게 조명 되어지고,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그들의 인격,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행위, 그들의 지식들을 우리에게 조명함으로 우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이런 방법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우리에게 조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지식을 다 알아야 하고 그 지식을 다 알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들을 우리에게 조명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지식을 가질 경우 잘못된 결과에 대한 적용의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니라( 17:3)’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그 아는 것으로 우리자신을 비추어 우리를 알게 되고, 우리를 알면 우리는 그 아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알게 되는데 그것의 결국은 우리자신의 상태를 알게 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식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아는 것과 자기지식으로 아는 것의 차이점이 있고, 신분에 있어서는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 해 보십시오.

지식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아벨과 같이 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가인도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인식하는 하나님은 아벨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은 제사를 통해서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거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조명을 하셨으나 그 조명이 가인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야곱과 에서와 같이 서로 다른 신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이 있었으나 적용되지 않은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만나 주셨으나 자기 지식으로 해석하여 인식하고 조직화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이며, 그가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의 영혼에서 인식한 하나님은 자기지식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진리의 성령의 조명하셨을 때, 그대로 적용 되어져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대로 인식을 가지도록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가인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해석하여 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지성에서는 아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본 바대로 인식 되어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영혼의 지성 작용에 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영혼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은 타락한 우리 영혼이 우리를 활동하게 하는 지식을 어떻게 생성하는지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 한바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 되어졌는데, 육체는 영혼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구성에 관한 것은 택함을 받은 사람이나 유기된 죄의 열매들이나 구별이 없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구별되어 드러난 것은 진리에 대한 성령의 조명에 대한 적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  사도의 사고,

사도가 자기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어려서부터 자라온  정신적인 고향에서 현재 자신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전에  성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있을  가진 열심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히브리인들과 같이 참으로 열심을 가졌고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사도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내가 이전에  성에 있을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같이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을 들으시오”

“내가  열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으로 다메색을 향하여 가던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가 나를 오늘 이곳에 서게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말을 들으시오.

우리가 열심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이곳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말이 사도의 증언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도 예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다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시간 지난날들을 살펴 보니 지난날 알았던  열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열심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이 아닌 단순한 지적인 변화를 가지고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바울과 같이 어떤 결과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의해 변화된 자신을 증거할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사도와 히브리인들과의 생각은 같았습니다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만남으로 인해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았고  이상 잘못된 길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과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가 무엇을 위해 행해지는지도 알게 되었고그들이 포기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전통을 붙잡고 놓을  없는 비극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고백을 하는 사람 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있습니다.

그들은 본래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택함을 받았고 이방인들은 버림을 받은 유기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과감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했던 그들이 누구인지 아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남긴 글들을 읽어 보십시오.

로마서 11장에 아주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신학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나머지 이방인들은 유기된 사람들이라는 그들의 신학적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한다면 사도의 슬픔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사도가 로마서 11 21절에서  말을 들어 보시렵니까?

“하나님이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너희들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물론 다른 말씀들도 많지만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도 버렸다고 말하는  같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사도가 지금 변증하고 있는  자리에서 바라본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성에 대한 슬픔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사도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엄하시고 두려운 심판을 보고 있습니다그것은 창세전에 가지셨던 뜻을 돌이키시는  같은 엄청난 결정을 하신  같습니다

사도는 이런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증언하는 두려운 심판의 말씀으로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택한 사람들을 버리시는 일들을 하신 것처럼 증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많은 유기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사야 선지자의 사상에 따라 남은자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동안 감추어온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 드러내 주셨는데하나님의  역사를 행사신 것입니다

유기된 자들이라고 생각되는 이방인들에게 택한 자들이 있게 하셨고택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유기된 자가 있게 하시는 새로운 역사였습니다

 동안은 택한 백성들은 유대인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되지 않고 신분상 동일하고  사람들 안에 택한 사람들이 있게 하셨고 선민과 유기된 사람들과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브라함의 혈족을 선민이라고 구별하셨으나 이제는 혈족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믿음으로 선민과 유기백성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그의 형제들에게 외치려는 사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그토록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하려는지 이해될 것입니다

그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비밀의 지식이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없는 고통스런 아픔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혈족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제가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열심을 따라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긴 것을 여러분 가운데 있는 형제들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수많은 우리 형제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강림에 의해  성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고 우리는 그들이 이단을 추종하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해체할 목적으로 핍박했었습니다

그때 다메색에서는 심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예수를 따르고 있었고 그들을 해체하지 않으면  되는 상황에 있어서 영장을 받아가지고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와 하나님을 섬김에서 나오는 악한 감정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섬기는 사람에게 향한 증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사람이라고  많이 잡아 예루살렘의 옥에 가두기 위해 표독스런 이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악한 감정을 가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께서 이를 참고 보실  없었습니다

가인이 그의 마음에 질투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미움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셔서 죄를 짖지 말라고 경고하신  처럼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계셔서 사울이었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의 조상의  아들에게 나타난 사건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의 하는 일을 경고만 하셨고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가인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넘어뜨리셨고 그를 회기 하게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려분은 제가 가인과 아벨을 조명하여 비춰 보이는 이유를 이제 알게  것입니다

저는   인류의 조상을 바울에게 비춰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분과 그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가 열심을 가졌을  가인처럼 표독스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그의 영혼에 대해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알게  것들을 다시 저에게 조명하여 저를 다시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속화 되어버린 지금 교회와  안에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고 다메색을 향하여 가는 사울의 영혼이 드러내는 흉측한 광기를   있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는 위장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살해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지음을 받은 이후 줄기차게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채워졌으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무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괴롭히는 일을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는 이런 일이 자행되고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괴로움과 고통,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런 비참함에 처해진 것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지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짖고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지옥을 향하여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산한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저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세상은 그의 아들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죄를 짖지 않았으면 우리가  땅에 태어날 일이 없고 땅에 태어난 우리가 얼만큼 살다가 지옥에  것인데 그런 고통스런 운명은 바로 하나님아들들의 너희의 죄 때문이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최초 지으신 대로 상호 교통이 되도록 두셨다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신음하는  고통 때문에  하루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부림치며 괴로워  것이고죄로 말미암아 정욕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며 살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세상은 순식간에 파멸하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에 대해서 알지 못하도록 가리워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도 자기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사람에게 미움과 분노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므로 인해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인과 아벨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에게서 바로 이런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위장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죄의 열매로서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죄의 열매, 정욕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습니까?

바로 귀중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오늘 제가 본문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에게서 비춰지는 것입니다.

사도의 영혼은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나 실상 영혼은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최초 사람에게 부여 되었던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형상 안에는 본유지식(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창조에 관한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있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지식들을 깡그리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상실하게 되자 하나님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께 대하여야 할지도 모르고, 창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더욱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더욱 무지한 상태가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사람이 죄를 짓고 육체의 정욕을 일으켰습니다.

정욕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은 가인이고 다른 아들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아담 안에서 사람의 열매로 태어나도록 작정하셨으나 가인은 이런 작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정욕으로 태어난 죄의 열매 잉여의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죄가 그를 세상에 있게 것입니다.

사도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의 사상의 기저에는 택자와 유기자에 관한 근본적인 히브리즘의 사상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사변적인 내용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사변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저는 말씀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죄의 열매인 유기자,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가인의 영혼은 자신의 탄생에 관하여 생생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운명적으로 태어난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세상을 온통 파괴시키려는 의지를 갖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혼이기 때문에 자기의 육체에 이런 의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당신을 대적하여 세상을 순식간에 파괴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영혼들이 육체와 교통을 갖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육체와 교통을 하지 못합니다.

결과 전적으로 육체가 사람은 자기에게 영혼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도를 깨달아 심오한 철학을 말하는 사람도, 지식을 연마하는 철학자도, 과학에 집중한 과학자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정신질환자의 뇌를 수술하는 의사도 자기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것은 육이요(3:6)”

하나님께 최초에 인류의 조상들의 행위가 악함을 보시고 사람에게서 영을 거둬가심으로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들의 날이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 6:3)”

처럼 사람은 육체뿐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신이 영적인 존재인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지식 본유지식 안에 있는 사람이 관한 자기 지식을 상실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자 가인의 영혼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아벨을 대적하는 것을 있습니다.

가인의 영혼은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은 죄의 열매, 정욕의 열매라는 것을 아주 압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압니다.

그의 영혼이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자기를 태어나게 한근원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을 것에 대해서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가 자기의 영혼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육체도 보고 영혼도 보았으나 육체로 나타나는 반응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하셔서 자기의 영혼이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멸망으로 보내실 것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판결을 피할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아벨 뿐만 아니라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일한 원망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너희의 죄가 나를 이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나는 죄의 열매로 태어나 영원한 고통인 지옥으로 간다.

이런 원망으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탐욕, 파괴와, 원수 맺고 분내고 짖고 이런 일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너무 알았습니다.

궁극적인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원수로 알고,

자신을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보내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움이 있는 원인은 죄가 정욕을 일으켜 죄의 열매를 낳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같이 이런 죄의 열매였습니다.

사도는 이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다메색 도상에서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원수로 여기고 그들을 진압하여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행위가 바로 죄의 열매인 정욕의 자식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적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것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미움과 살기가 등등한 마음으로 다메색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그들을 괴롭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아가 그들의 세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에 관하여 당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런 핍박을 받는 것은 자기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의에 가득 헛된 생명 없는 열심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없었습니다.

이를 참다 못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은혜로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하셨으나 가인은 꿈적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비웃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울을 돌이켜야 했었습니다.

사울을 증언자로 세우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인과 바울인 사울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죄의 열매로 태어난 정욕의 열매였고, 사울은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세상에 태어나기로 작정되어 아담의 안에 계획된 사람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가인은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그야 말로 잉여의 자식으로 순수한 죄의 열매입니다.

반면 사울은 하나님의 계획하셔서 존재하도록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구별은 하나님을 만난 반응에서 드러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완강하게 거역하고 대적한 반면, 바울은 즉시 자신을 돌이켜 순복하는 사람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난 사울이 놀란 것은 자가 스스로 택함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선택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지 못했고, 예수 밖에 있었으며, 지금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모습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라면 동안 자신이 알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제가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설명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 되십니까?

우리가 줄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에 새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설명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 되실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고 기록되어 우리를 진리대로 활동하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을 드릴 때는 말씀이라도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었던 사울의 놀라움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여러분도 사울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반복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울은 자기의 열심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자기 앞에 모습을 보이신 예수를 보면서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고 자기에게 힘을 주시려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자인 것으로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에게 당한 상황을 판단해 보십시오?

같이 가던 사람은 소리에 놀라고, 자기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비취는 빛에 의해 자기의 눈이 부셔서 앞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짐작할 있는 상황입니다.

자기의 일을 방해 받는 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자기의 행위가 옳지 못한 것임을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순간적인 이런 상황 판단을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소리를 쳤습니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내리 비취는 강렬한 빛에 피할 없이 사로잡힌 사울은 자기를 비취는 그를 향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질문하게 것입니다.

말은 내가 뭣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누군데 옳은 일을 방해 하십니까?”라는 인식으로 묻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의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견고한 자기의 의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숴져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우치면서도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을 완강히 거절합니다.

말씀을 인정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 합니다.

말씀에 비췸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면서도 자기가 믿어왔던 신앙을 굳게 붇잡고 내려놓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을 드러냅니다.

여러분은 가인과 무엇이 다릅니까?

자리에서도, 자리를 벗어나서도, 자리가 끝나자마자, 아니 지금도 여러분은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빛이 비취고 소리가 들리며, 꼬끄라라지는 상황에 이르렀으면서도, 자기에게 나타난 분에게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묻고만 있는 사람이 되시렵니까?

생명 없는 신앙에서 언제까지 머물러 있으려 합니까?

위선과 가득찬 거짓으로 살면서 가인처럼 완강하게 돌아서서 자기만의 성을 쌓는 사람이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그곳에서 여러분은 무슨 일이든지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거야

하나님이 보시지 않을 거야

여기에 나만의 성을 쌓고 나만 거하는 그곳을 구축하여 그곳에서 멸망을 향한 영원한 보금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죄의 씨앗들이 양성되는 ,

죽음과 방탕과 타락이 있는 ,

미움과 원망과 시기가 있는 ,

소돔과 같이 어두움이 지배하는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그곳,

여러분은 그곳을 향하여 가인처럼 물러갈 것입니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고 그곳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눈은 그곳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미래를 결코 안전하게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두려워 견딜 없었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놀라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으며,

낙엽이 떨어져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환영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곳,

어두움의 세계에는 온전한 정신으로는 결코 없었습니다.

자기의 옳은 의가,

자기가 믿었던 생명 없는 신앙이,

사울을 건질 있었습니까?

주여 뉘시오니이까?”

저의 귀에는 사울의 음성이 절규로 들렸습니다.

자기의 의가 부서지는 파멸하는 사울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지식을 넣으시자 몸부림치는 죄의 바락으로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가다랴 지방에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옷을 걸치지 않았습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묶여졌던 흔적들이 있었고,

온몸은 여기저기에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괴력을 발휘하는 마귀 자체였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어서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의 부모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도 알고 두려워서 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앞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유대의 최고 학문의 수제자이며 율법의 의로 완전한 의인인 사울이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핍박하고 있었으니 사울에게 있는 의와 가다랴 지방에 있는 귀신들린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역겨운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거짓된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미천하기 짝이 없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는 찾아 없는 마귀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뭐라고 하신지 아십니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나중에는 마귀 자식이라 했습니다.

말씀이 지금 여러분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으시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영혼에 새김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의를 가지고 목을 곧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없습니다.

예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이 꼬끄라진 우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에서 무너지고 깨어져서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을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음주 계속하겠습니다. *

 

(한 주간도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