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결국은 영혼을 구원함이라.(벧전 1:9)
타락의 결과
이렇게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그들의 영혼의 지성은 심각하게 무지와 어두움에 빠져버렸고,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모든 사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진리의 본체인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에 빠졌고,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에 놓였으며, 창조와 사람자신에 대하여 무지함으로 인하여 즉시 영혼과 육체와의 소통의 단절을 가져 왔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각기 인격적 기능의 작용에 의해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생명활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쌍방의 존재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자기 안에 영혼의 존재가 감각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부인하고, 의심합니다. 심지어 영혼은 심각한 어두움에 빠져 있는 소경이 되어 아무런 감각을 느끼거나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를 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고 살아서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행위언약을 주셨을 때, 죽을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여기에서 죽음은 미래에 나타날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각적인 영혼의 상태로 인한 결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행위언약은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창조자와 피조물이 완전한 인격적 관계의 소통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파격적인 상대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명령을 지켜 순종할 수 있고, 반대로 불순종 하여 명령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죽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불순종하여 죽었으나,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결과는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순종을 해도 자기의 의지로 순종하고, 불순종한다 해도 자기의 의지의 결과이기 때문에 주어진 명령에 대한 결과적인 책임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으면 육체가 살아있는 행위를 하고, 영혼이 죽어 있으면 육체가 죽음의 행위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영혼이 생성하여 내는 지식대로 행위를 드러냅니다. 내가 거짓과 악을 행하며 살고 있다면 나의 영혼에서 거짓과 악의 지식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고, 선과 진실을 드러낸다면 나의 영혼이 그것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위명령을 왜 주셨는지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위명령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위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키지 못할 것을 주시지 말고 그냥 살게 하시지 왜 꼭 주셔서 죄를 짓게 하셨을까?
그렇습니다. 꼭 주셔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께서 피조물과 소통의 첫발입니다.
둘째는 피조물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나타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완전합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관계로 대할 줄도 알고, 창조와 사람에 관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조명해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별도로 듣고 소통함으로 하나님을 더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나와 내 아내는 결혼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압니다.
나는 아내를 알고 아내는 저를 잘 압니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하여, 대화할 때 마다 아내에 관하여 알게 된다면 아내로 인하여 더욱 기쁨이 커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아내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고 기쁠 것이며, 더 대화를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을 주시는 것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더 알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욱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만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결과로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죽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육체를 놓으신 다음 아직 활동하지 않은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말씀이 되어 사람의 육체의 감각 기관에 들려지고 그 말씀이 즉시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었고 영혼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을 조명하셔서 비로서 사람이 말씀에 대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되었고 생성된 자기지식은 영혼의 감성에 지각 되고 지성으로 반영하여 기록되고 전인에 반영되어 지식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 영혼의 지성이 자기 육체의 감각에 의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생명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지성에 본유 지식의 조명을 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본유지식은 진리와 성령과 같아서 반드시 진리가 있는 곳에만 성령께서 그 진리를 조명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조명하게 합니다.
짐승들과 같은 활동하는 생명체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본유지식이 없으므로 스스로 자기지식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피조물의 감성에 새겨져 말씀의 내용대로 활동하고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활동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활동하다가도 말씀이 감성에 감각되면, 피조물은 명령대로 움직여지게 됩니다. 사람도 역시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야 생명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스스로 생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어 놓았는데 하나님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 존재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제어할 수 없는 존재를 지으시는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바로 그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이었고, 이 명령의 말씀은 아직 생명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육체의 감각을 거처 영혼의 지성에 들어오게 되자 본유지식이 조명하게 되고 지성은 지식을 생성함으로 생명활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오지 않으면 영혼에 있는 본유지식은 결코 조명되지 않을 것이고,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인식을 갖지 못하여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의식을 갖지 못하는 존재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런 존재를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존재 원리에는 철저하게 선의 규칙에 의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였고, 이 원리가 선인 것은 선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은 곧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요한 사도가 환상 가운데 밧모섬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계시록에 기록하였는데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라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만물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이때 심히 좋은 것이 히브리어로 “토브” 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선의 규칙에 따라 존재하도록 하셨는데 그 선의 규칙에 대해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으나 그 답을 찾을 수 없었으나 성경으로부터 유추된 선은 “질서로움” 관 “조화로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각기 한 구절씩 나오는데, 사도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라고 말하였고, 잠언 8:22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고”라고 할 때 만물의 조화가 드러나는 태초이전에 지혜를 가지신 것을 언급하였는데, 이때 만물이 조화로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직접적으로 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의 규칙은 질서로움과 조화로움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생명의 질서에 의해 생명활동을 하는 생명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질서가 깨어지면 곧 생명체로서의 조화가 깨어지고, 생명체로서 기능할 수 없는 무질서상태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최초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되자, 그들의 영혼은 무질서하고 조화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성은 어둡고 혼란스러워지게 되었고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지식을 생성하여,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자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에 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의 깨어짐과 함께 본유지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자기지식에는 반드시 무지와 결함이 함의 되어 있으며, 이 지식은 결코 진리의 지식이 되지 못하고, 사람으로 선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롬3:23)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 지음을 받은 사람은 그 영혼의 지성이 진리에 속한 지식만을 생성하고 그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왜면 하여 불순종하는 지식을 냄으로 전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행동이 나타났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생명이 없는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죄인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이 없는 죽은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와 감각의 소통을 나누지 못하여 육체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영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성에는 거짓과 무지, 결함이 함의된 진리를 왜곡되게 생성된 지식 뿐입니다. 객체에 대한 사실적인 지식에는 반드시 무지와 결함이 함의 되어 있고, 지식을 조명하여 생성된 진보된 지식은 왜곡되거나 거짓된 지식을 가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지성이 궁구하여 지식을 조명하고 새로운 지식을 생성할 때 조명하는 그 지식에 함의된 무지와 결함 때문에 새롭게 생성된 지식은 더욱 심각한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 진리에 근접할 만한 비슷한 지식을 생성하였을지라도 그 지식은 반드시 무지와 결함 때문에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진리의 요소를 발견할 수 없는 왜곡되고 혼란스런 지식만 가졌으며, 무지의 어두움에 빠져 있는 모습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이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우주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목적이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끝이 없는 유영을 계속하는 사람은 대를 이어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종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원의 고갈, 과학의 한계, 방대한 우주의 도전 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지 않았다면, 자연과 환경에 도전 받는 일로 고뇌하지 않고, 짐승과 같이 잠깐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고 산다면, 악을 행하며, 미움과 분노와 원망을 드러내고, 슬픔과 괴로움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연에 속하여 자연과 순응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 버린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교제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가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다고 생각하며 놋 땅으로 가서 성을 쌓고 하나님과 단절하며 살 것 이라고 했으나,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가인을 돕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앞에 계신 하나님,
사람과 관계를 가지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바로 여러분의 숨결을 맡으시며 계십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갈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숨어 우리의 몸을 감추지 못합니다.
우주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입김은 하나님의 얼굴에 풍겨지고, 하나님을 욕하고 부인하는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귓속에서 더 크게 울려 마음을 찌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리니(시 14:1, 53:1)”
다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2천년 전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사건이 역사를 지속하는 동안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생명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범죄함으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이 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 말하든지 이 말을 하는 사람이 가감하지 않고 진리로 말할 때, 진리와 항상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이 말을 듣는 사람 영혼의 지성에, 듣고 있는 그 이야기를 조명하여 새겨지게 함으로 사람의 영혼을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다면 그의 영혼은 반드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살아난 영혼은 그 말씀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가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이미 들었던 복음의 말씀의 조명에 의해 진리의 지식이 생성되어 영혼의 지성 채워져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그 말씀을 지성에 채워가고 마침내 채워진 지식대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자리 잡고 빛을 발하였을 때 영혼의 상태는 무질서하고 정돈되지 않아 혼란스럽고 헝클어져 있으며 청소되지 않은 지저분한 방이었습니다.
복음의 빛에 의해 자신을 비춰본 사람 스스로 자신의 영혼은 도무지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영혼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 가히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 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 고백하는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 2:37)”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자기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아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살아온 죄인이 되었고 영혼이 힘이 없는 무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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