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세기 31:40)
이렇게 해서 야곱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며 위험한 행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 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위험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험한 인생의 언덕길을 넘고, 또 넘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은 오로지 고향이었습니다.
나고 자라고 꿈을 키웠던 어머니의 향취가 있는 그곳,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곳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땅이었고,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날 밷엘에서 돌 베개를 베고 노숙하던 그날에 나타나 주시던 그 땅이었습니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이 급히 짐을 꾸려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우선 생각한 곳 고향을 향해 돌아가고 있는 야곱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야곱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드리는 말씀의 제목을 생각하시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어떤 달콤한 위로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 예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예상하여 오늘 여기에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감성을 자극하여 어떤 느낌을 갖게 하려는 생각이나, 혹은 현란할 말솜씨로 여러분을 유혹하거나, 감동되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사명에 따라 오직 하나님께서 저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만 전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위험,
여러분이 준비해야 할 미래에 대한 준비,
위험과 고통의 순간에 여러분이 대처해야 할 방법들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예언적이며, 사실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분이 처한 행동과 신앙의 모습에 관하여 냉정한 판단을 말씀 드리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돌아오라고 말씀 드리는 중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즐기지 말고, 여러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살인자 가인에게 동생 아벨을,
형 에서 앞에 야곱을,
반역과 배반을 떡 먹듯 하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죄가 쏟아낸 정욕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여러분을 세상의 죄와 정욕의 열매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가셔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며,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하시며 갈릴리 바다와 마을을 다니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이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면,
여러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정욕의 열매들인 세상 사람들의 영혼에서 울부짖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들의 육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들의 영혼이 쏟아내는 분노의 소리에 귀를 여십시오.
그 영혼들이 여러분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낳았느냐?”
“너희가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우리로 세상에 있게 했지만, 지옥으로 가고 마는 죄의 열매가 아니냐?”
“왜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낳았느냐?”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일이 없을 것 아니냐?”
이런 증오의 외침을 불신자들의 영혼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정욕을 일으켰고, 지옥으로 가야 하는 세상의 형제들을 생산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저들은 바로 우리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열매들인 것입니다.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죄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랑하라”
“용서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너희의 죄가 정욕을 일으켜 저들을 세상에 있게 한 원인에 대해서 회개하라”
“저들이 지옥에 가는 원인이 하나님의 아들인 너희의 범죄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의 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그들에게 한없는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지식을 깨우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생각하십시오.
지난날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며, 하나님의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영혼에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지 않았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기자신의 지식으로 판단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가인과 한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을 새겨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듭나도록 생명의 말씀을 영혼에 심으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때 성령께서 진리를 동반하시고 행하셨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어머니의 태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그 순간을 알지 못하였으나,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심겨졌습니다.
그때 심겨진 말씀이 여러분 영혼의 지성을 조명하여 밝혀주셨고, 비로서 자기자신의 지식으로 살았던 죄에 속한 여러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 때문에 하염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비로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믈을 내렸을 때,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보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여 자기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여러분은 자기지식의 사람인 죄인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때 골고다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지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거듭난 여러분이 본 자신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셨고,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었으나 사람의 뜻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참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에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오셔서 '죄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전에 죄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죄 때문에 죽어야 했는데 죄가 없는 분이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죄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세상 사람들을 생산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과 우리와의 놀라운 비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여러분이 거듭나기 이전에 정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할 수 없는 가인 같은 아들들을 낳았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인류의 조상이며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정욕에 의해 가인과 아벨을 낳은 것이 바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은 정욕의 열매였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는 면밀히 살펴 보십시오.
아벨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인 가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자기지식대로 자기 멋대로 드리는 제사는 결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 들이는 조건은 먼저 하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두 가지의 조건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요17:3),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대로 행하는 것(시편 51:17),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사람의 마음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53)
가인은 하나님을 자기지식 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렸고, 자기의 제사를 위해 피를 흘리는 짐승의 아픔을 이해하고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아파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제멋대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자기지식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가인을 인류의 조상 첫 하나님의 아들 아담과 하와가 낳았습니다.
하와는 그를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진리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열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담과 하와의 후예라고 생각한다면 아담과 하와와 같이 정욕을 일으켜 여러분의 후손들을 낳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옥에 갈 사람들을 생산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받지 못한 지옥으로 직행해야 하는 불신자 형제들이 태어난 책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여러분은 선택 받지 못하고 지옥 갈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들을 세상에 있게 하고 지옥가게 했으니, 여러분의 생명을 다하여 그들을 존재하게 한 죄의 열매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 그들에게 미안해 하고 용서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을 볼 때 마다 마음을 괴로워하고, 저들도 우리와 같이 구원의 문이 열려지기를 생명을 다해 울부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던져서 그들을 대신해서 죽어준다고 해도, 여러분의 죄가 정욕을 일으켜 저들을 세상에 있게 하여 지옥으로 떨어진 비참한 운명으로 살게 한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결코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저들과 동일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더러운 죄의 정욕을 말미암은 죄의 대가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셔서 반드시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할 여러분을 대신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죄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 죽으심으로 한 가지 또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은 선택 받은 이스라엘에게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이 열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의 기적을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세상 사람들일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했습니다.[1][1]
이제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지옥에 갈 세상 사람들을 생산하였다는 그 고통스런 부담에서 털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모든 것을 깨뜨리고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구별이 없이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지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의 저주를 담당시키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러분은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구원을 말해야 합니다.
하루 속히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가족들, 그리고 이웃과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비록 죄의 열매로 태어났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면 구원이 그에게 임하는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 일은 내일 혹은 내달에, 때가 이르면, 기회를 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속히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사도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그래서 사도는 그의 골육이 구원을 얻기를 강력히 소망했습니다(롬 11:14)"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 구원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지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수는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떠난 수만큼입니다.
만약 그 수가 다 차면 기회가 없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속히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족 친지,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타락한 자녀가 있으면, 여러분은 제를 뒤집어 쓰고 크게 회개하십시오.[2][2]
그리고 그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이 죄의 정욕으로 가인과 같은 아들을 낳은 것을 슬퍼하십시오.
아직 구원의 문이 열려 있으니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슬퍼 부르짖는 눈물을 보시고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여러분 자신을 저주에 넘기시더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의 구원에 대해서 생명과 바꾸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아닌 이상, 여러분은 반드시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권리관계를 끊을 자 없습니다.
여러분이 죽으면 천국에 이르지만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자녀나 형제 그리고 이웃은 지옥으로 갑니다.
속히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누군가 기도하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찢고 애통해하며 슬퍼했습니다.
골방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애타는 아픔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흘리는 그 눈물을 보시고 진리와 성령을 여러분에게 보내셔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 기도의 빚을 반드시 갚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화가 여러분에게 임할까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촛대를 옮기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의 촛대도 여러분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위해 금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그 호소를 관계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미워할 까 두렵습니다.
제발 기도하십시오.
이웃을 위해, 친척을 위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흘리는 눈물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야곱이 가는 길에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기의 것을 자기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온다고 잘 기른 군대를 이끌고 맞을 준비를 하고 달려 오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아 도주했던 것 때문에 이를 빌미로 동생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을 만난 그곳에서 야곱의 운명은 결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득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스런 아내 라헬도,
많은 자식을 낳아준 레아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들과 양들을 기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해준 여러 몸 종들도,
자기들의 힘으로 지켜줄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양을 기르는 기술은 있지만, 싸움을 해서 자기의 가솔을 지켜낼 능력은 전무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뿐입니다.
아무도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호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기도했다는 것은 얍복강 가에서 기도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형 에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누그러뜨려 달라고 호소했을 것입니다.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실지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영혼에 말씀으로 자리하고 계시고 강권적으로 그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영혼의 지성에는 말씀이 찬란하게 조명하기 때문에 지성에서는 말씀을 중심의 지식만 생성하여 감성에서 지각되고 마음에 반영되어 온통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조명이 거짓된 자기자신의 지식들의 작용을 억누르고 오직 말씀이 야곱의 지성을 조명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오늘까지 개혁교회는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선포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오감이나 영혼의 감각 혹은 지성의 울림이나 마음의 감동으로 듣는 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으므로 감각을 가진 사람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되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에 작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도록 하시며, 신자에게는 힘을 주셔서 의지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앞에서 분명히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 행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행할 의지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인은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할 능력이 없고 오직 말씀을 불순종할 능력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야만 사람이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의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하는 그 힘, 하나님을 믿음을 일으키는 그 힘을 곧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에 작용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모든 교회가 의지하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만 가능하고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의지를 일으켜 말씀에 따라 순종하게 하고 믿음을 일으켜 주는 그 힘인 은혜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력이 있어 사람의 영혼과 곧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합니다.[3][3]
사도 요한은 이 말씀에 사람들의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4][4]
모든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 힘이 나오고 사람을 살립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이는 말씀이신 예수께서 당신을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지식은 사도 요한에게서 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정체를 사도 요한에게만 분명히 보여 주셨고[5][5](계, 19:11-13). 사도는 이 때 본 하나님의 말씀의 정체를 요한 복음서에 폭넓게 밝혀줄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3년 공 생애 동안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을 유일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분명히 전달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증거에 따라 저는 지난 여러 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해서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 오늘 다시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의 역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주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지성을 조명하여 사람의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합니다. 이때 생성한 사람의 자기지식은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됨으로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이, 비로서 사람의 지성에는 사람의 자기지식으로 새겨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인의 기관인 마음에 반영하여 인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서 새겨지고 지식을 생성하게 하고 지각되어 전인으로 인식함으로 생명활동을 하는 것은, 자기자식의 지식에 의해 살던 옛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지식으로 사는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데 사도는 이를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육신의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하고 영의 사람을 새 사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산다는 것은 말씀이 객관적으로 ‘사람의 외부에서 들려지기만 하고 은혜의 힘이 사람의 의지를 작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내부인 영혼에 새겨지고 지성에서 작용함으로 새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는 작용적인 의미를 말한 것입니다.
이를 사도가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6][6](골로새서 3:10)
새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는 은혜의 힘에 의해 의지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신앙인들은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다”고 겸손의 의미를 부여하여 말하곤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선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이기 때문에 선에 대하여 무지와 무능을 말하고, 죄를 범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지 무능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돌변합니다. 이런 것을 곧 변화, 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곧 ‘무능하고 무지한 심각하게 고장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는 능력입니다.
망가지고 형편없이 병들어 비틀어졌어도 은혜만 임하면 모든 것이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만능입니다.
새롭게 하고, 고치고, 지식을 주며, 능력을 덧입혀주는 것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은혜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only Grace 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맞습니다.
은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 작용적 기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은혜”라는 안개를 품어내는 안개 발생기와 같은 기계 안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은혜 안에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 원인물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말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안개 속의 미로를 더듬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은혜 안에서 은혜의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불쌍하고 험난하며 고통스러운 발걸음이지만 여전히 은혜가 그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가 장자권을 얻은 것과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름으로 피하여 도망하고, 밧단 아람에서 두 아내를 얻고 총 4여자에게서 12 아들을 낳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온 것도 은혜가 그를 사로잡고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삶은 여러분의 일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대로 삶을 살고 실수를 하며, 틈만 나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을 즐기거나, 혹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현재 까지도 죄에 억눌려 신음하고 있거나, 아니면 선한 일에 몰두하며 살고 있을지라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로 이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로운 인생의 밤에서 문제의 해결과 희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려고, 이렇게 긴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야곱에게 있는 은혜는 그를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이삭에게 함께하신 역사의 약속, 리브가 와 야곱 자신에게 하신 그 약속, 그 말씀은 야곱의 삶을 지배하고 있고 야곱의 영혼의 지성에서 항상 강렬하게 조명하여, 생성하는 지식마다 그 말씀들이 함의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마음에서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항상 인식되고, 인식된 그 말씀을 떠날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이끌어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영혼에서 생성하는 모든 지식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반영된 지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본래의 은혜로 알지 아니하고, 어떤 힘이나 능력, 신비한 초능력과 같은 사람의 인식과는 동떨어진 어떤 작용적 능력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은혜가 의지를 움직이는 어떤 능력으로 이해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개신 교회의 설교자들이 성도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이신 말씀의 역할’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은혜가 되시고,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영혼 안에 은혜의 말씀이 거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 버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은 은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공로를 쌓아야 하든지 아니면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노력과 선한 행위를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는 기독교의 본질과 아주 먼 거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숙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속 사람이 말씀으로 채워져서 성인으로 성장하고 우리의 옛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이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도록 설교를 집중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집중하여 설교를 듣는데 설교자가 진리가 아닌 말씀을 선포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그 말씀이 새겨진다면 진리가 아닌 그 말씀으로 인해 여러분은 더욱 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면하고 여러분 앞에 서야 하거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성경과 씨름하고, 고뇌하며,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아브라함을 움직여 말씀대로 행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모든 환경은 말씀대로 실천되도록 여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아들의 독립을 흔쾌히 허락하고 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카 롯이 삼촌을 따라 새로운 여행에 동참했습니다. 소수의 응원군이 함께했고, 신생 부족이 탄생하여 광야에 탠트를 쳤을 때 아무도 그를 넘보는 시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부족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나타나셔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근이 일어나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자 그곳에서는 아내 사래를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주심으로 무사히 구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주셔서 말씀해 주심으로 아브라함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차곡차곡 채워져 갔고 그에 따라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인 새사람은 말씀과 함께 성장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당한 시기가 이르자 아브라함에게 새 사람의 이름을 주시고 그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후에 그 아들을 통해 시험을 마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견고하게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지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심겨져 새 사람이 되어 자라게 되는 것을 사도는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은혜의 말씀에 의해 성장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되어가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자라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매주일 말씀을 듣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1][1] 롬 10:13,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갈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요일서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눅 9:48”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요엘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2][2]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3]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4][4] 요한복음 1:4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5] 계시록 19:11~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6][6]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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