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직도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샤머니즘적인 종교적 관념에 빠져있는 기독교에 젖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매주간 교회에 출석하고 정성을 다해 헌금을 준비하여 자기가 거룩하다고 믿는 제단에서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 편향에 치우쳤거나, 감정적이고, 신비적이며 심지어는 독선적인 경향을 드러내, 거룩한 교회의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설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도가 단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섰다고 고백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단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단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을 허락하실 때에는 우리의 사견이나 혹은 주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과 생각은 온통 세상에 집중되어 있어서 세상 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저의 마음의 한 구석에는 어떻게 여러분을 감동시킬까? 그래서 여러분이 저의 설교로 인하여 여러분이 감동하고 기뻐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을 누리게 할까?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화된 생각들이 설교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교만만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또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 설교가 주님의 외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면 당하시고 내어 쫓김을 당하시는 쓸쓸함을 경험을 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사람의 마음에 화살을 찌르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종교적이되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지 않은 타락의 본성대로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인과 같아서 이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분노를 일으켜 설교자가 단을 내려가면 무엇이라도 집어 던질 기세로 혈기를 돋우고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자기와는 전혀 관심 없는 설교를 한다고 지루해하며 거반 관심이 없이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다가 설교가 끝나면 성도간의 교제를 할 생각도 안하고 속히 예배당을 빠져 나갈 것입니다. 분별력을 상실한 회중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한 체 혼돈의 늪 속에 깊이 빠져 자력으로 해쳐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어쩌면 기독교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수정하고 새롭게 renovation 된 교회로 정의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머지않아 교회의 명패도 바꾸어야 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종교적인 자만심과 영웅심, 그리고 명예의 전당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눈을 열고 기독교를 찾아보십시오. 무늬와 흔적들만 남긴체 교회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불리운 십자가 아래 세워진 교회를 드나들고 있으나 놀랍게도 그 교회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교회를 이끌고 가는 사람만 보입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축복의 보따리를 가지고 교회에 오셔서 합당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오셨으나 이를 반기는 사람은 없고 받을 사람에게 나눠주시려는 허둥대시는 모습만 보이시고, 쓸쓸하게 교회를 떠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주님은 이곳 저곳을 바삐 다니시다가 한 사람의 성도라도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려고 다가가시지만 모두 외면하고 돌아가버리는 씁쓸함을 견디지 못하여 하늘만 처다 보시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서있는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의 소리에 놀라 입을 닫지 못하십니다.
유명하며,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 선포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꿈과 성공적 인생론 혹은 신학의 강연장으로 변하고, 어느 휼륭한 설교자는 몇구절의 성경을 주해하면서 성경해석이 잘못되었고 이를 자기의 신학 방법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기만의 성경을 자기 교회에 주입시켜 공공의 성경을 무시하게 만들어버리는 오만을 서슴지 않습니다. 또한 현란한 웅변술과 감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는 전혀 다른 교리를 강론하는 것도 모자라, 각종 새로운 언어들을 개발하여 의미를 부여해서 언어의 마술로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강론은 종교적 삶을 유지하거나 신앙을 갖기 위해 마땅히 취해야 할 방법론을 강의하는 세미나장으로 변질되었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진 고통과 고난을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을 유발시켜 인간적 감정을 복돋아 슬픈 감정에 복받쳐 흐느껴 울게 하는 짝퉁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사로잡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회중들의 노력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에 충분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데 그 은혜를 받지 못하는 기준에 미달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 있다고 호통치기도 하며, 그런 상태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실뿐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당장 은혜를 받아야 하고,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자유를 얻어야 하는 회중들은 자기들의 열심과 노력의 부족으로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한주간을 더 은혜를 얻기 위해 마음을 돌이키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모아 은혜를 받기 위해 정성과 공력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말씀을 묵상하며, 성도간의 교제를 위해 돌아보고, 뭔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공력을 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협박 때문에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를 협박하여 성도로 하여금 은혜를 받기 위해 공력에 미치는 노력을 다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에 합당한 노력으로 은혜를 받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고, 성령께서 하늘의 보화를 열어 은혜를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고, 병든 회중에게는 지금 주님께서 지금 말씀으로 치료해 주셨으니 간절히 기도해서 은혜를 받아 병 고침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회중인 신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은혜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올라 가실 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성공적인 삶을 주시고 싶어하시는데, 회중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동이 없고, 믿음이 부족하며,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않은 것이며, 결국은 바보같이 모든 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받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안타까워하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회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이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성공적인 삶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잘살고 못사는 것과는 별도로 여러분이 죽어있는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삶은 영혼과 육체가 감각적 교통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육체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영혼을 느끼지 못하고 영혼은 육체의 느낌을 전인으로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깨어나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영혼의 소생에 관심을 가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삶의 양태 보다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고통 속에 있어도, 위기 속에 있어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교회가 이 대 사명을 뒤로하고 인생의 문제를, 삶의 질을,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후차적인 문제입니다. 결코 영혼의 구원이 선행되지 않은 그 어떤 목적도 교회가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을 찾는 목적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십자가이며, 베드로의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나 순교의 희생을 당한 바울의 죽음과 같은 삶입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한 송이의 아름다운 생명의 꽃이 피어나고, 그 꽃은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공하려면 어부로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이고, 바울이 인생을 성공하려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바 대로 실천하여 유대의 대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그렇게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 심지어 위협을 당하며 매를 수없이 맞아가며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열에 들어 섰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인생의 행복을 찾는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벨을 보십시오.
그는 가인 아벨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조롱을 당하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그 누구도 비길 대 없는 영화로운 자리를 버리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은 구차하게 사람들이나 세상에 자기의 인생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당당히 죽을 수 있는 삶의 준비를 이미 마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신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때리고 옥에 가두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왜곡된 신앙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너희는 틀렸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톱으로 켜 죽이는 죽임을 당하였고 배고픔을 당하였으며, 괴로움을 무수히 당했습니다.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영혼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받으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삶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신실한 사람들의 순교적인 삶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적인 삶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합니다. 더욱 분명하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대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원수로 여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알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또 언급을 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겠습니다.
최초 사람의 타락 후 아담과 하와에게 정욕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욕구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는 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입니다.
이들 모두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낳은 죄의 정욕의 열매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했습니다. 최초로 종교적인 삶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들은 것들로 인하여 독립적인 행위를 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자기 책임을 부여되는 때에 종교적으로 자기의 감정과 또는 의견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많은 신학적인 의미들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과 받지 않으시는 것의 차이점은 사람이 행한 행위에 있어서의 진실성 여부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행한 행위와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의 행위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그 진실에 대한 여부에서 진 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행위란?
본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인간론적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으며, 각기 지, 정, 의의 인격을 가졌고 이 둘을 결합하여 전인으로서 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하나의 결합체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지식을 우리는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제가 이 지식에 관하여 말씀을 드려야 할 상황에 이를 때마다 주저 없이 설명을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피조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대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자동차나 혹은 Soft ware가 설치 되지 않은 상태의 단순히 생물체로서의 물질적 상태의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이 물질적인 상태를 뛰어넘은 존재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존재 자체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고 인식하며 느끼는 감정과 감각을 통해 반응하는 존재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순히 생물체로서의 존재 이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생물체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지식을 부여하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보여주게 했습니다. 사람에게 지식이 부여되었을 때 비로서 사람을 스스로 활동하고 움직이고 판단하며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스스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생물체에 부어진 지식에 의해 가능해졌고 그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함으로 이 지식을 상실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유지식을 상실한 상태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지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정욕을 일으켰고, 그 정욕이 가인과 아벨이라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는 핵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주제들을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존재하는 사람의 신분에 관한 정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거울과 같이 비쳐주는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그 신분의 정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분의 정체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아벨은 어떤지 그것을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으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밝혀주는 것은 두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인식은 영혼이 지식을 지각하고 그 지식을 전인의 마음에 반영 되어짐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하였다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 해야 할 의무를 알았을 것이고, 그 지식의 결과에 따라 제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대 우리의 판단으로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판단으로는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인식하는 대로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했을 탠데 인식의 결과가 달랐기 때문에 제사의 행위가 달랐던 것입니다. 인식의 결과가 다른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구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에 관하여 서로 상이한 지식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의 지식이 하나님에 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졌고 가인은 하나님에 관하여 올바르지 않은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샘인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고 아벨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얻고 나니 또 한가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후손들도 마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도 당연히 아벨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이 우연히 드린 한번의 제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벨이 태어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않은 타락한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을까?
그 비밀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밝혀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후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제자로 뽑고 120문도가 전심으로 기도에 열중하더니 “오순절 날이 이르러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3년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인식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강력한 지각과 인식들이 각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시자 그들의 인식이 변한 것입니다.
아벨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말씀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면 아벨에게도 나타나셨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으로 인해 사람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아벨에게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같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역사 해주시므로 아는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아벨에게 조명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주셨고 말씀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느냐 갖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반면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왜곡되게 인식하게 될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 수 있도록 조명해 주셨을 지라도 그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과 같이 본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를 드린 것은 그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짐으로 인해 그 말씀이 영혼의 지성을 밝혀주어 하나님을 말씀의 조명대로 지식을 갖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은 감각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하여 주므로 진리대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지만, 가인은 타락한 본성에 의해 생성한 지식으로 감각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관하여 왜곡된 지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에 관한 분명한 구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를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에 의해 계시를 인식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의 본성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는 구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정욕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전혀 가지지 못한 무지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 주시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수많은 방법들로 계시해 주실지라도 가인처럼 끝끝내 하나님을 떠나버린 유기자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은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지식들을 제공 해주기 위해서 시시때때로 선지자들을 보내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전도자들을 보내 복음을 듣게 하시지만, 그들의 영혼에 있는 자기자신의 지식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켜 인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절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선재해 있어야 먄 합니다. 아벨에게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때 그의 영혼의 지성에 그 말씀을 새겨주시고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심으로 아벨로 말씀의 지식의 빛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함으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게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쉽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미로처럼 얽힌 지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지성을 밝혀주는 지식이 내게서 생성된 지식인 자기자신의 지식인지, 아니면 사람의 생명인 하나님 말씀 인지를 분별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들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붙잡고 사용하시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감동하고 열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설교라고 외쳐지는 성경 강론들에 회중들이 열광하고 매주간 종교적인 행위로 강단 앞에 모이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믿어 왔던 신앙에 대한 커다란 지성의 충동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아마도 여러분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짐으로 죽음의 사람에서 생명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참된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아주 어린 유아와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질 지라도 장성한 사람처럼 스스로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을 소유한 상태에서 옛 사람의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아브람이 최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집을 나선 바로 그 직전의 상태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시간을 길게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 번째 말씀을 하신 것처럼 속히 두 번째의 말씀을 들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미 오래 전에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으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지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졌던 첫날의 경험 이후 여러분은 다시 세상의 삶 때문에 죽음의 사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영혼이 아직 장성한 분량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야곱 삶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하는 말씀은 다만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려는 것이지 기독교인으로서 여러분의 신앙을 비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주지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로서 기독교와 여타 종교의 삶을 구분해주는 교훈적인 삶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우리의 선대 신앙인들과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신앙인들로 부터 분명하게 구별된 기독교와 여타 종교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자신도 삶 속에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기독교적인 삶과 여타 종교적인 삶을 인지하지 못한 체 살아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소리를 들으면 그 분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장자권을 탈취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갈대아 우르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여 두 아내와 자식들을 얻고 가솔과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본래 그에게 있었던 종들에게도 많은 가솔들이 생겼고, 종들의 숫자도 함께 늘어나 여타 부족들과는 비교될만한 큰 부족은 아니지만 작은 부족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 32장의 내용을 보면 그 가산의 크기와 부족의 구성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피하여 하란을 향하여 도망하던 야곱이 줄 곧 홀연 단신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32장에 나타난 그 부족의 규모를 보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고 그 수하의 종들로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에서에게 종자를 보내고, 예물로 보낸 양과 소와 약대의 수가 수백씩이었으니 이 짐승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필요할 것인지 나름대로 생각하게 합니다.
종류도 다양하게 예물을 보내며 종들을 함께 보내되 두 때, 세 때를 나뉘어 보내면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볼 때 그 수와 양은 최소한으로 치더라도 다수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수와 본진에 해당하는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의 수를 친다면 분명히 야곱은 홀연 단신이 아니고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작은 부족인 것이 분명합니다.(32:13~23)
우리는 가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비춰진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를 모델로 우리의 삶의 환경과 인생의 위치를 바꿔보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다.
야곱과 같은 인생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모델로 하여 자기의 삶을 새롭게 개척해 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모델로 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델이 된 야곱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칭하는 자신의 이름에 나타나는 모습은 홀연 단신과 단체를 항상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여러분이 혼자일 때와 여러분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과 같은 대표성을 가진 어떤 상태와 잘 구별해서 성경을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집에서 일어난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복을 물려받은 이삭의 품 안에서 일어난 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성경의 역사에서 그리고 믿음의 가장 핵심 라인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치고 부족의 세습(대물림)이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너무도 큽니다.
만약 장자권을 이유로 대대손손 부족의 권리가 세습되었다면 오늘날의 목회자 세습을 비난할 아무런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세습을 반대하시는 의도였다거나, 미리 아셨다고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성경의 의미와 전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완전한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과 작정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온 이삭이라 할지라도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들을 생산하는 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 에서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낳는 다는 비극적인 의미인데 자기의 의지와 선택으로는 마음대로 조정하여 선택된 아들만 낳는 다는 것은 전혀 블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야곱이 그토록 장자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과 에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얻으려는 장자권은 어머니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주어진 계시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계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어두움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생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도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동질성은 작정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우리의 신분이 죄로 말미암아 정욕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에 비해 죄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주실지라도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자기 지식대로 이해하거나 판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시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가인과 같이 신비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자주 언급해 드린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의식에서 망각하고 사유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지식을 가지든지 그것들이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지식의 조명에 의해 모든 지식들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에는 커다란 결함을 내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존재적으로 기계적 존재의 상태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런 존재에 의식을 갖고 활동하게 해서 인식을 갖게 하려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었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유지식을 상실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말씀이 지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 이전에 본유지식을 가졌던 최초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생명을 갖게 되고, 그 말씀의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을 가져야만 생명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만이 생명이 있고, 말씀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생명을 가지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곱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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