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낼 때.
1. 야곱1, (창세기 28:10~22)
이에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을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띠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네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과 에서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5장 20절에서 아버지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으나 임신을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쌍 태아를 임신하도록 허락하셨는데, 뱃속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느낀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내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리브가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졌고, 에서와 야곱중 야곱을 약간 편애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이삭의 후예들에게 두 민족으로 나뉘어 영원히 싸움은 계속되는 아픔을 낳게 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동생 야곱이 형의 발굼치를 잡고 나오고,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탈취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채는 야비한 행동으로 인해 형과 원수 지간이 되었고 형의 진노를 피하여 도망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야곱과 장자권
야곱이 장자권을 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요?
먼저 이 자료의 전승 경로를 살펴보면 진리에 접근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본문에서 알고자 하는 자료는 무엇입니까?
바로 야곱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가진 리브가의 꿈에 관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는 리브가와 하나님만 아는 자료인데, 창세기 기록자 모세에게 까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후 리브가는 한가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는데 야곱에게 장자권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꿈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리브가의 꿈에 관한 자료는 전승되어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되었고 이 전승이 가져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뜻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마음을 잊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편안할 때도 인생의 험난한 굴곡의 날을 걸을 때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온 마음을 다하고 세상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과 같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이 꿈으로 계시된 사람도 있으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계획 속에 있기를 늘 소망하는 것이 신앙에 대한 욕심이고, 각자 자기 인생의 최종 목적과,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삶 속에서 나타난 인생의 과정을 행복으로 계속 이어가려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불행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불행을 가까이하며 사는 삶 속에서는 결코 안정된 인생을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이든지 불행을 벗어나 행복을 꿈꾸며 자기에게 주어진 최종 목적을 성취하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사람이며 꿈을 가진 젊은 인생을 우리처럼 살았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목표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인 의지를 갖기까지, 어머니 리브가의 품에서 있었고,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이며 삶이라는 사실을 성실히 수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일생은 리브가의 꿈이 지배하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을 했으나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리브가로 하여금 임신하도록 했습니다.
리브가의 임신은 아주 큰 축복이었습니다.
본래 이삭의 가족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작은 부족을 이루고 목축업을 하면서 가나안과 애굽을 오르내리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래가 90세때에 낳은 아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태어난 신의 약속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간섭이 시랑이와 야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터전도 없이 떠 돌아다니지만 기적적으로 부족이 존재해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분들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한 신앙을 다른 세속의 사람들과 구별하여 특별한 종교적인 삶을 살아온 구별된 사람들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회는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사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종교가 부족을 형성시켜주는데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입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이삭은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들과 다른 종교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라는 점에서 종교적인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앙을 가진 것이 마치 다른 부족들은 종교가 없고 우상만 섬기는 비신앙적인 우월적 의식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적인 오류를 앉고 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부족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종교적인 의식을 가진다면 부족이 나뉠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아버지 데라 종교의 가족속에서 자랐다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새로운 부족을 형성시켰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종교를 이어 받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유산을 물려 받은 것은 전적으로 신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인 이스마엘에게 장자의 유산을 주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여서 태어난 이삭에서 모든 유산을 물려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의 장자권으로서의 리브가의 계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계시이기 때문에 리브가와 하나님만 아는 이 꿈이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의 계시의 자료가 야곱의 장자권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치열한 인생의 투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태어난 이삭에 관하여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사래와 아브라함 혹은 주의의 몸종들과 그를 섬기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충분히 들었습니다.
이런 인내와 종교적으로 신의 간섭이 있는 남편의 삶으로 인해 자기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녀를 달라고 아주 간절히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태를 여시고 잉태하게 했는데 쌍 태아였던 것입니다.
임신한 리브가에게 아주 특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뱃속에 있는 태아가 항상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는 위험한 상황에 까지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적 의식행위에 대해 자료가 없기 때문에 리브가가 어떤 종교적행위를 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리브가에게 나타나셔서 응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자료만 있더라도 어떤 상태로 리브가가 하나님께 물었는지 알 수 있을탠대 전혀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당시의 종교의 의식적인 제의 형태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다면 반드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오늘날 소원을 아뢰고 문제에 대한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원을 가거나 아니면 교회의 바닥에 앉아서 하나님께 깊은 교제의 묵상을 하는 방법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기록한대로 리브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임신으로 인하여 자기 뱃속에서 일어난 불안한 상태, 이렇게 가만이 있다가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자 꿈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번에는 생시에 자기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백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우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리브가에게 이 말씀은 거부할 수 없는 예언으로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말씀대로 성취되도록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처럼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결과 어린 야곱을 편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의 뒤를 이은 장자권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해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히 야곱에게나 이삭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꿈과 기도에 응답 받는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리브가에게 계시된 자료는 하나님뜻으로서 야곱에서 전승되었고, 야곱은 이 꿈이 현실이 되도록 자기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사로잡힌 것과 같이 리브가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홀로선 인생
인생의 로정을 홀로 서 본 사람이 아니면 그 새찬 찬 바람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가정형편이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온실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충분히 온실에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닦아놓은 환경과 사회적인 환경을 살펴 보면 얼마든지 온실이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 계시에 의하면 야곱은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빼앗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시도했었고, 결정적인 팥죽 사건이 유일하게 장자권을 사게 되었으나 손에 쥔 장자권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원하는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탈취했고,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장자가 누릴 축복까지도 받아냈습니다. 이 장자권은 보통의 것이 아닙니다.
한 부족을 이끌고 가는 부족장이 되는 권리이고 신과의 교통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당시 부족사회는 종교를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신적인 축복이나 권한은 오늘날 토지의 등기 문서와 같은 절대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권리를 이양하는 축복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족을 이끌고 가는 후계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나이 많아 앞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장자권을 에서에게 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인 리브가가 이를 알고 야곱을 에서 처럼 꾸며서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동생이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해갔습니다.
에서가 이삭에게 달려와서 장자의 축복을 달라고 애원했으나 축복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이 야곱에게 건내지고 만 후였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는 한마디로 자기의 부족을 탈취당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동생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이는 살려둘 수 없는 반란이고 모반입니다.
거기에 어머니가 리브가가 개입되어 있으니 아주 난처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리브가에게 계시된 예언입니다.
이 여인은 이 계시를 성취하려는 생명을 내놓는 도박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두 아들이 각기 나라를 이루는데 리브가의 생각으로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드디어 남편 이삭을 속이고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잇는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에서는 야곱을 더 이상 살려 둘 수 없었습니다.
동생일지라도 이 둘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혼돈스런 부족장 자리로 인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에서의 입장에서는 한배에서 태어나고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야곱을 살려두면 자신을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가 보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가졌으나 형 에서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압니다.
한마디로 손에 권세를 쥐고 있으나, 그것을 행할 세력이 없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됩니다. 힘으로 형을 제압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급히 야곱에게 단장을 하게하고 외삼촌 라반에게로 보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제촉을 받아 속히 보따리는 싸서 밧단 아람을 향하여 도망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무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을 향하여 도망하는 그길이 뭐 그리 어렵다고 그것이 인생의 어두운 밤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제목을 붙이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당시 부족사회라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 벌판은 결코 자유스럽고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은 잡아다 노예를 만들고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이나 부족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허다하고 부족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홀연 단신으로 자기 부족을 떠나 광야에 나간다면 이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그래서 부족들이 서로 동맹을 맺어 서로를 보호하고 연합을 한다든가 하는 연합세력을 형성 해야만 합니다. 이런 위험천만한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은 시랑이에게 ‘나 물어가라’라고 자신을 고기밥으로 던지는 격입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 내몰린 야곱의 운명은 그야 말로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이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가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고 섬기니까, 그 신을 의지할 뿐, 자신이 회개를 하여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거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처럼 종교성을 가졌거나,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앙의 절대적인 사고 중심을 가질 수 있는 교본을 가지고 교육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추종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나타난 종교적인 인식대로 하나님에 관한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을 삼으며, 아브라함으로 인해 부족을 세우고 일으켜준 신으로 섬기는 것 뿐입니다.
어쩌면 여러 신들중 하나님을 숭배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적으로나 종교적인 어떤 계명과 교리적인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닌 지극히 자연적 본성에 입각한 종교적 숭배를 넘어서지 않은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을 피해 밧단 아람을 향하여 발걸음을 시작한 야곱에게는 자기인생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가족을 뒤로하고 나아가는 인생의 앞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입니다.
이처럼 종종 사람은 메마른 광야 길을 홀로 던져지는 고통의 순간이 있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처럼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은 고통의 순간에 처하게 되면, 포기라는 두 단어가 입에서 오르내리게 됩니다.
“아! 안 되는 구나.”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동안의 삶을 정리하게 되지요.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이끌고 왔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이제 다 내려놓아야지 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것뿐입니까?
앞으로 삶을 열어가야 하는 험난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환영 받을 곳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는 슬픈 인생에 빠지면 우을증이 덮쳐와 만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들은 어떻게 해결해 왔습니까?
실지로 저에게는 그런 수많은 날들이 있어 왔습니다.
매 순간이 그런 환경에서 헤매며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그런 고통의 삶이 나를 엄습하여 헤어 날 수 없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 영혼더러 여호와를 앙망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고 무수히 되 뇌이며 말하지만 확신을 가지지 못한 영혼은 나를 안정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너는 여호와만 바라라.
그의 능하신 일을 기억하며.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을 그 물에 몰살하신 것을 기억하며
광야에 길을 내신 여호와를 기억할 지어다.
여호와는 전능하시어 너의 삶을 인도하실 것이니
너는 그만 바라고 그의 은택을 노래할 지어다.
내 영혼아 여호와 그 이름을 찬양할 지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이런 신학적인 지식이나 하나님에 관한 많은 지식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집을 떠나 광야를 걷는 야곱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 선하게 비취는 것 같습니다.
그의 목적은 아버지 이삭의 뒤를 잇는 족장이 되어 부족을 호령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그 길을 가로막아 서서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지략과 능력으로는 결코 에서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무능을 슬퍼하면서 밧단 아람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고, 한곳(벧엘)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서 광야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광야 한가운데에서 유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서의 추적을 피해 들판에서 잠을 잘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어떤 부족들에게 들어가 잠자리를 청했다가 에서의 추적으로 잡히게 되면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 다니는 사람 곧 범죄인처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골라 피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다시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한구석에서는 희망이라도 있으나 우리의 인생들 가운데에는 야곱보다 더 비참한 운명의 날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의 밤은 깊고 희망의 별빛은 반짝이지 않으며 어디에서 누워도 불안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막힌 가슴에는 천근 만근 되는 무거운 그 무엇이 억누르고, 두통은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어지러우며, 숨막히는 아픔을 이길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고 맙니다.
정말 길이 없을 까요?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뿐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야곱과 같이 돌 베개를 배고 광야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에서 좌절하고 낙심한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알고 계시고 여러분이 처한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결코 안전한 삶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과 진지하게 대화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분에게 마음을 열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도움을 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무너진 의지
야곱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기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습니다. 이제 그는 앞만 보고 가야 했습니다. 뒤에서는 형 에서가 분노하여 자신을 반역자 혹은 모반자라고 처형하기 위해서 추격할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돌이킬 수 없습니다. 천리만길 앞길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입니다. 아무 의지할 대 없는 외로운 길을 우글거리는 시랑이 같은 도적떼들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여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에게는 목적지라도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목적지 조차 없는 캄캄한 어두움에 처해져 있지 않습니까?
아무런 방향도 없이 무거운 부담을 등에 걸머진 체로 오늘 위기에 처하게 될 고통스런 시간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목적 없이 내리 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을 전하는 저 역시도 여러분과 같이 어두움에 처해있습니다.
앞을 보아도 목적지가 없습니다.
길을 나서자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사람인가?
오늘 여기에 왜 있어서 삶의 고민하는가?
이 어두운 밤에 몸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잃어버린 인생의 비참 앞에 우리는 한없이 쓰라린 실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 베개를 베고 하루를 유숙하려는 야곱의 마음은 한없는 아픔과 후회가 몰려왔을까요?
아니면 장자권을 쟁취한 기쁨에 취해 아직도 자기자신을 직시하지 못한 승리감에 도취된 상태였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야곱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나타나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엉겁결에 정신 없이 집을 뛰쳐 나온 그에게는 자신의 상태로 인하여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으로 인해 한없이 슬퍼하고 후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 놓고 유숙할 곳이 없어 들판에서 돌 베게라도 베고 잠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없이 괴로운 마음이 짓누르고 있는 그는 돌 베개를 벤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그의 눈에 천사들이 하늘을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야곱의 꿈이 오늘밤 여러분의 꿈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직접 임하기를 기대하는 생각을 가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의 대상자들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극적인 꿈만 기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 야곱의 꿈이 여러분의 꿈이 되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앞으로의 날들을 야곱처럼 살고, 나아가 야곱처럼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야곱과 같이 적극적인 삶을 통하여 다음에 있는 일도 역시 야곱의 인생과 같은 삶을 살고,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어디를 가든지 도움을 누리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발걸음을 재촉할 일만 남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두움에서 보이는 희망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그곳에서 야곱처럼 여러분의 인생과 싸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두운 밤을 지내고 있습니다.
돌 베개가 우리의 피로를 풀어줄 유일한 안식처일 뿐이었습니다.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아득하고 두려운 땅에 우리는 홀로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아무런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지만 이 어두운 밤이 우리에게는 축복의 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을 마치기 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발걸음을 살피시고 간섭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밝아오는 아침에 새로운 세계를 열고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오늘 우리에게 놓여진 일은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희망도 없는 보잘것없고 초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리브가의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루시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고 오래 전 선지자들을 통하여 충분히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꿈보다 더 큰 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야곱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대 없는 절망스런 피를 물려받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들입니다.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관계없어서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아무런 약속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에 관해서는 우리와 거리가 멀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와 무관한 것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으로서 쓸모 없고, 결국에는 지옥에 버려지는 비참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장자권을 얻어야 하는 그 집착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과 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장자권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깊은 신앙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았으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자기 부족의 종교가 일반 종교와 같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후사를 얻기 위해 온 마음을 장자권에 두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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