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곱1, (창세기 28:10~22)
이에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을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띠끌 같이 되어 네기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네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두 종류의 삶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에게 분명한 선택이 있는 구별을 성경을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입니다.
가인, 이스마엘, 에서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총과는 거리가 먼 인간적인 관심으로 세상을 살았던 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아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 즉 하나님의 관심을 세상에 드러내 주는 삶을 살게 합니다. 아벨로는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드러내 줍니다. 여기에서 반대로 가인과 이스마엘, 그리고 에서는 세상의 삶을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산다는 점에서 뚜렷한 아벨, 이삭, 야곱과는 뚜렷한 구별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가인과 이스마엘 에서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을 조명하는 지식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관계에 있는 그릅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분명하고,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이 항상 계셨고, 하나님을 향한 종교로서 제사와 경배, 독립된 부족의 정신인 하나님 뜻과 통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열심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조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순수한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작정으로 말미암은 아벨과 이삭과 야곱도 태어날 때에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동일한 죄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들이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작정되었다는 것을 사람의 판단으로는 구별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지식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판단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이삭과 야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경의 의도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죄의 정욕으로 태어날 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그들을 작정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들에게서 더욱 분명히 계시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형태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현격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와 같은 입장에서 이 글을 접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그 들과 같은 입장이라면 이 글이 도저히 읽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을 관심 있게 읽어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로 읽어 내려가다가도, 어둡고 캄캄함이 내리 눌러 말씀을 읽으려는 의지가 사라지게 되거나, 결국은 다른 세속화된 다른 창들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글들이 더 잘 이해 되어지며,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영혼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시고 진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러분은 야곱과 같은 하나님의 조망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야곱처럼 장자권을 얻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 장자권은 부족장이 되는 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입니다.
사도 요한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3:11”
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영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읽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는 장자권 이었으나 실지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권세는 여러분도 야곱도 알지 못한 권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여러분은 획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손에 쥐고 세상을 살아야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살고,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손에 잡힌 것처럼 새로운 목적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 목표가 여러분을 이끌고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지성에 진리를 가지지 못하여 다소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신앙의 삶을 기대하지만, 여러분의 지성에 진리로 채워지면, 이 세상에서 아벨과 같은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살 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값진 희생이 많은 형제들의 영혼에 진리의 빛을 밝혀주게 될 것이고, 그 빛에 의해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본을 보이신 보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야곱은 단순히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장자권을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나타나 말씀하셔서, 그 말씀에 의해 야곱에게 단순한 생각에 붙잡히게 했고, 이를 목적으로 삶을 살게 했고 그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낙담,
야곱은 장자권을 가졌으나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형 에서를 물리치고 반란을 일으켜 자기가 부족장의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을 말하면, 아버지는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기 때문에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버티고 서서 부족장이 되겠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게 될 것이고, 이후에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통상적인 절대적인 룰이 도전 받게 되는 혼란을 야기되는 모본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어머니 품에서 자란 연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혼란에 도전할 만큼 세력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력을 기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장자권을 얻음으로 인해 엄청난 위험이 밀려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꿈꾸던 장자권을 손에 쥐었으나,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힘은 자기에게 없는 통렬한 슬픔이 그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권리의 축복을 받기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장자권을 얻는 것 보다 누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자기 혼자 결코 이겨나갈 수 없는 길이며, 절대적인 권위자이신 부족 종교의 신이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하고 곧 바로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자유와 평안과 행복이 다가와야 하는데 어려움이 다가오는지 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욕하기 까지 합니다.
어려움의 원인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 사단의 패권 다툼에서 패한 사단의 분노로 인한 간섭이라고 신비주의적 사고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이 우리의 삶을 양분하여 지배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세력 안으로 치우치자 이를 시기한 사단의 농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는 인간 자신의 선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사고에 의하면 신들이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지배하려는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 성경적인 사고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고는 기독교안에 아주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사람은 죄를 지어서 사단 편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기를 끌어가게 되자 사단이 시기하여 재앙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생각이 많고, 자신에게 닥쳐온 어려움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억울한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할까요?
우리의 근본은 성경적이지 않고 비 성경적인 사고체계가 먼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사고로 인하여 이기적일까요?
그것은 철저한 무지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신앙하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 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흔히들 불신앙자가 신앙을 가짐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우리의 삶 속에 그 일이 있도록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일들이 어떤 일이든지 위험이든지 아니면 행운이든지, 각자의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위험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딪힌 위험인데 때 마침 개종으로 인하여 어려운 일을 만남으로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변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가 개종 한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반드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 상당수가 그런 일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지식을 상실한 상태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가진 지식이 얼마나 거짓되며, 그것들이 우리를 어두운 곳으로 이끌고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우리 스스로 무지로 인한 위험과 환난을 자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지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환난과 위험으로 몰아넣고 고난을 당하게 합니다. 그것은 철저히 우리 자신의 결정이고 우리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은 우리가 지닌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 마귀가 우리를 해롭게 할 생각으로 올무를 쳐놓고 기다리다가 걸려 넘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획득한 이후에 자신에게 벌어지는 형 에서와 비극적인 상태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닥쳐온 위협으로 인하여 크게 낙심하고, 가족을 피해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로서, 곧 에서의 분노와 위협이 자기가 장자권을 탈취하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자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칼날이 자기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음을 깨우치게 되었고, 자신 스스로 그 위협을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지식을 지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식은 본래 장자권을 얻으려는 지식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얻으려는 의지로 행동에 옮길 때 항상 에서의 위협을 함께 지각할 수 있고 인식 되어지도록 했었으나 그 지식들이 야곱에게는 무지로 감추어져 있었다가 새롭게 인식된 것입니다.
소생
낙담한 사람을 소생해야 합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해있고, 낙심하게 되면 사람은 새롭게 소생하지 않고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위협이라는 지식이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두렵고 떨며 자기를 보호 하려는 생각으로 인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온통 위협에 대처하려는 생각에 몰두하게 됩니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까지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자기를 지배하는 그 지식의 세력이 약화되기 전까지 사람은 평화를 잃고 안전하게 살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관계로 맺어진 사람은 더욱 새롭게 태어나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동자같이 그를 지켜 보고 그가 크게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을때, 그를 소생시켜 주셔야 합니다. 낙심한 상태로 그냥 두면 그 사람에게는 소생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결코 없습니다. 이런 능력은 인생에게 감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은 생물체로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자율성에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때에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생할 힘을 주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희망을 주셔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을 되새김
우리의 무자비한 양심으로는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은 정정 당당하게 아버지의 힘을 등에 없고, 에서를 몰아내고 이삭의 뒤를 이어 부족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사람의 타락된 지식에서 나오는 양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뿐만 에서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났을지라도 이삭의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도 언급하였고(롬9:13), 유대인들이 에서(에돔) 족속들과 구별하여 야곱의 후예들을 사랑한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에서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편경과 선민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사랑하시는 것은 이삭의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에서가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해도 그들이 완강히 거절한다는 것을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서가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장자로 태어나서 장자의 권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안정된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나이 많게 되자 자연히 장자권에 합당한 권위를 물려 받아 부족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물려 받은 부족장의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겠습니까?
그는 한 씨족을 대표하는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의 말에 모든 수하들이 무릎을 꿇고 그의 명령에 이유를 달지 않고 복종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대를 이어 충성한 사람들이고 이삭에게도 충성한 대를 이은 사람들로 이제 에서에게도 충성합니다.
여러분은 에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에서가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 말하기 이전에 그의 위치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겠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은 부족의 장입니다.
종교적으로 신의 대리인입니다.
그는 언제가 신을 앞세워 자기의 부족을 다스려 가고 대외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섬겨온 부족의 종교를 신성시하고 잘 경배하고 잘 숭배하여 모시는 것은 그의 임무이고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숭배하지 않고 부족의 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면 그도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자기 부족을 지켜 주시기를 소원하고, 자기가 부족을 잘 다스려 안전하게 이 땅에 보존되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마땅히 아브라함과 이삭에 의해 배운바 대로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신앙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받으셨을지라도 에서는 자기가 드린 제사와 경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숭배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도 역시 에서의 전통적인 종교적 숭배만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야곱에게는 달랐습니다.
장자권을 얻은 야곱,
인생의 노정이 아닌 장자권을 가진 자로서의 노정을 가진 야곱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 비록 정욕의 아들로 에서와 한배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으나 신분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선택이 있었는가 하면 에서는 순수한 죄로 말미암은 정욕으로 아들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출생이 다른 야곱이 세상의 질서에 매여 있었습니다. 야곱은 세상질서에 속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곧 에서와 함께 거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는 장자권을 가지고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 장자권은 부를 누리는 부족장의 장자권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그들의 섬기는 신의 인정을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장자권 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와 에서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살펴 본다 하더라도 야곱이 장자권을 받아서 나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던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에서의 수하에서 부족의 한 일원으로 남아 형을 잘 돕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종교는 세속화되어 이스라엘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애서에게서 야곱을 독립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의미를 여러분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조력자가 되시고 여러분을 이끄시는 분이 되시려고 오늘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에서의 집은 안식처처럼 편하고 안정된 곳 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곳은 아닙니다.
그곳은 종교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예언도 있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약속도 있으나 그 집은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이 거할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는 혼돈스런 상황을 만납니다.
정통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어디인지 혼란스런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루살렘은 정통적인 유대인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으며, 예언자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작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다를 까요?
여기저기에 이단들도 많고 이상한 기독교도 많으며,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지극히 세속주의적인 기독교,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운 정통신학의 가면을 쓴 기독교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가진 자만 아는 이름, 어머니 하나님, 이머징, 신 사도, 판타스틱, 뉴 메시아, 사람을 놀라게 하는 단어로 불려지지 않으면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천국을 제집 드나들듯이 제 마음대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말감을 금으로 만들고 하늘에서 금가루가 내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서 천국은 왜 다니며, 왜 쓰러지며, 하나님께서 예수 외에는 보내시지 않았는데 왜 왔으며, 어머니는 뭐고, 새로운 사도는 왜 필요 한지, 값비싼 금을 왜 땅에서 힘들게 캐내려 하는지 도무지 혼란스럽습니다.
모두가 자기들이 옳다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교회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항상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곳을 찾아 갑니다.
자기 중심의 신학과 교리가 있는 곳,
인간 중심의 신앙과 자아실현이 있는 세속주의,
신비주의와 기적을 주장하는 왜곡된 신앙이 있는 그곳,
우리는 이처럼 비정상적인 곳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판단 하십시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메시아들이 같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정통과 전통을 강조하고, 많은 메시아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말구유에 누우신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진리이셨고, 그 진리가 사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강단에 진리가 선포되지 않으면 그곳은 어두운 곳입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과연 어디로 가야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기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네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이때 야곱은 돌 베개를 배고 잠자고 있고,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산을 가지고 있고, 전통과 정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 에게서 나왔습니다.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더러 하는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정통성은 바로 에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어떤 관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는 버리셨고, 다른 하나에게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
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하나만 선택하셨습니다.
이전 역사를 볼 때, 최초 사람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와 이삭이 있습니다.
가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련함은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정통과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모시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야곱은 배반하고 온갖 거짓으로 속여서 아버지로부터 당연한 에서에게 주어져야 하는 장자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비정상적이고 반 도덕적으로 볼 수 있는 야곱의 행위를 마땅히 비난 하게 됩니다.
우리의 판단은 당연히 에서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곳이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곳이라고 판단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에서는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에서가 이처럼 버림을 받았다는 성경의 깊은 사상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최초사람 아담에게, 가인에게,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야곱에게,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오시는 방법은 항상 일정하십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 오셔서 지각되시고, 인식됨으로 오시는데, 그 오심은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하나님의 말씀(계시록 19:13)이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말씀으로, 말씀에 의해, 말씀을 보내심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 19:13절에서 드러내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고, 사람에게 생명(요6:48, 14:6)이셨습니다.
에서에게는 전통과 정통은 있으나 진리가 없었습니다.
진리는 야곱과 함께 에서에게서 나와 야곱과 함께 벧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으로 드러내셨고, 에서에게는 드러내지 않으셨음을 기억하시고, 진리가 없는 모든 정통과 전통으로부터 큰 회개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셔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시는 축복이 지금 여러분의 영혼을 향하여 말씀으로 임하신 것을 믿으시고, 외로운 인생의 여정에 홀로 어두운 밤을 맞이하는 쓰라린 인생길에서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의 영혼을 깨워 여호와의 말씀에 응답하라고 강력히 촉구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짐으로 아브라함이 말씀을 받고 말씀에 따라 믿음의 조상으로 산 것 처럼 여러분에게 새로운 시작의 삶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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