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십자가
이제 저는 분문을 주제로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설명보다는 핍박자요, 박해자였던 사울의 회심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을 조명해 보면서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왜 십자가가 핵심인가?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로 했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난 지식이 진리임을 알고, 그 중심에 있는 십자가의 지식으로 존재하는 사람에 관하여 창조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심에 관한 단순한 창조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을 바라볼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조명하셔서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심으로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감상적인 고통과 고난의 삶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거나, 아니면, 최선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공생애를 사셨던 것에 대해서 인간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 그 저주와 고통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극한의 인내를 요구한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성인의 모습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감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감동하며, 위대한 성인을 우대하듯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섬기기도 하고, 종교성으로 다가가 그에게 경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람들이 어떤 상태로 당신 앞에 나와 경배하는지,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의 신념으로 드리는 그 신앙 행위를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가 감상적이거나 아니면 인간적인 존경의 경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나중에 왜면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시게 될 것이나, 복음의 말씀이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말씀의 지식대로 조명받아 인식을 갖고 십자가를 본다거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 조명하심에 의해 지성에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 생성된 지식에 의해 지각된 인식을 갖게 된다면, 주님께서 얼굴을 대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의 뿌림을 받지 않았거나 새겨지지 않았다면, 결코 진리대로 십자가를 아는 지식을 갖지 못합니다.
세 개의 십자가,
골고다의 언덕에 있는 십자가는 세 개였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였습니다.
좌우에 각각의 강도가 매달리고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있서서, 두 강도를 양옆에 있게 하는데도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도록 하는데 있어서, 우편 강도의 회심으로 낙원을 허락 받은 것과, 좌편 강도의 완악함과 끝없는 그리스도를 향한 대적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드러난 신자와 불신자 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배치는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운데 십자가에 처형하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어떤 규칙이나 명령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였는데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규정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건들이나 혹은 특별한 행위가 덧 붙여진 것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은 의미를 가지고 처해진 상황에 의해 어떤 행위들을 하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일들은 모두 진리와 연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본 생명과 죽음의 진실,
그로 인하여 자기에게 나타난 죽음의 삶과 생명의 삶,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전혀 다른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자기의 노력으로 얻으려고 발버둥처야 하는 율법의 의와 의 자체이신 그리스도,
거짓과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 생의 길을 달리하는 운명적인 사건이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에수님을 만나자 마자 가 아니도 오랜 후에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만난 그 십자가를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하는 과제를 앉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반드시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자신을 보고, 함께 고통을 느끼는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오른 쪽에는 강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처형을 받게 되자 비난을 했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중풍을 낫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 그 사역에 관한 소문이 온 유대에 퍼졌기 때문에 얼마든지 들었지만, 그런 기적을 행하신 자칭 메시아라 하는 사람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고소로 말미암아 같이 처형을 당하는 것은, 그 선한 기적들 이면에 또 다른 자기가 알지 못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이 있었거나, 거짓선지자와 같은 행위를 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기와 같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면서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억울한 표시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강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 때문에 예수에 관해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 중에서도 예수로 인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을 보고 뭔가 달리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의 무리가 다가와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하는 말이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는 것(마27:39~41)을 보았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도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복음서에 의하면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던 것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좌편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하자 그를 꾸짖고 책망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는 열두 사도중의 한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으며,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알지 못보고 듣기만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증언의 신빙성에 관하여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지만,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간접 증언을 확실하게 듣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을 증언한 사람은 십자가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신뢰할만한 사람의 증언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누가가 이 증언을 확실하다고 믿고 기록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누가의 증언으로 볼 때 우편 강도는 범죄로 인하여 죽어가면서 마지막 인생의 여정에서 진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는 죄의 열매이며 정욕의 자녀로 유기자가 가질 수 없는 영혼의 변화로서 성령께서 조명하시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의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아주 작은 지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성령의 조명에 의해 그의 영혼에서 말씀이 조명함으로 인식의 변화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편에 있는 이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바라보고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였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저지른 사람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으로 판단을 받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해로운 사람이라는 판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원을 얻은 걷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 곧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 때에 이세상에 태어나도록 계획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강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창조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는 무지에 속한 타락된 사람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을 모르고 창조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일평생 강도짓만 하고 살다가 마지막 운명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조명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반면 좌편 강도는 흉악한 죄를 짓고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비방하는 말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편 강도와 좌편 강도를 통해서 죄로 말미암아 정욕의 아들로 태어난 두 종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태어났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유기자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조상이 되를 짖지 않았을 경우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살았을 것이고 죄의 굴래의 삶을 살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곧 조상이 죄를 짖고 정욕을 일으켜 자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에 자신도 죄의 열매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죄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조상이 죄를 짖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죄를 짖지 않았을 것이요,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의 근원을 살펴보자면 강도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최초 하나님의 아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짖고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잉태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강도와 같은 죄의 열매입니다. 두 강도는 죄의 열매로 인생을 살면서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다는 이유로 인해, 동일한 근원을 가진 죄의 열매들로부터 자비를 얻지 못하고, 고통스런 처형을 당하는 것이지만 실지로는 처형한 사람이나 처형당한 강도나 죄를 행하는 대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책이 없이 마구잡이로 죄가 정욕을 한없이 일으켜 죄인들을 생산 해내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모든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장 이후의 세상은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고 혼란스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으로 세상은 대 공황이 밀어 닦치고, 사라져 가는 인류의 종말 앞에 엄습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세기만 지나가면 세상은 시랑이가 우글거리는 텅빈 죽음마져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은 어떤 한가지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짖고 난 이후 곧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대표적인 유기자인 가인과 택자인 아벨을 낳게 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도 이들을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정욕을 일으켜 유기자와 택자를 낳을 수 있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죄의 열매들,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낳은 자녀들은 유기자나 택자의 구별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 택자의 자녀와 아브라함 외의 모든 사람들을 유기자로 구별을 하심으로 세상은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택자와 유기자라는 뚜렸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둘은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동일했으며 그 근원은 죄의 정욕이었었습니다.
죄의 본질에 관하여 우리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
죄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생물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는 원인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생성한 자기지식이었고, 곧 악을 행하는 자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대로 살도록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해줍니다. 이 진리의 지식으로 행하는 행위는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선하다’고 했습니다. 선과 악 그것은 결과적으로 죽음과 생명의 열매들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지 않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 지식으로 활동하고, 생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아 생성한 지식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정욕은 결코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을 낳을 수 없습니다. 택자들도 인류의 조상이 타락함으로 인해 죄의 정욕에 의해 죄의 열매로 태어나고 여기에 유기자들도 동일한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아니한 탄생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느니라(요 8:44)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열매는 죽음이고, 우리의 삶은 죽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주간에 확실히 들었고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듭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사도는 주님 앞에서 생명 없는 자신의 삶을 보았고, 그 삶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한 순간, 번데기가 나방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자리가 다메섹 도상이었고, 여기에서 사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려고 보냄을 받은 사람과, 자기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가운데 서서 군중들을 동요하고 있는 생명 없는 자신도 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치는 모습도 보입니다. 당장이라도 돌을 집어 던질 것 같은 군중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는 결정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완악함은 예수께서 비유하신 포도원 농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죽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입을 수 없습니다.
본질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지식은 말합니다.
‘생명은 죽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이 거짓된 자기지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자기지식에 빠져 있습니다.
사울이 본 것이 바로 생명은 죽을 수 없다는 지식을 성령의 조명에 의해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동기를 얻은 것입니다.
죄의 값
죄 값을 치르려고 한다면 죄의 원인이 무엇이고, 죄의 결과는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은 지식에 의해 드러나고 지식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을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하여 지각을 갖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쉬지 않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일컬어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분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한 로고스를 “말씀, 혹은 "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라고 교회에서 설교로 언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헬라어로 로고스는 “말 혹은 계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어떤 의미로 “일”이라는 의미를 덧붙이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전혀 의미를 포함될 수 없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말씀이신 로고스의 사상은 요한 계시록 19:13절에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에 기간 동안 자주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관계하여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들이 사도에게 확신을 가지도록 한 사건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인 계시록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사람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요 5:24, 요 14:10,24)라고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말씀이신 분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으며,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으며, 세상에 생명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것은 죽음만 존재하는 세상에 생명을 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에게 죽음을 씌우시고 새롭게 생명을 심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 사람에게로 가서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범죄하였고,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그들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한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타락한 우리의 조상을 향하여 감사 해야겠지요. 존재하는 영광을 그들의 범죄 때문에 우리가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생명 없이 태어난 우리가 죽어야 하고, 나아가 영원한 고통에 처해져야 한다는 비참에 빠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인데, 우리는 존재만으로 기뻐할 수 없는 운명에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은 우리의 뜻 대로가 아닌 죄가 일으킨 정욕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원인에 대해서 여러분은 이미 잔소리처럼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정욕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들의 분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대적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을 이세상에 있게 한 죄의 정욕에 대해서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 죄로 말미암아 자신도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욕을 일으켜 죄의 열매로 탄생하게 한 것 때문입니다.
결국은 죄를 미워하는 것은 정욕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도 정작 죄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죽이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스스로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은 후 모든 것이 자율에 맡겨진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선택하고 행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만약 심판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미 심판을 포함하신 말씀을 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불순종에 대한 결과는 차후에 일어난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나타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금지한 과실을 먹는 그 순간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고, 그들의 지성은 어두워졌으며, 그들에게 있었던 모든 생명의 활동이 죽음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죽음은 즉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었고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들은 정욕을 일으켜 두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죄의 열매로서의 생명이 없는 삶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인식하여 왜곡된 하나님을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대적하였으며, 아벨을 미워하고 질투한 것은, 가인 자신이 느끼지 못한 영혼의 분노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지어 정욕을 일으켜 자신을 낳아 결과적으로 영원한 비참에 처하게 한 것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즉시 죽게 된 것입니다.
이제 원인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면 해결방법도 알게 됩니다.
원인에 대한 역으로 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믿지 않음으로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생명을 심을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 우선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결과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자기의 죽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죄로 인한 원망과 슬픔 때문에 자기 스스로 결과적인 죽음으로 죽는 다면 그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지 않은 사람이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죽었다면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는 것은 죽음이 죽는 것이 당연한 결과적 죽음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죄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죽어서 값을 치러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범죄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야만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옷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죽음이 없는 생명뿐인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충분히 자신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분노로 예수를 가장 극한 처형 방법으로 죽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십자가는 뭔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사랑했었습니다.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진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는 아픔을 생각하면서 큰 동정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아파했었습니다.
물론 이런 감정도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진정으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지식으로 십자가를 경험하는 동정심에 대한 아픔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이전에 이미 사람이 죄 용서를 받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레위기 4장에서 속죄의 제사에 관한 규레를 가르쳐 명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그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려거든 제사장 앞에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에서 잡고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리고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 단 아래 쏟고,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 불사르는 제사를 드리면 죄를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는 사람이 짖고 짐승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만약 죄지은 사람이 죽으면 그를 다시 살릴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생명을 받으시고 사람을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피 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은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에게 사람의 옷을 입혀 사람이 되게 하시고 예수의 생명을 받으시고 사람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어떤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을 정하셔서 규칙으로 하셨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달리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서 나타납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의미를 부여했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가지셨다는 것도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께는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게 있습니다. 곧 그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생명을 사람들을 위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죽음뿐인 사람에게 생명을 심으시려면 심겨진 생명이 온전히 성장하고 자랄 수 있는 옥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옥토를 만드는 작업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으면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자기가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성과 회개 그리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제물을 향하여 내리쳐 죽여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며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이 짐승이 죽었습니다 깨우치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십자가의 고통에 함께 동참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이 불쌍히 여겨주지 않아도 되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손에 칼을 들고 예수님을 향하여 내리쳐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죽으시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그 악한 마음을 드러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분에게 있었던 생명을 빼앗아 얻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요 6:48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해주시는 그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웃으시고 그런 마음을 가진 우리를 미워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긍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이십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것은 생명이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자신의 희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을 의지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긍휼히 여길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는 그야말로 잔인한 짐승보다 못한 더러운 죄인인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더러운 마음으로 긍휼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곧 더러운 동정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살을 먹어야 하고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그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그분을 때리고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며 돌로쳐 죽이며, 왜면하고 거절하며 능욕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잔인하게 죽인 죄인들입니다.
그것이 이방인 로마 군병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동정심 때문에 울지 말고 우리의 완악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그 비열하고 매정하며 잔인한 죽음의 행동으로,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죽이고 피 흘리는 것을 즐겨하는 악한 자신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무지가,
그를 죽게 했고,
우리의 손이 그를 쳤으며,
우리의 완악한 눈이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장본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것이 죄의 값은 이렇게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의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바울의 십자가를 설명하라 하면 이 본문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이 장면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울과 같은 완악한 마음으로 죽음의 삶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대 변혁의 삶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이 말씀을 외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핍박 자였으며,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신에 관한 지식도 전혀 없는 그야말로 무지의 덩어리뿐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본문에서 사울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영혼에 이 말씀이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나의 영혼에서 찬란하게 조명하여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모든 문제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생명도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만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졌던 그리스도의 증언인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은 많은 은혜를 누리셨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지성에 문제가 표상으로 반영되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하시고, 그리스도에게서 비춰지는 진리의 지식이 문제를 밝혀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해결점을 발견되게 합니다.
죽음과 생명을 말씀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해주시는 성령에 의해 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정욕의 아들인 죄인으로부터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지성에 새겨짐을 받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전에 생명이 없었을 때는 삶의 목적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목적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을 살까?라는 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거짓된 지식으로 활동하는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성령께서 생명의 말씀을 조명하셔서 진리대로 지식을 갖게 하신 그 지식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존재라는 영광의 관을 쓰고 태어났으나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이라는 저주받을 운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대신 받으사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할 지어다.
그의 은택에 즐거히 노래하며, 그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은혜에 감사할 지어다.
티끌과 같은 나를 부르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지식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즐겨하며 노래하고.
그의 하시는 신기한 일에 영광을 돌릴 지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주시는 창조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노래할 지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십자가를 새겨지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이 십자가를 우리의 영혼에 조명하셔서 바울 사도가 보았던 비밀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고 우리의 죄가 그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시려고.
목청 높여 우리를 부르셨으며,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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