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2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4)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믿게 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철저하게 율법의 의를 자신하고 있었던 자신이 깨어졌다는 증언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이 증언으로부터 예루살렘 안에 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회개하기 이전에 가졌던 죽음 관한 개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분명이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마땅히 죽어야 하는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난 후 부할에 관한 소문이 있었고, 급기야 온 유대와 다메섹에까지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유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후 부활소식과 함께 예수가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사울과 유대 예루살렘의 공회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헛된 것을 따르고하나님의 의를 멸시한다고 여겼고, 무리들의 지나친 추종이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퍼뜨러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세례를 받고 예수께로 개종한 사람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결국 예수에 관한 모든 소문들은 유대를 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믿는 충성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 아벨을 죽이려고하는 가인의 악행을 경고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악행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를 보았고, 분명히 자신들이 죽게한 나사렛 예수임을 알고 놀라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으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소문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며, 하늘의 보좌에 계셔서 자기를 만나 주셨으니, 그토록 콧대 높은 자칭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 지식에 관하여 혼돈스런 상태에 이르렀고, 자신의 삶과 종교가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바울이 알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먼저 죽음에 관한 의미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죽음의 시작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부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고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이 멈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주장과 구별됩니다.
성경의 주장이 옳다고 하는 사람과 과학의 주장에 따라 확실히 증명된 사실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과학의 입장으로 볼 때 성경의 주장은 전혀 납득이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다른 주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가 있기까지는 보류해 두기로 하였든지 아니면 신뢰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과 성경은 서로 다른 근원으로부터 지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일치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식이고, 과학은 사람의 지식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의 대립에서 갈등을 겪고, 어느 지식이 옳은 지식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연구해본 결과 그 동안 주장해 왔던 진화론의 입장이 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연주의자들의 주장과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청취해 보면 그들의 주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지식이 주어지는 것은 환경과 오랜 시간 변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문자와 소리를 통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게 되었다고 하고, 창조론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지식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생성할 수 있도록 지으셨다고 합니다. 진화과정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된 것과, 창조자가 피조물인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고 하는 두 주장을 살펴보면, 원인이 다른 구 근원으로부터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현재 자연적으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사람이라는 주장은 공통된 결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주장은 결과론적으로 사람이 자연스럽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거나 지음을 받았고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으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닭이 먼저인가? 아니면 알이 먼저인가라는 끝없는 논쟁을 일으킬 뿐입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든지 사람이 자연스럽게 지식을 생성하는지 결과론을 파악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실험 방법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사람이 없는 곳, 사막이나 초원, 아니면 무인도 섬에 방치하여 그의 삶을 살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 놓여진 사람에게 나타난 반응은, 자연론 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의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 같이, 사람이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존재 되었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홀로 남겨져 무서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 사람은 언어와 지식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오래전에 이미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부득이한 환경에 의해 태어난 어린 유아가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자 늑대가 어린이를 물어다 성장시켰다는 실재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들려왔습니다. 그 가 늑대의 젖을 먹고, 늑대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게 되었고, 결국은 늑대와 같이 짐승처럼 산 모습을 목격한 목격담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한다면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기의 환경에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 늑대소년의 이야기로 이미 증명된 샘입니다
과학적 입장에서 “생물이 살아서 숨쉬고 활동할 수 있는 힘. 곧 생물과 그 활동”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F엥겔스는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 양식이다”라는 말에서 물질대사를 생명 현상의 기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정의가 주장하는 것은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 대사는 효소라는 단백질이 주체가 되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인데, 물질대사란 끊임없는 물질의 출입과 변화 그리고 이에 수반 되는 에너지의 전환 및 출입을 경험하면서 일정한 평형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생체론에서 이러한 동적 편형과 계층 구조를 생명현상의 특징으로 보고 있는데 동적 편형이라는 의미는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붕괴(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생과 사는 표리 일체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생물이 활동하지 않고 효소 활동을 역으로 하여 부패되는 것이고 이러한 죽음은 생물체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상태로 돌아 가버리는 것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죽음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모든 자연에서의 생물들의 죽음은 이처럼 존재했던 개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개체에서 생식의 과정으로 분리되어 나온 새로운 생명체가 이 세상의 자연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옛 것을 사라지고 새것이 왔으며, 그 새것도 다가올 미래의 새것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생물체이며, 이 생명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변화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비록 개체로는 사라졌으나 사라진 그 개체가 남긴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의 나아가는 큰 생명일 뿐이고 사람도 우주라는 큰 개체에 속해 있는 하나의 작은 개체로서 유기적으로 우주를 위해 존재하다가 결국 더 나은 우주로 함께 변모해 가는 한 유기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
이 이론은 매우 진리에 입각한 주장과 같습니다.
이 이론에 의한다면 오늘 우리는 우주가 자기를 형성해 가는 한 과정에서의 시간의 한 단위를 잇는 가교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생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생명을 이어줌으로 전체의 한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생명체의 역할을 다하고 우리의 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커다란 우주라는 존재를 이루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고 그 개체가 생명적인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적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주라는 전체의 생명체 덩어리가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연결하는 가교로서 한 생명으로 태어났을 뿐이지 우리가 전체의 생명에 주체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서는 죽음이란? 전체 생명을 위해 생명 전달의 사명을 마친 후 자연히 해체 수순으로 돌아가는 개체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여 전체 생명이 부패에 이른 것을 진정한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생체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도 전체 우주 생명이 하나의 개체 생명이고 전체의 우주 생명을 위해 하나의 생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진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단순화하면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전달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생명을 잘 전달하여 우리를 함의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생명체에 활력을 공급하는 것 뿐입니다.
과학은 물질의 한계 범위를 벗어난 비물질의 세계를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범위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은 증명할 수 없고 감각되지 않은 부분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의 상상이 지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러셀과 같은 20세기의 과학분석철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사람이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사람을 구성하는 기억과 습관들이 새로운 사건 환경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 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억과 습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활동함으로 의식을 갖게 하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으로 일정한 경험에 의해 뇌와 신경체계라는 특정 물질 구조에 적응 되고 모든 기억은 여기에 저장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정부 활동과 자본주의 정치의 한 중심인 미국과 유럽인들에게 미친 비 종교적 사고는 이미 전세계의 지식인들을 감화시켰고, 그 지식이 현대 젊은이들의 지식을 광범위하게 침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무지 몽매한 종교적 기술과 종교라는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한 미신적인 유혹에 현혹되어 불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신념의 산물을 의지하는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우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폄하한 것에 세계가 미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주장에 대해 납득할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함으로 결국 기독교를 미신과 동일한 종교로 치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자신의 심신에 초자연적인 감화를 통한 치료를 위해, 마치 아름다워지기 위해 피부관리 서비스를 받는 것과 같은 최고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정신 에너지를 보충하는 서비스로 취급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사람의 주장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는 자기가 실현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연 이상의 세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아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일원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이 가진 목적되지 않은 목적에 부합하고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곧 자기를 지으신 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존재에 관한 것도 사람이 상상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최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찍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석철학자들은 원인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결과론적입니다. 생명은 있고, 그 생명이 에너지를 스스로 방출하여 활동하고, 그 결과를 분석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있게 하는 원인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생명의 원인은 결과적으로 앞에 존재했던 생명이었고, 그 생명도 역시 전전의 생명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지금 존재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생명이 없이는 생명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활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에너지가 발생하였고 그 에너지에 의해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 활동이 환경에 의해 지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해 온 것 뿐입니다. 이 주장은 끝없는 시작에 대한 의문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지만 결국 생명의 시작의 근원은 알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파린의 가설을 인용합니다.
오파린은 이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여 번개, 자외선, 열 복사 와 같은 에너지가 합성되도록 하자, 조성된 그것에서 변형된 단백질이 생성되었는데, 그것이 효소였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효소가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의 가장 기본 단위인데 이 효소들의 집합체가 생물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에서 그들이 명정하게 분석해내고 있는 모든 과학적인 분석에 결정적인 결함을 내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것을 “제 1원인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장하면 매우 골치 아픈 결론에 까지 도달하고, 필연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상태로 빠지게 되는데, 그 주장을 반대하는 과학도 필연적으로 믿을 수 없는 함정으로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과학은 제1원인론으로 자신과 함께 창조론을 불신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가 “좋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고, 제1 원인론 자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했을 때, 장구한 논리로 원인과 결과를 반복하며, 그 주장의 끝에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말을 마쳤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창조론자는 승승장구 하여 ‘하나님 이외의 원인은 없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분명하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불신자들의 의식에서는 순식간에 창조론자를 무너뜨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느냐?”
창조론자의 충격과 말을 못하고 얼버무리려는 태도가 선명하게 예견됩니다.
아! 답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제1 원인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하나님의 존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제1원인은 더 이상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외에 그 원인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성경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창조론자의 이 주장이 스스로 제 1원인이 없다고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1 원인은 하나님이상의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원인을 근거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곧 바로 기독교인은 회의에 빠질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그토록 신뢰하던 신앙으로 성경을 진리로 알았던 그 신앙이 산산 조각나고 부서지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파린의 과학적 실험’이 진리일 수 없기 때문에 가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시작은 원시환경에서 변형된 단백질의 효소가 생성되었고 그 효소가 생명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 환경, 곧 무생물인 원인물질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물론 이것은 생명의 시작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시작을 묻는 말이기 때문에 같은 생각일 수는 없으나, 모든 물질들의 시작은 과학적인 주장으로는 빅뱅을 들고 있습니다.
제1원인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종교인이 역으로 과학에 질의를 한다면 그 빅뱅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과학은 결과적 상황을 탐구하여 추구해가는 것이므로 끝없는 결론, 곧 물질이 생성된 무한한 시간이 지난 후에 여러 번의 생명의 과정을 거쳐 환경에 의해 변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원인을 찾지 못하고 그 원인을 찾았다 하더라고 신뢰할 수 없는 가설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가장 이성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설에 자기의 생명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제1원인론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가설일 뿐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 역시 생물체의 일종임으로 생물입니다. 이 생물은 수세기를 거쳐 환경에 의해 효소들의 서로 집합 혹은 분할을 거처 거대한 생물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거대한 우주를 형성하는 또 다른 생물체의 한 유기적 존재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생물체의 한 단위인 생물인 효소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는데 생물이 어떻게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되는지 그 시작, 곧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 정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의식을 가지고 물질 대사를 위한 선택적 물질을 흡수하여 생물체를 유지하고 아주 미미한 지적인 지각을 가진 것인지 말하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람으로 생물체를 구성하는 존재로 성립된 된 이후 환경에 의해 그들의 자동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들이 있고 많은 동물들이 있는데 유일하게 사람에게만 이런 지적인 상태를 가질 수 있는 원인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사람의 뇌세포가 다른 짐승들의 세포보다 발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려면 과학의 입장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이 주장하는 입장과 과학의 입장을 대조하고 성경에 굴복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새 새명을 입게 되든지 일단 그들이 성경의 주장을 긍정적인 이해를 갖도록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과학자들을 향하여 마땅히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을 외면하고 하나님과 창조 자체를 부인한다고 저주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비 신앙적 자세를 견지하고,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지적이지 못하고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미혹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멸시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리더자들은 과학으로는 어떤 지식의 방법으로든지 결코 자기 지식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 노력을 위해 많은 지혜자들이 도전을 해야 합니다.
지혜 있고 현명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 보아도 하나님의 교회에 현명하고 지혜를 가진 명철한 젊은이가 나타나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들을 해 왔습니다. 중세시대 이전에 모든 지혜자들은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에 물들어버린 타락의 시대에 지혜로운 주님의 종들이 나타나 교회를 개혁시켜 세속으로부터 탈출시켜왔고 교회를 정화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종을 교회에 보내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지혜로운 젊은 종이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해 낼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가져오는 충성된 종들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향한 피나는 노력으로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과,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에게 알게 하는 최고의 지식을 최고의 현자이시고 하나님의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든 아니면 창조론이든 어떤 이론으로도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에 관한 지식을 밝힐 수 없습니다. 과학의 입장으로 현재 사람의 상태를 신뢰하든지 아니하든지, 사람에게 처해진 무지의 상태, 필연적으로 죽게 되는 운명적 상태, 사람을 활동하게 하는 후천적 지식 습득 등,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모든 지식들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들이며, 이것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으로도 사람이 자기의 경험으로 얻은 지극히 제한된 작은 지식으로 크고 광할한 우주로부터, 작고 미세하며 단순한 생물들의 출현의 원인과, 근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조건에 의해 스스로 생성하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되어 있는 죄의 본질들이기 때문에 무지와 결함이 없는 순수지식을 가지지 않고는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된 사람이든 창조된 사람이든 과거나 현재, 그리고 까마득한 미래에 이른 사람이라도 사람의 상태로서는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는 결코 완전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소위 진리라고 주장하는 모든 지식들이 연구를 거듭하거나 진화를 거듭할수록 사람에게 생성된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이 차지하는 범위는 커지고, 제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진리라고 믿고 있는 지식들이 진리가 아니라는 증명들만 속속 밝혀질 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지식 자체가 진리가 아니고,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함의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와 진리와의 결합, 혹은 연산, 분석적 통합으로도 더 큰 무지와 결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결국 완전한 진리의 지식으로 진리를 찾을 수 없는 현 상태이든지, 아니면 이전의 상태이든지, 사람은 자기 지식으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만 얻을 뿐입니다.
성경적 의미이든지 과학적 의미이든지 죽음의 참된 정의는 무엇인가?
과학적 의미로는 활동이 멈추고 생물이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거나 없어지는 것이고, 성경적 의미로는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생물인 육체가 활동을 멈추고 영혼은 지음을 받은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결과적인 상태로 육체가 썩어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점 외에 두 주장으로부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생물이 없어져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외에 서로 다른 주장으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샘입니다.
그 평행선은 영혼의 존재에 관한 상반된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독특한 전재가 있습니다. 묘하게도 성경적 입장, 아니 창조론자라고 하겠습니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과학자에게만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 보면,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은 생물이 활동을 멈추고 흙으로 사라지는 것이 끝입니다. 창조론은 과학자들의 주장을 동의하면서 존재하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창조론자들의 입장대로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죽음의 정의입니까?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과학자들의 주장과 다는 것은 영혼의 존재 유무일 뿐, 이것이 진리의 지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존재는 과학자들이 영혼은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덧붙여진 또 다른 주장일 뿐,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현재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장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학의 주장도 옳지만,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한가지를 더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 일 뿐입니다.
이런 것으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속임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사울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기에 과학자들이나 창조론자들에게 공통으로 선포하는 낡아지지 않은 요구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우리의 인식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울이 자기의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 앞에 꼬끄라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는 감각을 가졌을 때, 수십년 동안 살아 온 본성이 철저하게 부셔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은 철학이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재였고, 자신에게 분명히 보여졌습니다.
그가 본 죽음은 자신이 살았다고 생각하였던 삶, 죽음은 이후에 있을 인생의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곧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늘로부터 내리 비취는 빛을 보고 꼬그라질 때 죽음의 삶인 본성의 삶의 등불이 꺼저가고, 새로 태어난 삶의 생명이 들어온 것입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있으며,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참된 창조의 세계가 보였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앎을 가진 진리의 세계가 열린 하늘문 사이로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가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었던 지식들의 무지와 결함부분이 채워지고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알았던 모든 지식과는 전혀 다른 이전에 알았던 모든 지식들의 오류를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앎으로 콧대 높은 예전 지식을 보니 배설물과 같은 구린 내나는 것들이었습니다.
과학이 무엇이며, 창조론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창조론을 열정으로 가지고 전하려고 한다고 해도, 거듭나지 않은 창조론이 생명이 있겠습니까?
사울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다메섹 사건이 자기에게 생명을 부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게 되었고, 십자가의 거룩한 삶이 자기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까지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항상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배반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롬 7:24)
죽음은 이따금 생명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죽음은 과학적 의미로 사라지는 것, 창조론에서는 영혼이 떠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알게 된 죽음은 ‘이미’ 였습니다.
참된 죽음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생명의 시작으로부터 죽음이었던 것이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기까지 이르는 전 삶이 과학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자신에게 생명이 있음을 주장하지만, 그 생명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삶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생명에 부여된 질병입니다.
이 질병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결핍이며,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예수는 죽으셨다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죽으시면 다시는 살수 없는 죽음의 상태인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본 예수는 하늘의 보좌에 계시고 죽으셨던 분인데 살아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정의를 짐작이 되어가고 우리 영혼의 지성에 이 지식의 밝은 조명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말은 지금 현재로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는 말은 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죽은 상태로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존재하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음의 삶을 살 뿐, 때가 되면 죽음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한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지식을 이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살아있다고 하는 그 사람을 “죽음의 삶을 사는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 지식을 이해 한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사건 중 가장 놀라운 사건은 자신이 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생명뿐이었습니다.
예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할 때에는 이와 같이 예수에 관한 선명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꼬끄라지고 예수님의 음성이 그의 육체에 감각 되어지자 보지 못한 생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곧 지식이 그의 영혼에서 밝게 조명해 준 것입니다.
그 지식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울의 영혼에 새겨지자 그 말씀의 지식이 조명하여 예수님을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의 지식을 가진 사람, 곧 영혼에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울의 증거인 성경을 통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그 지식이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을 지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놀란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죽음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는 예전에 자신이 죽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것을 아는 지식은 자신 안에 새겨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말씀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지식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겨진 지식에 의해 죽음의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나 고매한 철학자들이 이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부러 버렸고, 이 지식을 미련하게 여기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멸시하고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우쭐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합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의 분노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미움과 분노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에 관한 모든 진리를 외면하고 가까이 하지 않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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