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기둥

하나님의 아들2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2)

생명있는 신앙 2012. 10. 4. 18:18

하나님의 아들2 / 22:8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2)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와 관계를 중심으로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주제의 말씀의 본론으로 해서 들어가고자 합니다.  아마도 이번 시간에는 서론으로 피조 세계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신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죄와의 관계에서  왜 예수이어야 (하나님의 아들) 하는지,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살펴 봄으로 주제에 관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피조 세계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당신을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두 가지의 큰 주제를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핍박에 관한 것이고, 두 째는 예수께서 당신의 출생에 관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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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첫 번째 주제에서 아주 신앙의 큰 교리적인 핵심들의 의미에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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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바울인 사울이 핍박을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로 여기고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가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
사울과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그가 알고 있는 예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된 이단자로 보였습니다
.
예루살렘 성전을 비방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관원들과 서기관들을 비난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집단들이라고 하셨고, 율법을 거스려 사는 집단이라고 매도하기도 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라고 했으며, 바울이 깨우친 바에 의하면 율법의 의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므로, 근본적인 유대의 종교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르침으로, 로마로부터 나라를 독립해서 하나님의 뜻인 위대한 왕국으로서의 메시아의 나라, 곧 세계로부터 빛 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메시아의 진정한 사명인데, 예수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단시 했던 것입니다
.
바울 자신도 이와 같은 생각이 바뀌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 스스로 동일하게 변화되는 것을 볼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게시된 지식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되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기독교의 참된 본질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성경에 게시된 상태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규범으로서의 잣대가 아니라 살아계신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도구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 시간 사람에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새겨질 지식들인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말씀하셔서 그 말씀으로 사람의 영혼에 사람을 위한 지식을 주셔서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하시는 도구로서 성경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과학이 모든 진리의 잣대가 되듯이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식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본문을 증거하는 그 장소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고소를 당하는 내용이 곧 예수를 미워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싫어하는가? 에 관해서 알아야겠습니다.
어느 때나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기독교를 부인하고 기독교와 반대되는 생각들을 갖고 태초부터 대립적이었습니다. 인류의 최초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가인과 아벨에게서 뚜렸하게 나타났으나, 근대에 이르러 형이상학에 대한 이론들의 증상에 대한 증거 등을 확보하기 곤란함 등을 들어 역사적 사실 등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과학이나 고고학적인 확실 있는 증거들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확실한 증거들을 찾으려 노력하고 과학적인 도구들은 요구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인류의 확실한 과거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적 증명에 의한 확실한 증거들이 나타나기 전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아쉬운 상황이 반복적으로 계속되어 구원받는 사람보다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나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인류에 대한 꾸준한 자기발견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시조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경이 주장하는 것을 가감 없이 수용한 후, 그 증거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내세우고 기독교의 일원으로 가입한 수많은 사람들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조건 선택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한 그릅이 되어 기독교를 옹호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을 대변해 보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주장은 사람이 요구하는 과학의 잣대로 진리의 표준을 확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하나님에 관한 인식을 갖기 위해 과학적인 잣대로 증명을 얻어 하나님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진리를 찾아주는 표준이라고 생각하고 종교도 과학적인 증명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까지도 과학으로 확인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진리로 진리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영안를 주셨습니다. 그 영안에서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어내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변화와 같은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12사도와 다른 제자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영안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나타난 영안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안개가 걷힌 맑고 깨끗한 세상을 볼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영안으로 새로운 인식 가지게 되었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솟아 올라 마음에 새겨졌던 것입니다
.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시기 이전에는 메시아에 대한 다른 개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메시아로 인한 자신들에게 견고한 입지가 세워지고 세상이 자기들을 향하여 주목할 새로운 희망을 가졌었던 것입니다. 그런 인식이 예수에 대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의 변화를 바울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이 믿음은 인식이 준 결과였습니다
.

이런 잣대로 보았을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서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아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저주를 받은 불가사의한 사건이 이해될 수 있는 근원적인 사고로서 사람에게 부여된 지식에 대한 두 종류가 분명하게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를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인식하는 지식,’ 둘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지식,’으로 인식하는 지식입니다. 

1), 예수를 사람의 자연적 본성으로 인식하는 지식,

사람들의 자연적 본성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 사람에 관한 지식과 창조 자연에 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혹은 하나님의 용모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의 지성에는 그가 보거나 음성을 들은 내용을 조명해줄 지식이 없기 때문에 본 사실을 사실인 하나님으로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세상의 자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고 모습을 보이시며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본다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 세상의 중심이며 지배하는 로마, 최고의 사상과 학문의 꽃을 피우는 헬라철학 등이 산재해 있을때 예수께서 역사의 한 중심의 획을 그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아주 잘 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히브리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소수의 선지자들 뿐이었고 이들에 대해서는 한결 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
사람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에 대한 분명한 지식도 없으며, 특히 자기 자신에 관한 분명한 지식도 없습니다. 하나님, 종교, 창조, 사람에 관한 지식은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지식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지식이 있어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목적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없으면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제 멋대로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연적 본성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이런 사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의식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
진정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가? 아니면 의식이 없이 헛된 인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가
?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의 불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고,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함으로 사람들이 죄를 덜 짓고, 더 덜 악한 세상이 존재될 수 있으니 있는 것으로 하자라고 생각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경의를 표하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자연적 본성으로는 하나님에 관하여 인식을 가질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종교가 주는 유익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식에 종교에 합당한 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실지로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있다는 의식을 설정한 것으로, 신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이렇게 창조된 신이 부족이나 혹은 부족 연합, 그리고 나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인 종교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환경에 의한 보호 혹은 안정적인 의식을 가지기 위해 자기 안에 창조되었다가 여러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유대교가 국가의 정통 의식으로 변질해서 실지로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의식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처음 시작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인식으로 확실히 각인시켜 인식되게 했었습니다.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각종 이적 가운데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 등, 대를 거듭하여 나타나 주셨던,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선조들의 믿음이 전승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자 사람들의 의식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셔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으나, 후손들에게는 나타나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증언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 증언을 조명하셔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승되어졌습니다
.
이들이 태어날 때 조상들로부터 믿음을 유전적으로 물려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자기 영혼의 지성에 지식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고, 부모나 선조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믿음의 지식을 듣거나 혹은 선조들의 믿음의 행위를 오감을 통해 경험하므로 믿음은 교수 혹은 전승 되어지고, 이런 과정과 함께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진 조상이 자기의 믿음을 자식들에게 전승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자식은 자기에게 믿음이 전승되지 않았으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믿음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주시지 않았거나, 자기의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지 않았거나 교수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 책임이 없는 불합리한 원인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의 출생이 자기의 뜻은 아니고,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이 자기의 노력의 결과의 유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출생은 믿음을 가진 부모들의 죄의 행위인 정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죄의 열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있도록 계획하신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죄의 정욕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은 탄생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와 죄의 열매인 정욕의 후손으로 구분 되어지게 됩니다
.
아담의 후손, 가인과 아벨
,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이삭
,
한 어머니에게서 쌍태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
이들 모두가 죄에 속한 부모들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하나는 버림을 받은 자로 다른 하나는 계획에 의해 태어난 자로 구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로서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욕은 죄의 행위이지만 이것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의 열매들을 낳는 결과는 낳는 부모에게 있고, 존재를 입은 죄의 열매인 사람은 반드시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필연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
그럼에도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에 있어서 불완전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
비록 정욕의 열매이지만 창세전에 계획에 의해 태어난 선택된 사람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완전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은 탄생에 있어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구분이 없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죄인의 후손인 이방인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야곱 때부터 히브리인 곧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출생한 것처럼 선택 받은 사람과 유기자가 구별이 없는 한 족속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자와 인식 할 수 없는 자로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비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이 말씀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도 요한이 확실히 증거하기는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1:3)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이 말씀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생명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를 표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셔도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결론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원인은 자신 속에 하나님의 지식인 말씀이 없고, 성령의 조명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기 이전
,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
,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기 전
,
모두가 가진 공통점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뿌려지지 않았고,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관한 말을 듣고, 성경을 읽을 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생명이 되지 않거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지식.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과 인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의 경우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을 때, 그의 영혼에 본 것과 들은 말씀이 그의 영혼에 새겨지게 되었고, 그 새겨진 지식들이 그의 영혼을 조명하게 되자, 예전에 가졌던 자기 지식, 왜곡되고 잘못된 지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곧 예전에 알았던 모든 지식들에는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어 있었고, 그 지식의 조명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지만 필연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에 대한 지각된 의식으로 살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지식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사람 자신에 관한 모든 지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가 만남으로 경험한 그 하나님을 인식해줄 지식이 그의 영혼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각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 하나님을 본질 그대로 조명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게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나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가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에게 없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하신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라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인식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곧 가인이 인식한 하나님은 자기 개념에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드러난 확실한 개념으로는 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지역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에게 인식된 하나님은 어느 한정된 지역에만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떠나 놋 땅에 거주하여 자기만을 위한 성을 쌓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으나 그의 의식 속에서 인식된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의 타자 곧 의식에 의해 인식이 가능한 존재였을 뿐,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태의 존재로 그를 피하여 떠날 수 있고 숨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공격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사물이나 존재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지으셨으나,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성되기 위한 지식의 조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가졌습니다.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는 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지각을 가짐으로 의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지각 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만난 경험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그 하나님은 자기 의식 속에서 하나님일 뿐이었고 실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도는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고백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
사도에게서 이런 미움의 감정이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시점에서 사도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 8:28에서의 가다랴 지방에서 예수님을 만난 귀신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
그의 말에 관심이 있습니다
.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하기까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보여줍니다
.
마태의 기록 순서에 따르면 마태는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지도 안았습니다
.
자신의 비참한 운명과 같은 절망스런 상황에서 나타난 메시아의 진위를 파악할 겸 예수께서 나타나신 장소에 자주 발걸음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
이때까지 마태는 정신이상자와 같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
그가 본 사건은 이렇습니다
.
예수께서 가다랴 지방에 가셨을 때, 그곳에는 귀신 들린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
그 두 사람이 예수님께 나타났고,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
여기에서 마태도 놀랐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비록 귀신이 한 말이지만 그 의미는 간단하게 넘어갈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
” “son of God”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모든 사람들의 삶이 평안을 잃은 상태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임하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어 자기를 평안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들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냈을 때, 세상은 그 아들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꾸몄습니다
.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아들에게 경배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유대 왕 헤롯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베들레헴의 마을에 군대를 보내 2살부터 모든 어린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
그 죽은 어린이들을 헤롯 성에 던져졌고, 또 하나의 성을 쌓았습니다
.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싫어합니다
.
이런 환경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 죄를 범하여 모든 사람이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이 죄에 빠짐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
죄인이 된 사람들의 상태에 관해서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1]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그대로 유전되는 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들에 관해서는 별도의 시간에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죄인 된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의 관계를 살펴 보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가요?

사람들이 죄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도 기쁜 일이 아닙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원수 관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관계로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의 역할을 담당하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알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부름을 받은 이후 성령 안에서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요, 신학적으로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
2
위 하나님으로 성자 하나님은 보이시는 하나님으로 사람에게 오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
또한 그가 오셔서 죽으신 것은 최초에 지은 원죄에 대한 대속의 속죄와 만물을 새로 창조하시는 일을 위해 몸소 실천하신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
바울은 그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으로부터 그의 영혼에 경험되어 인식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자신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청사진이 새겨지듯이 그의 영혼에 하나님으로 새겨진 지식을 생성하여 감성으로부터 지각하여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만남으로부터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최초 사람에게 에덴 동산에서의 약속은 모든 복음의 원초 복음이었던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
모든 성경의 내용들이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동산의 각종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너희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7”라는 말씀이 이 명령이었고, 말씀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제시 되었기 때문에 이를 시험하려고 주신 열매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오늘까지 죄에 관한 대표 사상이니, 성선설, 시험에 관한 이론 등의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이론 들이 진리라면 우리의 영혼에는 결함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
진리는 어떤 의문과 의혹이 느껴지지 않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표 사상과 시험 설에 관한 이론들은 많은 의문과 의혹들을 가지고 있어서 진리라고 보기보다는 신앙에 있어서 결함을 가지지 않은 지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에 두신 것은 사람에 대한 시험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관한 불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시험하셨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 곧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창조를 하심으로 의미에 있어서 매우 불합리한 요건들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가 동산에 있어야 하는 것은 완전한 창조 세계에 필연적인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반드시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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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에게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아주 쉬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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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사라지게 되고 사람은 자기 지식으로 살아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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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선악과는 일회성 시험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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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후손들에게 주어졌을 것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하와와 동침하여 후손을 낳게 되어도 그 선악과는 에덴 동산에 그대로 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야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를 아담이 먹으로 너무 일찍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에게 나타난 반응은 그들의 영혼에 어두움이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사람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들이 있었습니다. 그 지식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종교)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한 모든 지식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주어진 지식이 없었으면 사물과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의식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식이 없는 짐승과 같이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혼은 바로 육체를 가진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있고, 지식으로 살도록 결합시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게 하는 그 지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분명한 지식들이 업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 좌절하고 부족한 진리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여 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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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하였습니다만, 진화론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나 한결 같이 사람은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존재임을 믿고 있습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한 동족으로 함께 어울리며 살기 위해 환경의 영향에 따라 자연적으로 지식이라는 것이 생성되었다고 하는 반면, 창조론자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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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지식을 가지는 것은 육체가 사물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그 감각을 영혼에 반영합니다. 영혼은 육체가 감각한 감각(이를 표상이라고 함)을 반영하면 그 감각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완전한 지식이 조명하여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의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합니다. 이렇게 감각에 대하야 생성된 지식은 다시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육체가 동일한 감각을 가질 시 이에 관한 지식을 다시 생성하는 반복을 하지 않고 곧바로 인식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된 지식을 의지기관인 전인의 마음에 반영하여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사람은 지식을 더 이상 생성할 수 없고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감각적인 존재인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금과를 먹으므로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영혼에 즉시 어두움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들이 깡그리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범과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는 범과 하게 한 지식이 새겨져 영혼의 지성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사람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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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께 대하는 지식, 창조에 관한 지식, 사람 자신에 관한 지식을 함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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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는 죄를 범한 불순종에 관한 지식과 불순종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생성 되었던 지식만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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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감정적인 욕구를 재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들이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이 가인이고 아벨 입니다.

정욕의 열매

우리는 가인으로 많은 신앙지식을 얻었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얻은 정욕의 열매, 곧 죄의 열매였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나타난 반응은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만물에 관한 지식도 없고,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 곧 사람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영혼에 관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이지만 영혼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영혼은 사람에게 지식을 생성해주는 육체와 결함 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육체가 있는 것은 알지만 영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서 깨어지고 기능을 잃게 될 때 영혼의 독특한 기능에 관하여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존재하고 자신에 관하여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영혼은 자기가 태어난 상태의 지식을 그대로 물려 받았고, 미래 자신이 영원한 지옥으로 처하게 될 모든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태어나게 된 근거와 그리고 그 결과에 관한 지식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영혼에 의해 이 세상에 수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영혼이 이르게 되는 비참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와 분리되어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실을 유전으로 물려 받은 상태로 태어난 영혼이 육체와 함께 교통한 상태로 사람이 태어난다면 이 세상은 죄의 열매, 곧 정욕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들의 분노의 폭발로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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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죄의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의 열매들은 반드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고 이들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져 그 말씀에 의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하나님의 복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복음에 의하면 열매를 먹으면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이미 아셨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일들과 이 땅에 태어난 수많은 죄의 열매들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으로 사람의 영혼에 말씀을 심기우는 모든 비밀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셨습니다.

여기에서 땅에 태어나게 될 수많은 죄의 열매들에 관하여 관심을 집중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죄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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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죄의 열매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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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사람도 죄의 정욕에 의해 열매로 태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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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지 않은 유기자들도 죄의 정욕에 의해 열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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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더니

죄의 열매로 태어난 우리는 죄의 정욕으로 인생을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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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범죄하여 죄의 정욕으로 죄의 열매인 우리를 낳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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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본성에서 완전히 멀어진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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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확실히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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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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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태어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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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한 영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18:4)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여 지으신 후 이 둘을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둘을 합하니 육체는 감정을 영혼은 지성을 담당하는 기능적으로 역할을 하고 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고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하여 하나의 기관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전인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진정한 본성은 육체나 영혼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형성되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마음이 사라짐으로 사람의 전인기관이 사라지게 됩니다. 영혼만으로 마음을 형성하지 못하고 육체만으로도 마음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전인기관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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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육체나 영혼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지 못함으로 사람과 관계를 가질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 일찍 이생을 떠난 우리의 조상들의 영혼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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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에게 아직 마음이 있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지각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곧 영혼과 육체 결합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은 지성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이고 육체는 감각을 가지고 감각하고 있으며 마음이 있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근심을 드러내고 타락의 본성인 미움과 원망과 각종 탐욕들이 일어나 타락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한번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범죄한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사람은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는 가인과 같이 순수한 죄의 열매로서 유기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반드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계획에 의해 탄생한 사람입니다.
선택과 유기자는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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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혼이 단독적으로 자기의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을 드린 바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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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 전인으로 살아 있게 되면 육체가 영혼의 존재는 느끼고, 영혼이 육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갖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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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이렇게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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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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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로서 영혼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가지지 못합니다. 이는 육체가 영혼에 대한 감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육체가 영혼에 대한 감각을 가진 상태라면 천사와 죽은 자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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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타락 이후에 마음이 있어 전인으로 살아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의 존재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함으로 자기에 관한 지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영혼이 스스로 자신을 감각할 지라도 사람으로 행동하게 하는 지식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감성으로 감각하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보내어진 지식을 지각하는 일입니다. 영혼의 지성은 육체에서 보내어진 감각된 표상이나 이미 생성되어진 지식들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여 감성으로 보내어 지각하고 그 지각된 지식을 지성에 보내 저장해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인 기관인 마음으로 반영시켜 전인으로 육체에서 지식에 따라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감성은 스스로 영혼에서 감각하는 영적 존재에 대한 감각을 가질지라도 자신이 감각한 것을 지성으로 보내어 지식을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영혼과 천사, 그리고 마귀와 사탄에 관하여 감성을 가질지라도 그것을 육체에 반영하여 육체가 감각하여 지식을 가지도록 할 수 있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세상을 떠난 우리의 선조들이 자기들의 의지로 살아 있는 우리에게 의지를 드러내 뜻을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육체와 분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정된 사람들은 본성으로 알 수 있고, 유기자로 태어난 죄의 열매들은 이미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은 선조들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므로 지옥에 대해서 감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서 사람의 영혼은 스스로 감각한 것에 대하여 육체의 감각을 가진 것처럼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천사를 만나고, 선조 조상들의 지옥의 고통을 감각할지라도 그것들에 대해 전인인 자신에게 아무런 지각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영혼은 육체와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고통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의 전인에게 표현하여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지옥의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범죄함으로부터 영혼의 고통이 일어 났고 이 고통으로 사람의 삶은 질서를 잃은 고통에 빠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식이 깨어나는 것은 육체의 감각으로 아담이 지식을 생성할 때 생성되었던 동일한 지식과 같은 감각된 표상을 반영 받았을 때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까지 생성하였던 아주 작은 분량의 소수의 지식을 물려 받을 지라도 그 지식이 사람들에게서 지각되지 않은 것은 동일한 감각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고통

죄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의 영혼은 자신을 알고 미래를 알고 비참한 운명도 알지만 그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4:4)”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55: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6:63)

기독교는 사람의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종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지음을 받았으나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불신자들을 생명이 없는 죽은 사람에 비유하고 있고, 그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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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이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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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고, 요한계시록 19장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두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하였고 성령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글을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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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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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범죄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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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생명 없는 사람이고, 이미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창조세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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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은 이 사실에 대해서 항상 분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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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육체와 분리되면 영혼 자신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직접 들었던 말씀인,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본적인 배경을 이해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설교를 시작할 때 핍박과 나사렛 예수의 출신 배경에 관한 주제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두 주제는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주재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핍박이 주는 의미는 사울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혈기 등등하게 나서서 활동하는 것을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유기로 태어난 죄의 열매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당신의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신 것은 사울이 만나고 보고 상대하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평범한 말씀이 사울에게, 아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말씀이 되는가 더 설명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2. 핍박

핍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관한 장구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타락의 후손인우리 영혼은 우리가 죄의 열매이며 정욕의 자식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타락함으로 인해 창세 전에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날 작정된 사람일지라도 모든 사람은 죄의 열매인 정욕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동일하게 지음을 받은 대로 태어나지만, 작정으로 인한 사람(선택)과 순수한 죄의 정욕의 열매(유기)로 구분됩니다.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유기의 자녀들입니다.[2]
유기 자녀들의 영혼은 자신의 탄생에 관한 근원을 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의 종말에 관한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탄생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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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기자녀
[3]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죄의 열매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근본인 뿌리에서 나오는 온갖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에 관하여 비관적이며 미래에 그들이 처하게 될 영원한 멸망의 지옥은 참으로 두려운 곳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그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혀 있으므로 영혼과 육체의 상호 유기적인 교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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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혼은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철저한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미움과 원망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철저히 적대적이고 원수로 대적합니다
.
그러므로 미움과 싸움이 영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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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의 육체나 전인의 마음은 자기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온갖 타락의 열매들에 관하여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육체가 자기의 영혼의 존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혼의 존재와 감성을 육체가 느낌을 갖는다면 영혼에서 분출하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온갖 죄의 열매들을 쏟아내는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이 세상은 지금까지 유지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혼에서 쏟아내는 미움과 원망이 마구 잡이로 세상을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미움과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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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예수에 관하여 이토록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혼이 아직 중생, 곧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나사렛 예수니라

이 주제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고 증거하십니다.( 8:41).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았다는 표현은 남편 요셉과는 관계 없고 동정녀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 함으로 인해 법적인 아버지 관계만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처음 범죄한 그 순간부터 요구 되어온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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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명령하신 말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나,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범죄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대신하여 죄 없는 다른 사람이 죽어 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자기의 죄로 인한 값을 치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우리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죄의 열매로서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
만약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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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사람에 태어났다가 죽는 것 때문인가요
?
아니면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편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습니까
?
사람들은 사람이 이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세상의 수많은 불평등으로 인하여 존재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해방을 받기 위해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
그러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태어났다가 죽는 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불편한 점들, 존재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압을 받는 많은 일들, 질병과 다양한 고난과 고통들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
그 동안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해 왔습니다
.
세상의 평화가 오고 거짓과 미움이 없는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고, 질서로우며 조화로운 아름다운 세상, 고통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구원을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이런 모든 축복들을 참여 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
정말 이런 것이 구원인가요?

이런 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신앙을 우리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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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3:16)”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성구를 성경의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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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담론들을 뒤로하고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죄의 정욕의 열매, 곧 하나님의 원수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자기의 죄로 죽어야 할 대속의 죽음을 위해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죄에서의 구원은 사람의 삶의 환경과 운명적인 고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음을 받은 사람이 범죄하지 않았을지라도 삶을 위해 고통과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 고난과 고통은 죄악에서의 고난과 고통과 다를 뿐입니다. 전자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해도 충분히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인 반면, 후자에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동반하여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충분한 위협이 도사리고 한번 당하는 위협으로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 후회스런 상황이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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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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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원은 거듭남, 중생을 의미하고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서 그 말씀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탄생, 곧 재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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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예수께서 사울에게 자신을 표현하시면서 언급하신 나사렛 예수니라라는 말씀으로 사울은 그 동안 자기가 이해하고 있었던 생명 없는 신앙으로부터 돌이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1] 성경적 대표사상 : 복음주의 언약신학의 대표 사상으로 죄에 관한 이론이다그러나 대표 사상이 성경적인가? 관한 많은 의문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사상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대표이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를 인류의 대표로 하셨기 때문에 그가 죄인이 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오신 예수께서 아담과 같이 무죄한 자로 오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구원 받은 자의 대표가 되신다는 의미로 대표로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일치 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내포하는 의미론은 수많은 반론들을 잠재울 수 있어야 하고, 이 사상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대표사상이라는 지식에 결함과 무지를 함의하지 않아야 한다이 주장은 실지로 아담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 그리고 후에 태어날 사람들이 죄에 오염된 상태로 태어났다는 주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어떤 사람은 바울의 주장을 문자대로 해석하기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에덴 밖에 있는 죄가 쓰나미와 같이 밀려 들어와 온 창조 세계를 죄로 오염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 주장에서 본 바와 같이 선언적 의미에서 대표자에게 적용된 죄와 그들의 행위로서 나타난 결과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표사상이 성경적이라고 하려면 아담이 자기의 행위로 인한 결과적인 주체자이고 그 행위가 주체자로부터 발생한 결과이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표사상은 '존재 자체는 선하지만 죄라고 선언 된 것이고, 죄의 오염은 선언과는 별도로 죄 자체가 사람을 죄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자가 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셨고, 그 결과로 구원 받을 인류의 대표자가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로적 의미로서 구원이 성취된 것이고, 죄의 오염과 같이 구원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지라도 죄와 구원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어떤 외부적 영향력에 의하여 사람에게 적용된 것이고,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적용적인 세력이나 힘이 사람에게 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복음주의 입장에서 이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지나치게 교리를 꿰어 맞추고 성경이 언약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약과 관계해서 성경을 적용시킨 결과이다

그러므로 대표사상이 언약적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지만,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매우 용인되기 매우 어렵다첫째는 죄와 구원이 세력으로서 쓰나미와 같은 밀물의 의미로서의 죄와 구원의 본질에 관한 것, 아담과 예수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행위 자체들과 밀려 들어온 죄와 구원의 세력과 상관관계(곧 아담과 하와의 죄의 오염과 유무), 죄와 구원의 근원, 이런 것들을 제외한 다양한 물음들에 결코 답할 수 없는 미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대표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가?라는 질문이 있게 된다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다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있다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씨앗이고 그 씨앗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신앙으로 이끈다. (아브라함과 같이)

[2]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 잉여자식(갈라디아 4:22-31/ 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자, 약속으로 성령을 따라 난자, Calvin 은 로마서 9:8절의 주석에서 "육신의 혈통 이상의 장점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을 육신의 자녀라고 해석했고, 주님에 의해 특별한 인침을 받은 자들은 약속의 자녀라고 했다). (블로그, 개혁신앙, 죄의 열매)에서 설명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