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세기 31:40)
기를 쓰고, 애를 써서 수고하여도 얻은 것은 구멍이 뚤어진 전대(학개1:6)를 채우려는 것과 같아서, 소득을 전대에 넣지만 그 소득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림으로 소득에 대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일을 하지만 그 열매는 여름 실과와 같이 보잘 것 없어서 항상 가난에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힘들고 지친 발걸음으로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중독이 되었는지 입은 한없이 먹을 것을 요구하고, 쉬지 않고 뭔가를 입에 넣어 만족을 채우려 하니, 음식들에 함의된 여러 가지 화학물질들로 인해 치아는 녹아 내리기 직전이고, 아직 소화도 되지 않았는데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음식물 때문에 위는 쉬지 못해 노화직전 상태에 있으며, 장에서는 쉬지 않고 중성지방을 흡수하여 초과 이상을 간에 저장하여 무리를 주어 육신이 피곤하고,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많은 중성지방들을 뱃살 옆구리 엉덩이 할 것 없이 온몸을 중성지방 창고로 바꾸어 놓아, 몸의 각 기관이 재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년에 한 두번 하는 건강검진 결과는 “고지혈, 중성 지방초과 위험 관리필요,” 진단은 여지없이 적혀 나오고, 심지어는 당뇨, 고혈압, 운동부족, 게다가 스트레스 위험, 안정필요, 등등의 경고들을 쏟아져 내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에서 건전하고 좋은 정신이 나오고, 깨끗한 음식물(화학물질이 없는)에서 충만한 만족을 느끼게 하고, 좋은 정신이 건강한 몸을 만들게 하는데, 피곤과 스트레스, 열등의식으로 인하여 낮은 봉급 때문에 남들보다 좋지 못한 음식을 먹게 되고, 그런 음식은 각종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몸이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온전한 조절 기능을 상실하고, 피곤을 더하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조급하여 분노를 잘 내고, 창조적인 생각들을 갖지 못하여 더욱 피폐 해져가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려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는 고갈되어 있고 빚은 점점 더 늘어나고 한번 휘어 잡힌 credit card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의 덫에 걸려 돈의 노예로 전략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체온 기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그야말로 수 만 가지의 화학물질이 함유된 담배 연기를 한없이 빨아대고, 맑고 깨끗한 산소를 생산하여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게 하는 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양, 강제로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먹어 쌓여있는 지방간 때문에 피곤한 간을 더 혹사시키는 음주는,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살수 없어서 아리한 정신이 되게 해야만 모든 것을 잊고 잠들 수 있기 때문에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한마디로 망가지고 잊어버려야 편히 쉴 수 있는 뒤틀어진 늪에 빠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입니다.
남들보다 더 힘들게 일하고 스트레스는 더 많이 받지만, 정작 더 얇은 소득 봉투와, 차별 대우와 종종 멸시까지 받게 되니, 사람으로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억울함을 술과 담배가 아니면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좌절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생을 슬퍼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지금 고난의 언덕에서 험난한 인생을 해쳐 나아가느라 지쳐 있지 않으십니까?
도움 받을 곳이 없어 울부짖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힘겹게 보내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이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하고, 저주하며, 존재 자체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자신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향하여 정면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을 육체가 인식한다면 그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의 자신안에 있는 영혼이 울부 짖는 그 저주스런 운명에 대한 슬픔을 알고 울부 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씁니다.
여러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영혼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억제하느라 심한 압박에 의해 터저버릴 것 같은 심장을 부여 잡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글거리는 용광로를 향하여 이끌려가는 MOVING WALK에 서 있는 것 처럼, 고통에 묻혀 아무런 지식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갇히기 위해 시간의 수레 바퀴안에 실려서 이끌려 가고 있는 영혼의 처참함 모습이 바로 우리의 상태입니다.
왜 필연적으로 고통스런 지옥을 향하여 가는 인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까?
그리고 이런 탄생이 선택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적 존재와 같습니까?
그 모든 원인이 최초의 사람, 곧 지음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미혹에 의해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왜면하고, 버렸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원인입니다.
이 운명이 최초 사람 가인과 아벨에게 보였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 중에 보이지 않습니까? 이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떤이는 한어머니에게 태어났고, 어떤이는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 태어 났으나 이들이 다 같이 정욕으로 인하여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죄가 정욕을 일으켜 후손을 생산하게 했는데 하나는 유기자로, 다른 하나는 작정에 의한 선택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인, 이스마엘, 에서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거부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향하여 가두어 지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까?
이제 우리의 운명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니 우리의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저는 이 울부 짖는 여러분의 영혼의 소리를 듣게 하려고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시간이 이라는 수레바퀴가 이끌고 가고 있는 그 수레에서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탑승하고 있는 그 수레의 목적지는 지옥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그 목적지를 알고 울부 짖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수레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장자권이었던 것입니다.
장자권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생명이자 곧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어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는 권리였고, 조부이신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던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에게 중요한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자신에게 조곤조곤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계시로 인하여 야곱에게 필요한 종교적인 열망을 일으켜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로 보아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매력을 가질만한 아브라함 이야기는 당연 갈대아 우르 아버지 데라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소명을 통해 독립하게 된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전히 순종하여 마침내 독립을 하였고, 마침내 거부가 되어 큰 부족을 이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에 따라 100세에 아버지 이삭을 낳았으며, 주변의 부족들이 넘보지 못할 큰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어 지금 자기에게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을 어머니 리브가에게 듣고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남자답고 용맹스럽게 성장했습니다.
짐승을 사냥하고 부족을 이끌고 갈 수 있는 담대함과 지략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을 잘 이겨나가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의 울부짖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생활에 관해서 어디까지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야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오늘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교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종교의 교본도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의를 행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서를 가지고 있었었거나, 전문적으로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다. 데라와 같이 우상이나 여러 종교에 관한 전문적인 사업에 종사하였으나, 종교에 관한 구체적인 철학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시지 않았고,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식들이 전승으로 전해졌으나, 그 전승들이 분명한 자료로 정리되 있지 않았을 것이며, 일반적으로 주변의 여러 부족들의 종교적 의식과 흡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에 있어서 자연 종교인 일반 부족들의 종교적 제의 형식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삶 자체가 종교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삶이 종교의 지배를 근본으로 했을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종교 행위를 가졌을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제의를 행할 수 있는 단을 가지고 있었거나, 다른 부족들과 같이 우상을 가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제의에 필요한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그 무엇이 존재했을 지도 모릅니다.
도덕에 있어서도, 여러 부족들과 별다른 구별을 찾아볼 수 없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인한 어느정도의 규범이 의식되도록 구전을 통하여 교육되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할례와 같은 제의적 행위는 다른 부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부족만 가지는 독특한 의식으로 발전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사람은 그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억누르는 두려움으로 부터 위안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는데, 영혼에게 주는 자유였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의 영혼은 자기가 처해진 비참한 운명의 미래를 해결 받기 위해 울부 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신에 대한 의식을 만들고, 그 의식을 구체화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그 지식에 의해 영혼의 의식 안에서 신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을 의지하여 운명적인 비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중 가장 먼저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에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명없는 영혼의 자기 의식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이처럼 몸부림을 치고 수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영혼과 한몸인 육체는 이런 자신의 영혼의 몸부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라반도 한 부족이기 때문에 별도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삼촌 라반과는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을 갖게 되었다는 기사는 읽을 수 없고, 다만 자신이 대우를 받는 것이 섭섭하다는 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처음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여 거반 한달을 지내며 한 가족처럼 가사 일을 도우고 지냈습니다.
아마도 야곱의 마음에는 형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져 갈등을 잊어버리게 될때 어머니 리브가가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식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하루하루 목적없는 시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초조해졌을 것이며 무의미한 하루하루가 그를 짖누르는 고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다행이 양을 치는 일이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고 있었으니 덜 지루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외삼촌의 딸 라헬은 야곱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는 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생각을 돌릴 수 있었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야곱이 자기에게 와서 많은 일을 거들고 아들처럼 일하는 것이 좋았지만 무보수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걸려 편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네가 내 생질이지만 어찌 보수도 없이 일을 할 수 있느냐, 네가 일하는 대가를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말하라고 합니다.(창29:15)” 그때 야곱은 라헬에게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를 위해서 7년을 봉사할 것을 제안하자 라반의 마음에 아주 흡족한 요구로 여기고 야곱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것은 딸을 믿을 만한 조카에게 주는 것도 좋은데 게다가 7년을 든든한 아들 같은 사내가 집을 돕는 다니 더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꿩먹고 알먹고 입니다.
그래서 흔쾌이 동의하고 야곱이 7년을 봉사했습니다.
야곱이 7년을 봉사하는 기간은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에 수일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형 에서로 부터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간 것입니다.
기한이 지나 라반에게 라헬을 달라고 했을때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을 대신해서 레아를 야곱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에게 온 여인이 라헬이 아니고 레아임을 알고 삼촌 라반에게 항의하자, 라반으로부터 라헬을 줄 것이니 7년을 더 봉사하라는 요구 받게 됩니다.
야곱은 이렇게 레아와 라헬을 얻고 7년을 라반에게 더 봉사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야곱은 여러 아들을 낳았고 가족은 불어났습니다.
야곱의 헌신적인 봉사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하여 야곱이 하는 일마다 형통했고 결과들이 좋아서 라반의 가산이 커 갔습니다.
야곱이 레아과 라헬을 위해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봉사했으나 집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자기의 품안에 많은 가솔들이 생겼고 야곱은 가솔을 꾸려가야 하는 큰 부담을 앉게 된 것입니다.
한 여인을 사랑함으로 보내는 시간동안 꿈과 같은 시간들이 지나갔으나, 사랑으로 인한 열매는 그에게 큰 짐이 되었고, 이제 그 짐을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4년을 한여인을 위해 헌신하고 나니 얻은 것은 정신을 잃고 지낸 동안 얻은 열매들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많은 가족을 얻고 가솔들을 가졌으나 그의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삼촌 라반이 나쁜 마음으로 야곱을 쫓아 내면 라반은 그로인하여 얻은 가솔들과 또는 많은 부로 배를 부르게 될 것이지만 야곱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가슴아픈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정신을 차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자기 집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친척이라고 하지만 남에 집에서 붙여서 살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독립인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라반은 야곱으로 인하여 야곱의 신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복을 주어 그 복이 자기에게 부어진 것을 알고 한창 가산이 풍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야곱을 돌려보내는 것은 자기에게 큰 손해라고 생각하고 함께 더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라반의 말에 기회를 잡은 야곱은, 아무것도 없이 고통스런 상태로 홀로 일어서는 것은 간단하지 않으므로, 여러가지 조건이 있는 외삼촌의 집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 라반과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 계획은 참으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 결과 야곱은 라반의 기반을 바탕으로 삼촌과 구별된 자기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들이었습니다.
라반의 울 안에서 야곱에게 많은 축복의 결과들이 나타나자 라반의 가솔들이 질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야곱이 많은 재산을 자기를 통해서 얻게된 것에 대해서 큰 시기심을 가지고, 라반은 순전히 야곱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계약에 따라 마땅한 야곱의 재산을 독차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나타나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나오던 그 벧엘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기억하게하고 일어나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 31:13)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꿈을 꾸고 야곱은 두 아내를 모아놓고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자 레아와 라헬이 야곱의 말에 동의하고, 야곱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여 그날 모든 짐을 정리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을 뒤로하고 떠나왔던 고향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이 외삼촌의 집을 떠난지 삼일이 지나서 라반은 야곱이 자기집을 떠난 것을 알고 추격하여 달려와서 붙잡고 서운함을 내비취게 됩니다. 그가 야곱을 잡으로 달려올 때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 관하여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셨고, 그 경고를 통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이, 인류의 첫 사람의 아들 가인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다음에 반드시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라반은 야곱을 추적하여 삼일만에 잡았고, 자기집에서 잃어버린 자기가 섬기를 우상을 찾기 위해 모든 소유물을 수색하였으나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드라빔이었고 그 우상은 라헬이 자기의 품에 숨기고 가져온 것이었는데, 라반은 그것을 찾으려고 모든 소유물을 뒤진 것입니다.
수색을 마친 라반은 추격할때 자기를 만난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노라’고 말하고 자기가 추격한 것이 자기 집의 신을 훔쳐간 것 때문이라고 바꾸어 말합니다.
이때 야곱이 자기의 성실함을 몰라주는 외삼촌을 향하여 원망하며, 자기의 정직하게 외삼촌을 위해 일한 것을 변명합니다.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룰도 없이 지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이와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이글거리며 내리 쬐이는 태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수고하고, 밤에는 햇빛을 가린 대지 위에 드리운 추위에 떨어야하는 삶입니다.
시시 각각 변하는 자연과 생활의 환경은 우리의 눈을 편하게 감고 있도록 여유를 찾을 시간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안전한 곳이 없으며, 항상 자연의 위협과 생활 환경에서 투쟁은 위협과 위기 가운데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 이 순간까지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즐겁고 편안한가 싶었는데, 이어서 쫓아온 위협들로 인해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던 날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이어받아 안전한 터전을 잡으려고 쉬지 않고 굴러온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함께 했었던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펴 보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질투하는 수많은 라반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거듭되는 실망을 겪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을 동경했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속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고달픈 인생을 돌이켜 안식 얻을 곳이 어딘지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무지와 결함 때문에 한 순간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 인생에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그곳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었고, 그 지옥으로 인해 존재하는 영광이 슬픔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를 존재하도록 있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증오했었습니다.
미움은 영혼이 자기의 상태를 인식함으로부터 사람에게서 끝없이 분출하였고, 급기야 죄의 열매들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미워하고 서로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영혼의 직접적인 감정에 의한 표현은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에 집접 표현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영혼과 육체가 각기 부여된 기능적 작용 외에 교감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전인으로 자기 영혼의 불안과 공포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추적 할 때에는 드라빔보다는 먼저 말없이 자기를 떠난 야곱에 대한 배신감과 미움이 작용했습니다. 그 미움은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가졌던 질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얼마든지 야곱을 해치울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들을 비롯하여 모든 가솔과 재산들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영혼이 분출하는 끝없는 미움과 분노와 전인의 생각이 일치하여 형용할 수 없는 괴력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하셨으나 가인은 괴력으로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야곱을 추적해 온 라반은 미움을 분출하여 자기도 억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고 우리는 떠나서 계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더러운 손을 내밀어 죄를 지을 때,
쉬지 않은 정욕이 들끓어 욕심을 한없이 분출할 때,
미움과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우리 자신을 죄와 정욕의 노예로 삼을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서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신 것처럼,
“선악간에 판단하여 스스로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경고가 우리의 의식에 양심으로 분명히 새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인과 같이 죄에 노예가 되기도 하지만, 라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죄를 억누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 계시면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미움과 분노를 일으켜 이 세상을 순식간에 파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지나가는 순간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들어 와 우리를 다스려서 양심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인과 같이 우리의 행위를 결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도 선한 모습을 가지고 선하게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비춰져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도록 하신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라반의 경고와 가인의 경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은혜로운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요.
그분을 붙잡으십시요.
여러분의 영혼에 명령하시는 그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요.
잠시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여러분의 영혼은 가인의 영혼과 같은 양심없는 마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멸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요.
여러분에게서 분출하는 미움을 잠재우도록 죄의 세력을 없이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요.
매순간이나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의지하여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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