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생명있는 신앙 2013. 3. 20.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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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가 빚진 자라( 1:14)

헬라인에게나 야만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14)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나도록 계획된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완강하게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논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전지성과 전능성에 대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계획하실 때 그들의 배반을 모르셨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잘못된 것이요, 또한 그들이 배반하는데도 그 배반을 보고만 계셨다면 전능성에 대해서 의문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꿔질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선택된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결국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는가? 그리고 누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가? 라는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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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이스마엘이나 더 정확하게 에서(이삭의 아들로 야곱과 한 태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임에도 유기자로 태어남)와 같은 버림받은 유기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 의해 태어나게 했으며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가족으로 태어났을 뿐 하나님 안에서는 유기자들이고 예수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거의 명목상으로만 이스라엘일 뿐 실지로는 거의 유기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작정된 이스라엘에게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사형판결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시기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상태 일 때 오셔서 이방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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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싸한 답변들이 될 수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많은 신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여기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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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이스라엘은 선택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아들들이면 창세전에 이 땅에 태어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쌍의 부부가 결혼을 한 후 그들이 계획적으로 모든 인생과 후손에 관한 것도 작정하여 계획에 의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낳은 자녀는 그들의 계획에 속한 자녀들인 것처럼,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낳을 자녀들을 순차적으로 계획하여 마침내 그 계획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이 계획에 따라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그 본성이 바뀌어 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작정하시고 계획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계획하시고 지속적인 하나님이 섭리하심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에게서 탄생하도록 하시는 것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결코 바꿔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완강하게 외면하고, 구약을 고집하고 율법을 준행하는 삶을 살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는 이상 결코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들도 죄인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하고 그들은 그 죄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지옥을 그들도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눅 16:19~31 에서 분명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획하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 또한 계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지만,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시고 그들의 선택에 관하여도 철저히 개인적이며 자율적인 판단을 존중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작정에 의해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성령께서 그 진리를 조명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하지 않으시고, 사도의 말에 따라 들음에 의하여 반응하는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셨고, 타락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까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역사하시던 피조물과의 관계를 가지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으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수를 영접하는 그 누구라도 구별이 없이 구원하시기를 계획에 포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도 이스라엘과 이방에 동일하게 섭리하시는데 이스라엘에게는 슬픈 섭리를 이방인에게는 기쁜 섭리를 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창세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을 섭리로 생산하게 하시지만, 이방인에게는 유기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치시는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시고 믿음을 일으켜 구원을 주시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작정된 사람들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합니다.
물론 그 주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정은 아버지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구별된 성령에 의한 구원적 작정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로 허락된 사람들 가운데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들의 수만큼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을 것을 계획하셨습니다(롬11:25).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동안 성령께서 이스라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조명하여 복음을 심어주셨으나 이제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심어 그 복음으로 새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있어서 우연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연히 진리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찾아와 구원을 주시는데 그것이 우연히 복음을 만나는 행운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예는 이렇습니다.
어떤 형제가 우연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고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형제가 전한 복음이 진리의 말씀이었고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복음을 듣는 사람의 영혼에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그의 영혼에 비춰짐으로 새사람이 되었고 복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는 형제 편에서는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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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그 형제를 구원하시려는 작정이 있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그 형제에게 보냈고,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도록 감동하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때 성령께서는 선포되는 진리의 복음을 그 형제의 영혼에 심으시고 그 복음을 조명하심으로 믿음으로 새 사람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 해서 구원적 작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아시고 계셨고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은 작정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작정은 창조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나, 이것을 세분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별하여 작정하셨다고 말하지는 않고, 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에게는 작정이지만 이방인에게는 허락에 의한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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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은 작정과 허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구원사역에 속하는 구원작정인 것입니다.
이 사역에는 반드시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사역으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음이 아닌 인간의 사상에서 합리적인 생각으로 전해진 복음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얼마든지 신앙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토대가 무엇이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복음을 들은 사람은 세속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반면 진리의 복음을 받은 사람은 진리의  신앙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한 의미는 자신을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방인을 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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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의 열매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가졌기 때문에 정욕을 일으키고, 그 정욕으로  두 부류의 아들을 생산하는데 하나는 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어머니 리브가의 태안에 있을때 이미 아셨고,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버리십니다. 이것을 사도는 한 태 안에 작정된 이스라엘로서 야곱을 약속의 아들이라고하고, 에서를 허락에 의해 유기된 이방인으로서 종의 아들이라고 칭했습니다. 또 다른말로 야곱은 작정의 아들로 구원의 반열에 세워진 약속의 아들이지만, 에서는 구원과 관계없는 하나님을 찾지 않은 아들로 잉여의 자식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빚진 자라고 말 할 때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진 빚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한 것을 빚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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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도의 마음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복음의 의미도 알수 있고, 왜 복음을 전하려 하는지, 그리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로마서 1:1~14절을 살펴 보면서 그 의미를 약간 이해되었습니다.
사도는 이방인이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그들은 결국 지옥으로 가는 비극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비참을 경험하지 않을 거이고, 영원한 지옥의 불심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이방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빚인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일입니까
?
지옥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 이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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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십니까
?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여러분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사도가 가졌던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자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정욕을 일으켜 지옥에 갈 자식을 세상에 낳았다는 생각을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불신자들을 볼때마다 우리의 죄(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가 저들을 낳았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된 여러부이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들의 신분을 바꾸어 이방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알고, 자신도 동일한 사람이지만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일평생 고생하다가 또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가게 하는 여러분의 정욕이 생산한 저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믿기만 하면 나와 같이 구원을 얻을 것인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반대로 불신자들의 영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에게 "
왜 지옥가게 낳았느냐" 하면서 증오와 분노와 미움을 표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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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모든 분노를 쏟아낼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미움을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리를 동행하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라"
"달라하면 거절하지말로 주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몸소 그 본을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사도는 이 증오와 분노의 외침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속히 그들에게 복음을 말하여 그들에게 복음이 심겨져 구원을 얻어 증오에서 벗어나도록 하려고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처럼 살고, 그의 명령에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빚졌다고 하는 그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멘

2013, 03, 20

*오늘부터3월 27일 까지(7일 동안)해외 방문 일정으로 오늘의 말씀은 잠시 몇 일 건너 뛸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