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과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롬2:18~19)
이제 우리는 율법의 참된 본질 앞에 서서 그 의미를 살펴 보고 율법이 사람에게 드러내는 감동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어두움에 처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재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일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항상 조명하여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도록 하심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람은 완전한 지식을 갖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 안에 있는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완전함에서 벗어났고 영혼의 지성은 어둡게 됨으로 지성이 생성하는 모든 지식은 불 완점함으로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근대 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많은 곳에서 강론요청을 받고 “나는 왜 기도교인이 아닌가?”라는 강의를 하고 다니면서 수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교회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나 빅토리아 여왕 하에서 두번이나 영국의 총리를 지냈으며,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할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은 율법의 내용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출 23:2)”의 말씀이 그의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1970년까지 92세를 살면서 1950년대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0년대에 서양 신 좌파의 우상이 되었으며, 대중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소크라태스나 공자의 사상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고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점령한 팔레스타인을 돌려주라고 항변하고 이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활발하게 많은 책을 집필하였으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며 금지의 책으로 지명된 여러권의 책을 쓴 세기의 사람이라고 불리우는대, 젊은 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철학 과목을 교양 과목으로 듣게 되는데 이때 접하는 책이 서영철학사이고 이 책을 통해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젊은 이들은 민중의 중심에서 대중의 부조리와 비리 그리고 다수의 악이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그의 사상에서는 AntiChrist 의 사상 강력하게 표출하는데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자극적인 무신론 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글들은 젊은 피를 끓게 만듭니다. 그 사상의 핵심이 바로 율법에서 비롯된 할머니의 가르침인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러셀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는 않았으나 그는 그 말씀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사람에게 드러내는 역할에 관한 분명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율법의 그 깊고 오묘한 의미를 다시한번 살피면서 사도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의미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4절). 놀랍게도 사도가 한 이 말에 대해서 성경은 ( )로 묶어 놓여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 볼 것입니다만, 14절~15절은 사도가 언급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는 이방인에게는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이미 율법과 같은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은 의미에 있어서 다른 점들이 있겠으나 그들의 규범들은 율법이 말하는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과 사람이 생각해낸 규범들이 동일 규칙으로부터 지식을 생성한 것이며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이방인의 규범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한 이방인에게서 나온 양심의 율법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배우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는데 율법을 가졌고 그 율법이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은 행위의 언약으로 한 율법을 아담에게 아담에게 주셨고,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은 그 율법에 의하여 인격적이고 온전하고 정확하며 항구적인 복종을 행할 의무를 부여
받았다.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약속되었고, 율법을
범하는 자에게는 죽음으로 경고하였으며, 아담에게는 그 율법을 지킬 힘과 능력을 부여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금지의
선악과에 대한 명령을 의미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행위 언약과 시내 광야에 거할 때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구별하지 않은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12신조를 신앙고백으로 합니다. 만약 이것을 부인하면 마치 개혁교회와
다른 것으로 배척을 받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약간만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마치 비 기독교인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주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금지의 선악과에 대한 명령과 율법이 다른지에 관하여 고찰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율법을 마음에 새겨진 양심으로 말하였고 이를 이스라엘의 율법과 동일시 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에게 있는 양심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려면 객체에 대한 육체의
감각과 이를 조명하는 자기지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선재 하는 지식으로 본유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이 지식을 갖게 되는데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인식을
가졌습니다. 이 지식들은 하나님의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한 지식이기 때문에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으며 본유지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영혼 안에 지성은 어두웠고 이미 지적인 활동으로 삶을 시작한 사람은 육체의 오감으로 계속적으로 객체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성에 반영하여 지식을 생성하려고 하지만 조명해주는 본유지식이 사라짐으로 부득이 이미 자기지식으로 대체하여 객체을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지만 대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지라도 객체가 가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완전 조명을 할 수 있는 객체가 있는 반면 완전하게 조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이런경우 지성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데 이 지식을 영혼의 감성이 만족한 지각을 하지 못함으로 전인으로 인식할때에도 완전한 지식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완전한 지식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지식이 되고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평온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방인에게서 율법과 같은 양심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율법과 같다면 이것은 이미 사람에게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의 영혼에 기록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유지식의 조명으로만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본유지식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있는 양심의 지식은 본유지식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최초 사람이 본유지식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때 그 지식안에 함의 되어 있는 지식인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생성하는 지식은 객체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을 함의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보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함의되어 있고 지식들끼리 서로 연산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성할 수도 있고 발견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생각들이 혹은 서로 고발하며 변명하며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태낸다(롬2:15)에 분명히 말했던 것입니다. 이로서 이방인이나 타락한 모든 사람에게는 물려받은 그 지식안에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이 함의 되어 있어서 이를 궁구하여 진리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초 사람 타락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한 완전한 자기지식은 단순한 지식 하나만으로도 많은 지식을 함의하고 있었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이 새겨진 양심은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최초 지식이므로 최초 지식이 아담의 영혼에서 생성되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행위언약을 주셨으나 두 지식은 이런 과정으로 인해 하나의 지식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구별되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행위언약과 본유지식이 이처럼 별도로 주어져야 한다면 이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것입니다. 그것은 본유지식은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make for a completer) 주어진 지식이라면, 행위언약인 금과의 명령은 완전한 사람(completer)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사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 언약을 미리 주셔서 지키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어긋난 조화를 드러낸 것이므로 질서와 조화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실때에는 자기 의지로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조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최초 언약과 율법은 같은 것이라고 하고 이를 행위언약으로 보는 것은, 이제 분명히 다른 입장에서 주어진 다른 언약이라는 것으로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율법의 교훈을 받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의 아들로 태어나면서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유지식을 상실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처음 사람의 아들 가인에게 분명히 보여 알게 하였으니,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잘못이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명을 받지 못한 결과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제사를 자기의 멋대로 드리는가 하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판단했고,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한 지역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독립된 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 그의 영혼에 하나님을 알수있는 진리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판단하게 된 원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그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면서 제 멋대로 가인이 제사를 드리듯이 자기 주장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교회를 이끌고 있으나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같이 어두운 세대에는 더욱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율법을 자기들의 뜻대로 지혜를 발휘하여 해석함으로 그 해석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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