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음의 법으로 니라(로3:27) 3,

생명있는 신앙 2014. 1. 7. 06:37

이스라엘에 의하면 사도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나니(3:20)”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니라(10:17)” 라고 말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 행위로냐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믿음이 믿는다고 자랑할 만한 아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지만 실지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 곧 자연의 본성과 전혀 다른 새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위인데, 이 행위를 하는 주체는 우리이지만 이를 드러나게 하는 행위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본성은 타락했고, 그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게 하는 새로운 역사, 곧 복음에서 나타난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1

결국 복음은 사람의 영혼에 비춰지기만 하고 사람으로 그 복음에 대해 반응하게 하는 것 뿐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에 의해 일하게 하고 사람을 이끌고 복음의 사람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명을 받은 그 말씀이 그를 이끌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나아가 말씀이 이끄는 데로 행동했을 때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복음이 우리는 이끌고, 우리에게 의를 행하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도록 하고, 복음의 뜻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본성과 다르게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삶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복음이 빛이 비춰지게 하려는 의지도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이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 안에 있는 새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 사람입니다. 이 복음이 사람을 입고 사람 안에서 사람으로 살되 우리의 개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중심이 안에 있는 복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옛 사람인 죄의 본성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한 복음의 사람이 사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게하고, 우리의 모든 희망과 삶이 복음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지 아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 안에 복음이 우리를 살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복음의 사람이라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살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 이런 삶이 복음의 삶입니까?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런 의미들을 담은 그릇을 만들었고 그 서신에 충만하게 담겨지게 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려(3:26)”의 주제로 아주 장시간 동안 말씀을 드려오다가 결론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행하시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들의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그 계획에 속하지 않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 할 수 있도록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로 정욕을 일으키고 이방인을 낳게 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자기들의 미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미래가 없고,

어둡고 깜깜한 미래는 그들의 존재가 비극임을 알고,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로 인하여 그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실상 그들의 미래는 캄캄한 어두움과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을 잠재우기 위한 고통만 있는 영원한 저주뿐입니다.

죽음을 저주에 빠지는 것이라고 인식할 것입니다.

실지로 그들은 그들을 있게 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을 모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그들의 삶뿐인데, 그 삶은 유한하며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매달린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은 범죄로 인하여 정욕을 일으켜 이방인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해놓고, 그들에 대해서 아무런 죄 의식도 갖지 않고, 책임의식도 없으며, 그들의 미래가 불투명하며 아무 희망도 없는 비극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의식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고 배척하는 등 자기 책임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원인임을 자각하고 자기의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마음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세상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여 그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기를 낳은 사람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곧 죄의 열매인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의 열매인 자기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고 곧 자기도 죄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장이 전혀 없음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이 하는 것이지 옛 본성인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 안에 복음이 심겨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선택받음과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선택과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의 의미를 아주 잘 이해해야 할 것은 자칫 우리도 옛 이스라엘사람들처럼 율법의 사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는지 의미를 전혀 모릅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해주셨다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성실히 그리고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배타적인 사상을 가질 때 복음이 그들에게 왔을 때 그 복음의 의미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법

이 법은 율법과 같이 성문으로 구성된 문장에 있는 규율이 아닙니다.

사람이 본성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완악하여져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스라엘처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그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법을 돌비에 쓰지 않고 심비에 쓰셨다(돌판에 쓰신 것이 아니라 육의 마음판에 쓰신 것)고 말했습니다.(고전 3:3) .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