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경건치 아니한자를 의롭다하심(롬4:5) 1,

생명있는 신앙 2014. 3. 2. 07:26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4:4)

 

사도가 강조하여 4장의 전체에서 할애하는 내용으로서 제목을 말하라면 그의 믿음과 율법의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새로운 율법해석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아직까지 율법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보게한 의미였을 것입니다. 

사도는 4장에서 믿음이 일어나는 시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칭하실 때'라고 창세기 15장의 근거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4장에서 이렇게 믿음에 관하여 명확하게 증거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 까요? 사도는 무엇을 로마인들에게 말하려고 합니까?

사도는 3장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말을 해왔습니다.

31절에서 유대인과 할례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자칭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유대인이 거하는 곳에는 언제나 율법의 의가 강조되어 있었고 율법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는 바로 율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빚을 만큼 사이좋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처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사이에 미묘한 불협화음으로 대립각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사도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기 때문에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의가 아닌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정의가 없어서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매우 혼란스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종교적 대화를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릴 사상누각에 불과한 뼈대 없는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한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경이 말한바와 같이 아브람의 가족이 되는 것인데 이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 받아야만 됩니다.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선택 사상이고 그 선택의 근거가 할례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의 근거가 할례의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유대인만이 받을 수 있고, 이방인이라도 유대인과 함께 살려면 할례를 받되 이방인으로서의 신분을 벗을 수 없고, 구별된 표징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조건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유대인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하여 구별하신 유일한 민족이며, 이방인은 결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났는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되 잘못된 지식에 의해 이스라엘 하나님을 왜곡되게 섬기는 이단들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곧 율법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이 율법을 준수한다고 해서 유대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휼륭하게 율법을 준수하였다 할지라도 이방인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유대인의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유대인만을 택하였고,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가족의 조건으로 삼으신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주장으로 볼 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논리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이런 논리는 유대인들에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사도바울의 주장이 로마서입니다.

사도에 의하면

맞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논리적인 이유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 사실이며 그 주장을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는데 이점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에 의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율법을 수여하시는 모세시대로 중단하고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약 2,000년 전에 자기들에게 요구한 율법의 준수에 대해서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이에 대한 상벌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곧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으면 벌을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억압을 당하게 하시며 흩어 벌을 주시고 그들이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면 다시 나라를 회복하여 원근각처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 견고한 왕국을 세워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인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신이 준 계명이고 이는 유대인들이 지켜 살아야 하는 길흉화복의 조건이 될 뿐 구원의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실지로 예수께서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는 당시에 유대의 최고의 공회를 차지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은 사제직을 독점한 귀족들이었으나 그들은 부활과 영을 믿지 않았습니다(23:6~8). 유대의 최고의 공회의 곧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이 공회는 지역마다 23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예루살렘에는 71인의 대 산헤드린 공회가 있어 재판권을 행사하며 형벌을 집행할 권리도 가졌으나 주후 70년 디도가 예루살렘을 함락하면서 산헤드린도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임으로 회원의 조건은 귀족, 제사장, 율법학자가 해당하고 율법학자에는 세미카를 이어받은 랍비만이 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 회원 가운데에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당연 구성원이 될 수 있었으나, 실지로 이들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동일한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이론과 율법의 해석상의 차이로 인해 부활과 영을 믿는 바리새인과 믿지 않은 사두개인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게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천지 창조 뜻과 목적하신 바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높은 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지로 오늘 현재의 지중해에 나라를 차지하고 블레셋의 후예인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은 2천년전 이스라엘과 다름이 없는 율법을 준수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서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를 모세시대 율법을 수여하시는 시대로 정지시켜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다윗왕국을 건설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하여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개인의 영혼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개인구원은 이미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 받고 할례를 받음으로 완전히 해결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런 주장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이스라엘이나 혹은 이방인이나 관계없이 모든 사람 개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주신 구원의 중심으로서 약속의 아들들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관계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를 구원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나라 곧,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힘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참된 의미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개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회복이 믿음으로 말미암고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회복된 사람들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목표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율법 해석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해석하여 율법의 준수를 의라고 주장한 이론에 대해서 성경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본질을 찾아 나아가 율법으로부터 근거를 이루는 해석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유대인들이 있었으나 그들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바울의 해성을 동의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모든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한 율법의 재 해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