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4:4)
그러므로 믿음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삯을 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해서 행위나 공로를 지향하는 신앙의 행위를 독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 위해 어떤 열정적이거나 집중적인 열의를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자들은 이점에 대해서 강조할 때 아주 힘있게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이런 주문에 사람들은 주눅들고 설교자가 말하는 의미에 빨려들어 자기 노력의 부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고 동의하며 자기 부족을 스스로 인정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삯과 은혜에 관하여 말하자면,
어떤 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대가를 주는 것을 은혜가 아니라 삯이라고 말하는데 삯이라는 말은 곧 보수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가치가 그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에게 은혜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셨고 그 은혜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열게 만들었으며, 우리의 지성에 자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주심으로 그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향하여 한발 한발 나아가 결국 우리의 지성에서 믿음이 나타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나 힘 아니 우리 지성을 일깨워 인도하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자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임하심은 마치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서 비롯된 것과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마치 우리를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계획을 입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과 같은 착각을 들게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적용은 창조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의 도구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영혼에 접촉될 수 있도록 선포 되든지 들려진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곧 은혜는 만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에게나 복음은 주어졌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심겨지거나 심겨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성의 깨우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성령께서 택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사람에게 잡히도록 내려오는 것을 사람이 붙잡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풍선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개개인에게 안겨주시고 우리의 지성에서 적용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셔서 아브람을 그의 아버지 데라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끌려 나온 것이 아니라 아브람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 안에서 아브람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곧 아브람이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으나 아브람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이었지 아브람의 의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렀고,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때 까지만 해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확실히 인식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의 영혼에 완전히 심겨져서 하나님을 이해하여 믿고 의지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이 소명을 받은 창세기 12장1절서부터 그가 믿음을 인정받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전까지 까지 아브람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브람에게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아브람에게 다가가셨고 그를 지키셨으며, 그의 삶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였고, 이 은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대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드러내는 창세기 15장6절에 이르는 때 아브람은 15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으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종 교회가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선언해주는 선포에 현혹되어 우리의 믿음을 왜곡시키는 경향을 보게 됩니다.
실지로 우리는 믿음이 있지 아니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존재임을 지극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우리 모두를 믿음이 있는 한 형제요 믿음의 사람이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확신해 버립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믿음을 향한 경주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경주를 새롭게 시작하는데 이것은 아직 만삭이 안된 칠삭둥이가 세상에 나온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한뼘 앞에 있는 믿음을 붙잡으려고 삶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믿음을 붙잡으려는 삶을 사십시오.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살지 마시고 믿음을 잡으려는 사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은혜는 여러분으로 향하여 믿음을 믿음을 향하여만 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살되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전심을 다해 믿음을 잡으려고 혼신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시는 그날까지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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