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신앙과 삶을 결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삶은 양태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든지 그 삶이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을 주거나 혹은 신앙이 여러분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윤택하고 부자라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신앙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바다에 던져졌고 홀로 삶아남은 Life의 주인공인 청년이 신앙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망망 대해에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환경에서 호랑이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획기적인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청년을 구원하기 위해서 곰과 호랑이를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호랑이의 잔인한 공격성을 억제하여 무사히 무인도 섬으로 갈 수 있을 때 까지 지켜 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말이든 그것은 가설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말일 뿐이지 청년이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까지의 환경은 살아남은 인간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호랑이의 잔인하고 난폭함으로 억제하도록 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이상하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니 그들을 들어다가 육지로 옮겨놔 버리시고, 바다에 수장된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건져내서 살려 버리시지 왜 죽음의 함정에 수장되는데도 하나님은 보고만 계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편의에 따라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지극히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생각들뿐입니다. 큰 배안에서 풍랑으로 바다에 수장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진실한 신앙을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구명보트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앙이 그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삶의 양태와 신앙과의 상관관계에서 심각한 혼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이 신앙인들의 생각을 이기적이도록 했을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피조된 사람들의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시는 방법,
또한 하나님의 실제성이 단순한 인식뿐인지, 아니면 객관적 존재로서 실제를 가지시는지, 사람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한 불확실한 감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기 중심의 생각들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고 믿지 않은 사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경중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고난은 삶의 가운데에서 사람이 느끼는 양태입니다.
어떤 이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있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울에 달아 봤을 때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는 인생의 무게는 모두 동일합니다.
다만 그 사람 자신이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발을 헛디뎌 인생의 함정에 매몰된 사람이나,
견고한 터전 위에 발을 디딘 승리자나 인생에 있어서 삶의 무게는 한결 같습니다.
고통도 아픔, 기쁨과 슬픔, 모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을 나누고 다른 개념을 가지고 달리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영혼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지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인식하고 지각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으로 말미암은 지각을 가질 것이고, 신앙은 없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지혜로 말미암은 지각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무엇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기를 원하셨고,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으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3: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우리가 육으로 태어났으니 이제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이 탄생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지성에 왜곡되고 타락된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된 새사람이 심겨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거듭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가 이 영을 우리의 영혼에 받아 새겨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하고 오직 우리를 구별하시고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되기 때문에 물과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거듭남은 삶의 양태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18세기에 이르러 아니 그 이전부터 신앙을 곧 인생의 삶을 바꾸는 혁신적인 삶의 전환을 가져오는 마술로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것을 말하여 교회에 사람을 불러 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강조하고, 안녕과 평화, 세계질서의 안녕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왔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은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고 이세상을 천국이 되게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지금의 사회와 전혀 다른 세상을 건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세계가 하나님 아들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수많은 가인의 후예들을 낳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가족으로 편입하시는 일을 하실 수 없는 안타까운 실정 앞에 슬퍼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아들을 거절하여 이방인에게 아들을 내어줌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한 번의 기회,
이방인이 구원을 보장 받는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이후 2천년의 시간이 흘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버림을 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의 반열에 이르는 축복의 시간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으로 신앙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택하신 성령의 사역에 의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으로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세계에는 삶의 터전에서 가슴을 찢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질병 때문에 생사를 오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안타까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아들에 관한 지식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들을 낳고, 기르면서 새겨진 그 아들에 관한 지식들은 어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그와 다른 우리에게는 그 아들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어미와 같은 마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져 안타깝고 측은히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미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생사의 문턱에서 신음하는 아들을 아시고 아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들에 관하여 어미보다 더 많고 깊은 지식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출생의 비밀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으로 낳은 이방인들이 계속해서 사람을 낳고 죽고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기 위해 또하나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생명은 곧 죽음 속에서 피어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죄를 양산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합니다.
이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 하나도 아담과 셋으로부터 직접 연결된 전통의 고리가 단절되는 아픔이 없이 직선으로 연결된 계보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죄로말미암아 태어난 조상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지성에 복음을 새겨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계보에 속하게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비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계보라는 전통의 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낳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낳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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