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이번에 두편의 영화를 만들어 개봉을 단행했다.
하나는 노아, 다른 한편은 더 바이블의 원작을 영화화한 Son of God이다.
영화의 작자는 son of God 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가지 작자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그려내 보려고 애를 쓴것 같았다.
이 영화를 보고 한가지 욕심이 일어났다.
The Bible 가 미국에서 TV 로 반영된 것이라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성경의 의미를 충실히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표현할 복음적 영화를 그려내면 아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충실한 Son of God 에 축복을 주시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의 내용을 영화화 한 것이다.
바닷가가 나오고 강 절벽에 패인 굴속에 덮수룩한 수염의 한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사도 요한이다. 이때 사도 요한은 약 70세 가량 되었을 탠대, 그시기 예루살렘은 로마 디도 장군이 성을 점령하기 한후 돌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렸을 시기이거나 아니면 아직 그 이전으로 생각이 된다.
이 시기에 유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쟁이 일어나 거의 초토화 되어가고 있을 시기이다.
혼자 밧모섬에 유배당해 예수그리스도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핍박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연상하게 해준다.
천지 창조와 지음을 받은 아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타락한후, 세상에 임한 물심판, 아브라함, 모세를 뒤이어 골리앗을 죽인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광야에서의 갈릴리로 돌아오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그를 제자 삼으시고 다른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후 산상수훈을 말씀하신후 한 마을에서 설교를 하시던 중에 지붕에서 달아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인하여 바리새인에게 발견되셔서 드디어 세상에 자신이 드러나시는 것을 중심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한 예수님을 그려냈다.
매우 아쉬운 점은 유대와 로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인 삼각관계를 통하여 통치자와 지배를 당하는 자들간의 숙명적인 관계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관계 가운데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를 필연적인 희생의 재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가이사 황제로부터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을 받은 빌라도는 유대를 잘 다스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대를 평정하려고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이용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어떤 반항도 용서하지 않는 다는 것을 힘으로 몰아 붙였고, 이를 지켜본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어떤 상태에서든이 충돌을 피하여 평온함을 유지하려고 했고, 여기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을 이끌고 다니면서 언제 어느때 힘을 이용해 민중의 봉기를 조장할 지 알 수 없다는 위혐인물로 간주되게 했다.
작가는 유대와 로마사이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는 비폭력을 바탕으로 인류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평화의 메시아를 그려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에도 로마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한 의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의 작가가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에 대한 의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이것은 순수하게 세상의 제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으로 생각이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와 빌라도와의 관계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 선택이 되었고, 바리새인은 그런 예수를 희생시킴으로 빌라도와 유대인의 갈등을 해소하기위한 제물로 삼아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그려내는 그의 마음에 있는 복음이다.
작가는 유대인을 위해 대신 죽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제물이 되었다.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유대인과 통치자 본디오 빌라도와의 숙명적 관계 때문으로 그려졌다.
패션오브 크리이스트에도 나타난 것과 같이 영화의 절정은 사람의 감정을 몰두하게하는 십자가에 있다.
아무 죄도 없이 사람에게 고난을 당하고 한사람 자기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여 팔리우고 모든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아무죄도 없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그 고난과 고통, 그리고 무자비한 로마인들의 발길질과 채찍, 견디기 힘든 아픔에서의 찢어지는 고통 이런 것들은 단순한 동정심을 유발하여 청자들로 하여금 측은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활, 제자들을 다시 모아 세상을 향하여 나가도록 명령한 것이 Son of God 의 모든 것이다.
물론 다른이는 또다른 의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희미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말해온 것처럼 그리스도는 희생을 전제로 이 세상에 왔고, 그리고 세상의 갈등의 제물이 되었다는 슬픈 드라마가 된다. 여기에는 복음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단 하나의 제사를 위해 십자가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조명하여 시청자로 하여금 복음의 의미를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것으로 맞추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정말로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기쁜 소식을 정치적인 갈등속에서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는 보내심은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이해 되어야 한다. 물론 보내심 이전에 보내심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하는것이 중요하지만 그 원인은 후차적인 것으로 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심에 관하여 분명한 지식이 필요하다.
보내심은 "누가 누구를 누구에게 왜 보내셨는가?" 라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요한은 그 의미를 너무도 분명히 말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이유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참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놀랍게도 자기백성이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이도록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이방인은 이를 미워하고 저주하여 십자가에 못밖아 버렸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백성들에게 보내 그들을 구원하려고 했는데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기 질투하여 이방인에게 죽이도록 내어주었느냐 하는 의미가 문제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어난 사건인가? 그리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어떤 유익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은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에서 내어주심까지 연장하여 의미들을 더하여 졌고, 결국은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더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까지 연결되는 바울 복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본래 복음은 하나님의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나 내어줌와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에서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더 큰 열매를 얻었는데 사도 바울은 이를 이방인과 하나님과의 화목교리로 충분히 밝혀주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자기백성에게 보냄을 받았으므로, 자기백성이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제물로 삼아 죽여야 자기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권세가 없었다. 이것은 실지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이방인에게 빼았겼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구원의 촛대를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복음의 참된 의미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우리의 개혁교회도 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죽음에 의지하는 동정에 의지하고 있는 극히 힘없는 지식이 없는 복음을 붙잡고 교회를 사유화 하고 있다. 이런 복음에는 구원이 역사하기 매우 어렵다.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 지식을 바탕으로하는 믿음에 있는데 오늘날 교회는 지식은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이 지식이 없는 믿음은 제마음 대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상상된 그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표하는 '가인적 신앙'을 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