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 1장 13~14 (성령으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나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기에는 너무 많은 신학과 철학적인 설명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여기에서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우리의 정체성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사람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거울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죄의 모습을, 가난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가난의 정체와 그 원인 그리고 이유를, 환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환란의 원인과 그 이유,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본래 우리의 정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제가 이 설교의 첫 마디를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했습니다.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초대교회에서 안디옥교회에서부터 처음 불리어진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시작합니다.
그 전말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후 사도들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이방지역에 거하는 유대인들 가운데 개종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유대 공회는 다메섹 여러 지역의 회당에서 유대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유대인의 세력이 점점 자기들이 로마인들에게 죽이라고 넘겨준 예수 그리스도를 확장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스데반을 죽였고 나아가 제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으며 더 크게 세력이 확장 되어가고 있는 다메섹 지역을 타킷으로 하여 교회를 잔해하여 핍박하려고 사울을 파견하여 개종한 사람들을 옥에 가두려고 한 것입니다.
이 도상에서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비취는 빛에 의해 사울의 눈이 멀어지게 되었고 아나니아에게 이끌려 안수 받음으로 고침을 받고, 세례를 받아 다메섹 여러 회당을 다니면서 자기가 본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당혹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데 가두라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들을 앞에서 예수를 더욱 확실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나바라는 한 제자는 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담대히 전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과 교제하게 하려고 예루살렘에 데리고 왔으나 제자들은 다 두려워하고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경험을 말하게 하니 사도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담대히 전파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더욱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사울을 다소로 보냈고 다음에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때만해도 제자들을 중심으로한 교회는 이방인의 구원에 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방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전파되고 있었고 이방인이 유대인의 회중으로 받아들여 진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도 결코 용납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이방인 구원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를 인도하여 이방인의 구원 역사를 베푸심으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비로써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번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9:43에 사도 베드로가 욥바의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10장에 이르러 가이사랴에 있는 이탈리야 사람 고넬료라 하는 백부장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분명히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탈리아 군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였고, 경건하여 이웃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욥바에 있는 시몬 무두장이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천사의 환상을 보고 하인을 시켜 베드로를 불러오게 합니다.
이때 환상은 고넬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도 환상은 있었고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에 의롭지 않고 개끗하지 않은 것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배타성이 그의 몸속에 있는 피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배타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부터 그들에게 심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천사가 가르친 대로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고, 베드로에게서 말씀이 선포되자 오순절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났던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나타난 역사가 자기들에게 나타난 역사와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와 그 가족에게 세례를 줌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원받는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실지로 사도행전 11장은 이방인들에게 희망이 되는 놀라운 장입니다.
그러면 안디옥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헬라인들이 생명 얻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에 모여들고 유대인과 회개한 헬라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38년~1968년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교회당에서 매주일 아침 설교로 영국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던 로이드존스는 1953~과 54년에 매주일 아침마다 영적 화해라는 제목으로 에베소서 2장을 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서문을 강해하는 가운데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를 1장 10절의 말씀인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 되게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본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가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고 있는 첫 번째 주제를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나뉘어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교회시대가 서로 연합함으로 하나의 세계를 시작한 것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사명의 내용과 안디옥교회에서의 헬라인들의 구원이 성취되고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호칭되는 역사를 중심으로 얻은 사고일 것입니다.
미련한 우리가 성경을 살펴 보아도 바울 서신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대별된 구별을 보게되고 특히 로마서와 같은 교리서에서는 구약에서 부터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로 구별된 사상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2장에서 두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통일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중심 사상이라고 판단하고 어느 장보다 먼저 2장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지금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이방인인 너희는 유대인과 하나가 되었다” 곧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이방인 역시도 그리스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여전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별되어 있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하나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하나가 되는 매개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받는 것을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명백한 말씀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에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25절에서 호세아 글을 인용하여 명확하게 말하기를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자기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는 사도가 자기백성을 의로운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유대인 시절을 상기한 것처럼 유대인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백성에게 보내셨으나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사상이나 신학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는 에베소서 2장에서 분명히 언급합니다.
3절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방인에 대한 명확한 답입니다.
언급한 이 구절 가운데 유난히 드러나 강조되는 말이 “본질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fuvsi" 인데 The nature: 자연, condition : 상태,Presence : 현존 존재,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사전에는 밝히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근원, 시작, 기원, 혈통, 가계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The nature에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인 이스라엘에 상대적인 존재로 이방인을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명확하게 칭하는데 앞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라고 이유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본질상이라는 말은 어떤 규정이나 요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자연스럽게”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를 강해하기에 앞서 로마서를 먼저 강해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를 강해하여야 할 태인데 어디를 할 것인지 선택하던 중 2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1장에 앞서 2장을 먼저 강해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로이드 존스가 왜 2장을 먼저 강해하고 난 다음에 1장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2장은 우리의 정체성을 밝혀주는데 너무도 중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구원의 의미를 인식하는가?
눈을 열고 아침을 시작할 때 우리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의미를 마음깊이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바로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3절까지에서 아주 명확하게 답을 말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이었더니”
사도는 12절에서 더 명확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구원받기 이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더 필요한 말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실지로 저는 자연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자연이라는 한 단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너무도 큰 대적의 말이라는데 치가 떨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둘로 구분하라하면 하나님의 안경인 선으로 비춰 보아야 합니다.
선은 곧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말씀하신 선입니다.
이 선의 안경으로 비춰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한 사람과 그들로 말미암은 결과적 존재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첫 사람 아담 안에 씨를 작정해두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은 결과적 산물이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그들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 존재가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고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물이 나올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은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악을 행하여 악한 결과물을 냈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하기 때문에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음을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을 행하고 악한 열매를 냈는데 그것이 우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을 행하여 죄를 짖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는 지음을 받은 존재의 행위의 결과를 말할 때 그가 악을 행하여 악한 열매의 결과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악의 행위의 결과들입니다.
선의 열매가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 곧 죄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숨을 쉴수 있는 허락을 받고 태어났지만 실지로 영원한 저주를 앉고 태어난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우리는 운명적으로 저주를 앉고 태어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은 죄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실은 우리의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 영혼은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영원한 저주의 지옥으로 가야하는가?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영원한 저주는 받지 않을탠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왜 낳은 거야?
그러므로 본질상이라는 말은 자연적이라는 의미이고 어떤 영향과 목적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창조의 계획에 속한 것이 아닌, 피조된 존재의 행위 결과로 인하여라는 말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철학과 자연학문은 이 본질상 곧 자연을 근거로 하여 구성됩니다.
성경이 있기 전에 부터 이세상의 학문은 하나님을 떠나 자연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알지 못하고 그 근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고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로 시작하여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자들은 우리가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가며, 왜 이땅에 존재하는가? 그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수고하고 고뇌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지성이 어두워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가 자연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한 학문들이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하여 오늘 우리까지도 그 물에 적신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이 자연속에 빠져있었고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는 자연의 지식이 우리를 대부분지배하고 자연으로 하나님까지 이해하려는 괴물과 같은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창조적인 신앙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고대 철학자들의 소리에 귀를 열고 그 들은 지식으로 복음을 해석하려는 사악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이 거짓되고 사악한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진리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직접 우리의 영혼에 조명하시는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시다는 것을 하나님과 주님은 ㅎ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서 부터 온것입니까?
우리의 자연적인 지식과 이해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지식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한다면 우리보다 더 휼륭하고 공부를 많이한 식견을 가진 철학자들이 더 하나님을 잘 믿을 것입니다.
보잘 것 없고 지혜도 없으며 지식도 없는 미물과 같은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생명얻는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늘우리에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적용되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진리의 말씀인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결과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시간의 갭을 뛰어 넘어 2000년이 지난 현시점에 있지만 그날에 성령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약성경에서 성령으로 (a{gio" pneu'ma)라고 직접적인 단어로 사용된 곳은 약 36회입니다. 이 가운데 사도 바울이 18회, 복음서에서 8회(예수께서 직접 사용2회 사용하셨는데 요한복음 3장 8절과 5정에서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언급하셨습니다.)사용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분명히 말하기를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롬8:15에서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영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라고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다고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성령이 임하면 그는 생명 얻는 회개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직 진리의 복음의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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