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시는데 그 목적은 사람을 쉬게하는데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고달프고 힘든 인생에 지쳐 쓰러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 말씀은 앞 절의 말씀과 전혀 다른 의미를 던지고 있습니다.
힘든 인생, 좌절,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 놓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인생의 수고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아픔과 고난으로 말미암은 인생 문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이 무슨 해답이 될 수 있습니까?
계속되는 말씀은 "나의 멍에를 메고" 라는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멍에,
'멍에'가 무엇입니까?
쉼과 멍에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실지로 멍에는 쉼이 아니라고 수고의 상징입니다.
소에게 무거운 짐을 끌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멍에입니다.
멍에는 소로 하여금 스레나 쟁기, 마차를 끌도록 목뒤에 걸쳐 매는 활모양의 나무를 말합니다.
만약 소로하여금 스레와 쟁기를 끌도록 하기 위해서 온몸에 밧줄로 묶거나 혹은 어떤 다른 장치를 사용한다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소로하여금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목덜미에 멍에는 메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때 아버지께서 쟁기로 논을 갈다가 피곤하시면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데, 이때 소에게 다가가서 목뒤에 걸쳐 있는 멍에를 풀어 소 등에 걸쳐 놓습니다. 그리고 수고한 소에게 풀을 주면 소는 그것을 먹고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멍에는 소로하여금 온전하게 힘을 쓸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나라마다 사용하는 방법이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마리의 소에게 멍에를 지우지만 유대에서는 하나의 멍에를 두마리의 소에게 걸쳐 메고 수레나 쟁기 혹은 마차를 끌게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의미를 우리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주님은 당신이 메고 있는 멍에를 같이 메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철학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것이 사람에 대한 어떤 규칙과 같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두개의 존재가 유기체로 연합하여 한사람으로 존재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둘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문으로 쓰면 그 의미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인자를 개발하고 그렇게 표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사람을 긴장대 하나와 작은 장대가 서로 의지하며 걸쳐서 하나의 사람을 구성한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멍에를 메므로 사람을 구성한다는 논리에도 적합한듯 합니다.
내 멍에를 메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곧 나의 멍에는 너희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우리가 잘못된 멍에를 메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멍에는 주님께서 메고 계신 멍에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멍에는 힘들과 무거우며 고통스럽습니다.
신학은 바로 이 문제의 정확한 답을 찾아서 교회에 제공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멍에를 벗어버리라. 그리고 나의 멍에를 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서 메신 멍에가 무엇인지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느냐 나에게 오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멍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연구하고 찾아서 교회에 제시하여 성도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를 보여ㅜ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은 사람은 뭔가 다른 멍에를 메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멍에는 가벼우며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멍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메고 있는 멍에를 벗어버리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느냐, 내게로 와라 그러면 너희가 메고 있는 멍에가 가벼워질 것이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멍에를 메고 가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멍에는 우리를 무겁게 하는 멍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멍에는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하는 이기적인 멍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한결 같이 이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이 멍에는 이 세상의 임금의 멍에인 것입니다.
그 멍에는 우리를 괴롭히고 어렵게 하고, 함정을 빠뜨리고, 위기에 처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함께 메고 있는 멍에이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거짓과 무지와 결함을 함의 한 우리의 왜곡된 지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무겁게하는 거짓된 지식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구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일을 하는 도다, 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4:2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따라 의와 진리의 거룸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들으며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말씀은 인생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짐승처럼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짐승보다 한단계 뛰어나도 탁월하며 다른 조건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짐승은 육체의 감각으로만 살다가 생명을 다하면 죽어 흙이 되어버리지만, 사람은 짐승이 가지고 있느 육체에 영혼을 추가하셔서 두개의 유기체의 결합에 의해 존재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 유기체가 하나의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 활동하고 존재하게하는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 요소가 바로 지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는 자기를 살게하는 지식을 벗어버릴수 없습니다.
지식을 벗어버리면 짐승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은 두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가 아닌 거짓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거짓에 매어 거짓의 세상에서 거짓으로 살고 있는데, 이제 당신이 메고 있는 '진리로 오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는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진리는 사람으로 짐을 가볍게 합니다.
진리에 메인 사람은 삶이 평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증거인데 그 증거의 첫 말씀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창조의 방법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로고스이고,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 언어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만물을 붙드시고,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며, 만물의 동반자가 되며, 만물을 선하게 보존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진리에서 떠나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진리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질서와 거짓 사회에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거짓에 매여 거짓된 삶 때문에 인생의 삶에 지쳐 방황하는 삶을 주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예수님께서 메고 계신 진리의 멍에안으로 들어 오라고 말씀하시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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