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의미를 살펴 보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날과 달을 기념하고 그날에 축제를 가지고 멀리 있는 가족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이는 사람의 자연으로부터 받은 본성에서 비롯된 반응인데 곧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욕구로 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회귀 욕구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추억하며 그 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다시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일어난 욕구인데, 본질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나 혹은 지나온 시간의 허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아쉬움이 옛 기억으로 이끌어 감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혹은 사회가 겪은 충격적이거나, 자연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특별한 날들, 충격적인 사건, 사회나 혹은 국가적이나 전 지구적으로 경험된 특별한 날들로부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한번 기억하고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우신 일을 깊게 생각하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영접하는 축하와 온 세상이 자기들의 구원을 기뻐하며 감사의 표혐을 드러내는 교회가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일의 시작의 회기로 삼습니다. 이날로부터 다음 해 성탄절까지 모든 사업의 시작일로 정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가하면, 내일을 새롭게 다짐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모임을 가지고, 오랫동안 해어졌던 사람들과 이웃을 초청하여 다 같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최대의 기념일입니다. 교회가 이날을 정결한 마음과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하늘과 땅은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을 보고 있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터전을 침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의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의 소유권을 탈취해 간 존재입니다. 교묘하고 간교하여 거짓으로 온 세상을 유혹하여 이 세상의 관리자인 사람으로부터 소유권을 탈취한후 사람을 자기의 하수인으로 부리고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세상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고 그에게 영광을 노래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합니다. 교묘하게 성탄절의 의미에 자신의 영광을 주사하여, 성탄을 축하하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을 자신을 향하여 영광이 돌려지도록 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타락된 요소들과 광란의 소용돌이를 주사함으로 성탄으로 들뜬 사람들의 마음을 극한 범죄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어 버립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이 사람들의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하고, 더 깊은 타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어 이 기념일을 통해 더 깊은 죄악의 파멸로 밀어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경건한 감동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기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광란과 타락과 음흉하고 추악한 죄들이 문에 엎드려 죄를 행하기를 즐기는 날이 되게합니다.
날은 성탄절인데, 실지 이날은 죄의 절정의 날이 되었습니다.
노아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날이 성탄절이 되게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주님의 구원의 감격을 찬영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의 축제를 이처럼 더럽고 추악한 날로 바꿔버린 원인이 무엇입니까?
1644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의회를 장악했을 때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을 반대하고 그날을 Mark day 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본래 이날이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의 축제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12월 25일이 왜 태양신을 섬기는 날입니다.
본래 12월 22일은 동짓날로 낮이 가장 길고 밤이 짧은 가장 큰 차이가 되는 날입니다. 이날 이후로 반대로 낮은 하루에 1분씩 더 길어저 6월 22일 하지까지 밤의 길이가 짧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지 이후부터는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12월 22일 동지까지 또 다시 이어져 그날에 밤과 낮의 길이가 반복적으로 변화하는 기준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낮의 길이가 짧고 밤의 길이가 길어지니, 이날에 어두움이 빛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이후 3일째 되는 날에 드디어 낮의 길이가 길어지자 사람들은 태양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고 신화를 만들어 그날을 태양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태양절의 유래는 4천년전의 미스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스라는 이란의 '빛의 신' '태양'을 상징하고, 동짓 날 이후 3일 째 되는 날에 낮의 길이가 길어짐으로 어두움에 관해 빛이 승리한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면 미스라가 어떻게 서방에 전파 되었고, 그들이 성탄절을 대신하는 날로 바꾸었느냐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헬라 문화를 가져가게 되었을 때, 대패한 페르시아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헬라사람들에게 그대로 유입되었고, 이것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소개 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AD 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전역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이미 지키고 있었습니다.
307년에는 디오클레치아 황제가 다뉴브 강에 미스라에게 바치는 제단을 만들며 이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12월 22일 부터 1주일간을 페르시아에서와 같이 축제일로 지내게 되었고, 313년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개종하였지만 미스라 축제를 계속 지키면서 기독교 축제일로 지켰고, 376년경에 레오 황제에 의해 미스라가 성전이 무너뜨려졌지만 여전히 미스라의 축제는 계속되어 두 종교가 각기 축제를 지냈으나, 530년경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수도사에 의해서 미스라 축제를 유럽 전역에 기독교의 휴일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날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지만 기독교를 신앙하는 통치자에 의해 그 날의 의미를 기독교의 성탄절로 바꾸어 의미를 달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된 청교도는 성탄절이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비롯된 날이기 때문에 실지로 이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날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이날을 거부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아직까지 이날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탄절이 12월 25일이 맞느냐 하는 질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낸 날이 아니고 성경이 이날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여주지 않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창조론자인 한 과학자에 의해 밝혀진 예수의 탄생일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 정황과 교부들의 기록, 그리고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을 종합하여 검토하고, 특히 양치기 목자들이 등장과 동방박사들의 메시아 탄생의 별을 보고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는 방문을 검토한 것을 자세히 살펴 본결과 그 날이 (양력)BC6년 5월 14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창조과학 김명현박사/이스라엘력으로 2월 28일 이기 때문에 매년 성탄절은 양력으로 일정하지 않음, 2016년 6월 5일은 ) 교회는 성탄절을 지내려면 과학적으로 검토하여 올바른 날이라고 하는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사탄은 세상의 통치자들에 의해 빼앗긴 그날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을 혼란스럽게하여 구원자의 오심이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불행이 되게하려고 극렬하게 죄를 쏟아 붓고 오히려 죄의 절정의 날이 되게 합니다.
실지로 그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성탄에 빼앗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들에게 기쁨이 아니라, 죄를 행하고 날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의 날은 AD6 년 5월 14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낮고 천한 곳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날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2천년 동안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독립을 선언한 명실공히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이고(양력기준 이스라엘 달력으로는 다릅니다.) 1967년 6일 전쟁시 예루살렘의 서쪽 벽을 탈환한 이 전쟁의 날은 예루살렘일로 정했습니다. 바로 이날이 이스라엘 달력으로 2월 28일인 것입니다. 놀랍게 이날로부터 70년이 되는 2018년 5월 13일이 AD6년 5월 14일과 하루전일이라서 어떤 의미를 둘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날을 이스라엘 독립기념일과 예수님의 탄생일을 이스라엘의 전 국가적으로 축하하게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소원은 속히 그날이 이르고, 온 세상에 참된 평화가 오기를 다시한번 소망해 봅니다.
그래서 참된 성탄의 날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한다면, 그 날들의 명확하게 명시할 수 있는 증명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이방인의 태양신 축제의 날을 성탄의 날로 함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란스런 그 날을 성탄의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여 사탄과 충돌이 되게하는 어지러운 날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날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탄의 의미는 복음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가요?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요?
이 두가지 점에서 복음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야 하는 이유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타락하여 범죄함으로 지독한 비참에 빠져 저주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비참에 빠졌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 상태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고 완전하게 지으셨으나 그 완전함의 교만이 죄에 빠지게 했고 세상이 죄로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비참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로부터 해방시켜려고 아들을 보내 죄값을 치르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저는 더 깊이 죄의 값을 치른다는 의미를 막연하게 말로 어물쩡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 죄에 대한 값을 치르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가는 것은 우리에게 튼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아들들은 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 아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관계로 인한 상대에서 죄에대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엇습니다.
이 죄값은 누구에게 치러야 하는가?
복음적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종종 언급하여 말하는 것을 봅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함이라(엡3:6)"라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죄값이라고 할때는 죄로 말미암아 빚을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슨 죄입니까?
저는 이것을 복음적의미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이라는 삼각관계에서 명확하게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전 서신서와 로마에 보내는 서신에 명확하게 말하는 의미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두번째로, 성탄의 의미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사람이 지음을 받은 이후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들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이방인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하나님의 아들들만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죄를 범하므로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의미의 삼각관계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입니다.
죄는 여기에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치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확하게 하셨고 예수그리스도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했고, 그 값을 대신 치루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뭘까요?
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놀랍게도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한이 후 낳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지 않습니다.
죄가 낳은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세상에 존재하도록 계획하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될 것을 아시고 태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결코 태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지음을 받은 아담이 범죄하게 되자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창2:16~17)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죽어야 하는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들을 낳았으니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은 죄의 열매가 되고, 하나님께서 아담안에 계획하셔서 태어나게하신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만 여전히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의 열매로 태어난 이방인들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고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도 모르는 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죄를 짓는 일이 없을 것이고, 세상을 더럽게하는 일은 결코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옥이라는 끔직한 비참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이방인은 태어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이고 이 저주로 말미암아 지독하게도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원수같이 여기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지독한 저주를 퍼 붓게 됩니다.
이방인은 저주에 빠진 자기들을 존재하게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너무 미워하고 증오와 분노를 일으킵니다.
이들이 대표적으로 이스마엘을 중심으로한 이슬람의 무슬림들입니다.
온 세상을 테러로 소요를 일으키는 무슬림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경전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원수보다 더 지독하게 저주하며 죽이고자 합니다.
모두 그 원인이 죄의 열매로 태어나게한 것이 원인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방인들이 실지로 테러를 일으키는 이슬람을 싫어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하는대는 동참합니다. 극단주의 이슬람이 아닌 다른 이슬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면서 이슬람에 반격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미워하는 것은 모든 이방이 함께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는 이방인들의 상징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이 이처럼 증오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는 원인이 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이고,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은 태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주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영원한 비참의 지옥에 처해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한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더이상 보고 계실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끊고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죄값을 치루시려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값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복음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이 복음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지면 구원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어야 하는 것은 더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하기 위함이요, 죄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더 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의 단절은 정욕이 단절되고, 이방인이 생산되는 것이 단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들로부터 더 이상 탄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당사자가 죽는다면 그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만약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다시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의 선의 개념으로 볼 때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죄는 씻겨지고 용서를 받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누가 죄를 지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해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죽어야 하는데 죽음을 당한 당사자가 죽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존재라면 그 대속이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대신 죽어주고 다시 살아나야 하고 죽이는 당사자는 죄이어야 한다. 결국 죄가 자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죽이는 당사자는 죄 자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죄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을 위해 섬기려고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아벨 처럼(창4:8) 순수하게 죄에게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면 자기들의 죄로 이방인을 낳았다는 인식부터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방인은 태어나도록 작정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잉태하여 낳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허락에 의해 존재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가인을 섬기는 자세로 대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 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으시고 순수하게 죽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자기가 죄로 말미암아 낳았다는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아들의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태어나게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안에 있는 죄를 죽여야 이땅에 죄의 열매가 탄생하지 않고 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과 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죄값을 치룬다는 것은 죄에게 자기를 죽임으로 자신안에 죄가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죽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자기의 죄를 죽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죽어 다시사는 것이 없으면 그 죽음을 죄에 대한 죽음이지 죄값을 치르고 다시 삶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내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제물로 내어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해서 내어준 것입니다.
이방인은 자기들이 죄의 열매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들을 미워해서 죽였으나 실지로 그들이 예수를 죽임으로 자기들의 죄가 죽었고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바로 자신을 죄에 내어주어 죄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성탄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죄에 내어주로 오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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