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 11:1~6, 눅 7:18~23)
세례요한은 옥에 갇혔고, 그가 세례를 준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을 전하며 질병과 악귀들을 고치시는 사역에 분주하실 때였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서 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감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뭔가 서운한 감정을 지우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하려는 의로운 생각을 나타내지 아니한 이유입니다.
세례요한을 변호할 어떤 의도를 드러내시지 않으셨고, 오직 자기의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아마도 세례요한의 처형에 대한 예상을 전혀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잇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다소 심한 언어로 비난 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딘가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짧고 미련한 생각들은 예수께서 나서서 세례요한의 구명운동을 하시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고, 수많은 질병도 고치고, 귀신도 몰아내며, 문둥병자도 고치시는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셨다면, 그런 능력으로 세례요한을 불쌍히 여기셨다면, 충분히 구원하실 수 도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어떤 행동도 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는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마11:11, 눅11:26), 칭찬만하셨습니다.
그 사이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저에게 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관심이 소원하셨냐고 물으면 저는 대답이 궁색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에 등장하셨기 때문에 자기가 죽임을 당하여 그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에게도 매우 궁금한 문제이며,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줄 어떤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칼빈 선생은 그의 주석에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질문을 덧붙여 오랫동안 확실하게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왔는데도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의 우매함을 암암리 책망하고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의도는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 질문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한 동안 저 역시 이런 대답으로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마음에서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의심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약화되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수년 동안 직접 알아왔고, 함께 하였던 여러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신감은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성으로 대답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여러 의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궁색한 답변을 하게합니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답변은 세례 요한에게나 그의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답변이었을까요?
그들이 예수께 가서 질문을 할 때는 무엇을 기대하였을까요?
헤롯의 비난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는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선생이 옥에 갇혔는데 구원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좋아 우리가 헤롯에게 가서 구원을 청해보자” 라는 답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책장을 살펴보다가 미국 시카고의 게렛 신학대학교 응용신학교수인 “로즈메리 류터“의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라는 장 춘식의 번역서, 서론 부분을 읽는 중 유대인의 메시아관에 관하여 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신앙의 근간의 터전을 약간 요동치게 하는 반유대주의 신앙에 대한 기독교의 출생에 관한 생각을 하게하는 비판서적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기독교는 그 본질에서 반유대주의로 변질해버린 왜곡된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는 그 뿌리가 유대교에서 시작한 것으로 모세 오경과 유대인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실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하는 점에 있어서 같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낸 메시아 곧, 성자 하나님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셨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결과적 원인은 그들이 예수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인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에 관한 예언의 성취는 2천 년 전에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비극적 사건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이유를 알았다면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찬란하게 빛났고, 2천년 동안의 비극적인 치욕의 역사는 이스라엘에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통해 전 이방인을 구원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나라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보냄을 받은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의 관점은 매우 다릅니다.
로즈메리 류터가 말하기를 “유대인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출애굽과 같은 동일한 투명성과 확실성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 다음에 세상의 마지막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는 기독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유대인에게 있어서 “인간의 고통이 보편화 되어 있는 한 메시아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고 믿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점으로는 하나님으로서 성자, 곧 ‘하나님의 아들 개념’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순수하게 사람을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개념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이 됩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없고, 신이시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 다는 개념은 그들의 신학적 개념으로 도저히 받아들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들의 개념은 협의적으로 순수한 사람의 아들을 불러서 선택해주신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과 광의적으로 세계 속에서 선택을 받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인은 삼위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부른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기록하여 주신 십계명 중 제 2계명을 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사람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개념으로 볼 때 사람으로부터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요셉, 곧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으로는 순수한 사람일 뿐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의 조건은 “왕자와 같이, 흠이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어야 하고, 모두가 인정될만한 조건에 의해 반대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람이어야 했고, 일반적 개념을 초월하고 월등한 도덕적 이상을 실천한 이상의 능력을 소유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백성을 통치할 뿐아니라 하나님과 신비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이스라엘을 세상에 우뚝 세우고, 예루살렘에서 만국을 통치하는 왕좌에 앉으실 왕이며, 세상의 왕국으로 다시 세워놓아야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현실에 처해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되고, 이스라엘의 경제와 사회질서에 완벽한 지혜를 발휘하여, 평화롭고 안정되며, 근심과 걱정뿐만 아니라 질병과 사회 문제가 없는 세계를 이끌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원하는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실지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 땅에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허구적인 이상적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던 사사시대를 뒤로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에서 높이던 그날의 왕, 사울, 이의 도덕성 부재를 이유로 폐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스라엘을 세상에 견고하게 세우던 다윗과 같은 능력의 왕,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함께 해주실 왕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들의 왕이고,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선택위에 선택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그의 모든 제자들도 유대인으로서 동일한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할하셔서 40일 동안 함께 하신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에 이를 때 까지 명령에 따라 열심을 다하여 기도할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난 다음 하나님아들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그들도 성령 강림이 있기 전까지 메시아에 대한 관점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유대인이었고 한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식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가 자기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구약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자기들이 섬겼고,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확신이 마음에서 솟구쳐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인식에 관하여 아주 어려운 설명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 말은 한 두번 설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자주 말씀을 드릴 것이지만,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지성의 작용에 관하여 말할 때,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 작용은 성령의 사역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어떤 기회가 있도록 저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매 시간마다 반복적으로 자주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하는 두 법의 체계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전하는 서신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라고 말하였는데, 약 6개월~1년 정도 뒤에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로마서에서 더 명확하게 정리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영혼에서 “객관적 자기 인식”을 경험했습니다.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를 인식한 것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수한 경험인데,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존재”(롬7:15) 곧, 자기 안에서 뭔가가 자기를 이용해 행동하게 하는 그 ‘무엇’, 자기가 관찰하고 있는 자신과 다른, 자기를 행동하게 하는 정체를 본 것입니다.
자기는 본래 선을 행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또 다른 자신을 관찰하기 어렵습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자신을 가진 Multi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나가 있다고?”
사도바울의 로마서 7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나는 본질상 선을 행하기 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선을 행하기 위한 선의 본질은 내안에 없다.
나는 선이라는 그릇일 뿐, 그 선을 행하기 위한 선의 힘이 내게 없으니 나는 본질상 선한 그릇으로 태어났으나, 그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다.
그러므로 본질상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빈 그릇일 뿐이다. 선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그 본질적 요소, 이것이 선의 그릇에 담겨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잘 살펴보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곧, 나는 본질상 선하지만 나를 행하게 하는 그 무엇이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행하게 한다.
이런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관찰하건데, 자기 안에 있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주입되는 것은 지성이 생성한 지식이고 그 지식은 모두가 ‘악’하고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을 본 것입니다.
존 칼빈 선생은 그의 주석에서 두 체계를 ‘육신’과 ‘영’으로 해석했고, 사람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며, 그 속에 아무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완전히 타락한 존재이며,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곧 의지입니다.
모든 사람의 의지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가 지음을 받은 본질일 뿐 그 의지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의지에 들어온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은 ‘법’입니다.
사람 안에 두 가지의 법이 있는데, ‘마음의 법’과 ‘지체 속에 있는 법’입니다.
사도는 ‘지체 속에 있는 법을 죄의 법’이라고 했고. 이 법이 ‘마음의 법’을 이겨 자기로 죄를 행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육신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타락한 본성의 지식”이라고 하고, 마음의 법을 “복음의 지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칼빈 선생도, 로마서 주석에서 ‘영’을 “하나님의 형상이 빛나는 영혼의 그 부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빛나는 영혼의 그 부분’이라는 말은 어찌 들으면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전적 무능에 배치되는 말로서, 사람의 영혼의 일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을 받고 있으므로 ‘선한 부분’이라고 들릴 수 있습니다.
‘전적 무능’은 인간의 영혼에서 육체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을 받고 있는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 선생도 동일한 로마서 7:18절을 주석하면서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바울이 서두에 언급한 말이라고 했고, 아무 선한 것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고백함으로 자신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했고, 하지만 ‘육신을 본성적인 감정’에, ‘영을 중생된 부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완전한 타락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은 “전적타락”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분명한 존재가 인류의 시초의 두 아들 중 동생을 쳐 죽인 형 가인을 통해서 아주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인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지 못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고, 보여주셨으며, 대화하였으나 하나님을 왜곡되게 알았습니다.
가인은 객관적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접하였으나, 그의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사를 동생 아벨과 다르게 드린 것,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감추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등으로 볼 때 가인은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가인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무지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한 자(완전한 타락)입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됩니다.
반면에 아벨은 타락한 사람의 아들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알았고, 받아들여지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8:44)
둘째로, 진리는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서신에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점”을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으로 구별했습니다.
위에서 증거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 안에 어떤 영이 있으냐에 따라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그 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영은 말씀”이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자기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그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합니다.(요8:37)
결론적으로 가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릅니다.
말씀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영혼 지성에서 나옵니다.
이 지식은 진리와 거짓으로 구별되고 진리의 영으로는, 거짓을 거짓으로, 진리는 진리로, 이해하지만, 거짓의 영으로는 진리도 거짓으로, 거짓도 거짓으로 만 이해합니다.
가인의 영혼 지성에 있는 모든 지식은 거짓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만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을 거짓의 신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진리의 신으로 이해하려면 그 안에 진리의 영,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영혼 지성에는 진리라고는 한 점도 없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가인과 동일하게 타락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도 역시 타락을 물려받은 완전한 타락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타락으로 말미암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의 비밀은 앞에서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바에 의하면 아벨 안에 진리의 영이 있엇던 것입니다.
이를 들어 성령께서 그에게 조명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은 그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않았고, 아벨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고, 성령이 그를 조명할 때 그 지식이 하나님에 관하여 진리대로 인식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두 영, 서로 다른 두 지식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릅니다.
진리의 영으로 진리의 행동을, 거짓의 영으로 거짓의 행동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언급한 두 마음을 ‘죄의 체계’와 ‘하나님의 법 체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서로 다른 독립적인 체계가 서로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 갓 복음을 접하여 새 사람 된 사람과, 복음이 영혼의 지성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 거듭남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말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 안에 있는 본성의 자신을 보든지, 아니면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타락한 본성의 지식체계로 복음의 사람인 자신을 보든지, 이를 “객관적 자기 인식”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심판한 한 재판관들을 향하여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는데, 이때 말하는 ‘자신을 보라’는 의미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답을 들을 차례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메튜핸리가 말하고자 한 것 처럼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려고 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는 감정적인 도움을 청하는 의미로서 인간적 감정에 호소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모든 의도를 배제한 체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아,
인류를 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들이 본 것은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은 인류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세계는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만 가능한 새 나라가 펼쳐지는 장관을 요한의 제자들은 지켜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형식적으로 입교된 세례받은 신자들의 모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의 의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
자기 안에 복음의 씨앗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의식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 나라에는 삶의 문제가 없습니다.
함께 모일 때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살려주셨고,
중풍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살리셨으며.
소경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고,
성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소외받고 버림을 받은 처참한 환경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야하는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아 한 백성이 되고,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가지 직전에 다시 살아나거나,
이미 죽어 나흘이나 된 사람이 살아 무덤에서 나오는 세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현장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었고,
천국의 생생한 현장이 그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기만 하면 천국은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자유의 나라가 아니었나요?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하시는 현장의 나라를 보고 천국이라고 믿었을까요?
여러분들의 눈에는 천국이 분명히 보입니까?
아쉽게도 그 나라는 온통 더럽고 고통스런 죄의 나라 속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천국이 보이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답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며, 보이지 않은 분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천국이 오지 않았다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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