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교도혁명과 잉글랜드 회중파 몰락
유럽은 1617년 로마가톨릭을 신봉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이듬해 보헤미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1619년 개신교 제후동맹이 주도하던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축출하고 새 국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서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종교를 명분으로 둘 사이의 갈등은 결국 개신교와 카톨릭간의 30년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왕세자 찰스 1세와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아나의 혼사를 추진하여 이를 장기화 된 전쟁의 평화 조약을 위한 구실로 삼고자 하였다. 1621년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항하는 해군의 참전과 잉글랜드 내에서의 성공회 기피에 대한 강제 개종, 그리고 왕세자의 결혼 대상은 개신교도로 할 것을 요청한다. 1625년 버킹엄공작의 작전에 의한 스페인 카디스 습격의 실패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1628년 프랑스 위그노들을 지원하기 위한 라로셀 원정의 실패, 당시 상원의장 겸 대법관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 탄핵 등 연이은 국정 실패로, 결혼에 대하여 의회가 거론하는 것을 특권침해라는 감정적 반응으로 의회와 마찰을 일으켰고, 군주에 대하여 무례하다는 이유로 의회 해산하였다.
제임스 6세 사망이후 왕이 된 찰스 1세는 절대왕정을 지향했고, 스페인과 스코틀랜드와의 두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 없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으로는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캔터베리 대주교와 함께 청교도를 탄압하며 성공회를 강화하며, 아내 헨리에타 마리아(프랑스 가톨릭 공주)의 영향으로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쳤다.
이와는 반대로 지주 계층(젠트리, Gentry)과 도시 부르주아 상인 계층들은 왕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며 경제적 자유와 더불어 청교도적 개혁을 원하고 의회를 지지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려 했고, 1642년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 지향하는 청교도, 젠트리, 상인,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의회파와 성공회, 귀족, 가톨릭 지지 세력인 왕당파(Royalists) 간 내전이 발발했다. 1643년 첫번째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와 연합하여 찰스 1세가 싸울 수 있는 사전 조약으로 스코틀랜드 언약교도와 잉글랜드 의회 사이에 “엄숙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맺어진다. 1644년 올리브 크롬웰의 신기군의 등장으로 마스턴 무어의 전투에서 승리를 계기로 승승장구하여, 1647년 5월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하고 찰스1세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에게 항복하였으나 스코틀랜드군은 찰스 1세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터라 40만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넘겨주고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후 찰스 1세는 캐리스부르크 성에 연금되었고 자신의 구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했고,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에게 잉글랜드에도 장로교를 허용하겠다는 밀약을 받았다. 이것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청교도 회중파와 스코틀랜드 청교도 장로교가 전쟁을 벌이는 1648년 8월 프래스턴 전투로 2차 내전이 발발한다.(Carlton 1995, Gregg 1981).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패배하고 잉글랜드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된다. 찰스 1세는 국익이 아닌 개인적 사익을 위해 국가를 운영하였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가 사형판결을 받고 1649년 1월 30일 참수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처형한 잉글랜드 공화국은 "정통성이 없는 불법 정권”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로써 공화국의 종교정책에 반대하고, 스코틀랜드만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망명중인 찰스 2세를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종교적·정치적 조건으로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조약”을 체결한다. 그 조약의 내용은 1)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Presbyterianism)를 국가교회로 인정할 것. 2)국왕의 통치권을 스코틀랜드 의회와 협력하여 행사할 것. 3)찰스 2세는 과거 찰스 1세의 실수를 인정하고, 비(非)장로교 세력을 배척할 것. 4) 스코틀랜드의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존중할 것이었다. 찰스 2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1650년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왕으로 즉위했다. 크롬웰은 곧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전쟁(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이 발발했고, 찰스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잉글랜드의 회중파는 공히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고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문답을 제정하였으며, 공동의 신앙을 공유했다. 다만 정치체제에 있어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정치를 주장하고 잉글랜드 회중파는 그동안 겪었던 천주교와 국가체제의 간섭을 거부하는 독립 체제를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많은 갈등과 토론이 있었으나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1648년 회의를 마치고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1658년 9월 존 오웬을 비롯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조지프 카릴 등 옥스퍼드 신학자들의 주도로 영국의회에서 결의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변형시킨 사보이 신앙고백을 제정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이후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 실질적인 군주로서 재위하게 되자 성공회를 강화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개혁파 청교도 장로교가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청교도 회중파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거하고 잉글랜드에서는 몰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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