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최근에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회심준비론은 청교도 의 그리스도인 신앙 양태로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지만 14세기 흑사병이 가져온 “인클로져 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인한 경제체제 변화와 종교개혁의 여파로 로마 카톨릭의 봉건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충돌로 인한 결과적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에 논의된 과정을 살펴보면 회심 준비론의 용어 "정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이한 관점으로, 청교도의 “회심 준비론”(preparation)과 알미니안주의와 로마가톨릭의 “준비주의”(preparationism)의 대립이고, 두 번째로는 회심 준비론이 주로 회중파 교회에서 나타난 신앙형태에서 교회 조직의 정치구조에 대한 배타적 관점이 논쟁을 부추켰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청교도가 주장하는 회심 준비론이 성경에 단정적인 표현이 없다는 점에서 성경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해서 1, 회중파 교회의 형성 2,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회심 준비론 3, 성경적 회심 준비론으로 3회에 걸쳐 살펴보려고 한다.
1, 회중교회 형성
1) 배경
16세기 영국은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3개 연방으로 구성되었고,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는 왕이었던 형 아서가 후사 없이 사망하므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형의 아내 카탈리나를 아내로 맞아야 하는 정략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카탈리나는 헨리 8세와 사이에서 7차래의 임신을 하였으나 사산과 출생 후 사망을 반복한 끝에 메리1세 딸을 얻고, 왕이 될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헨리 8세는 후사를 위해 이혼을 결심하고 교황청에 청원하였으나 거절 받는다. 이에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독립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을 발표하였고, 교황청 역시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에는 이미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독자적인 교회를 원하는 종교개혁의 열풍이 일어났고, 1526년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c. 1494~1536)’이 라틴어로만 쓰여 있는 성경은 일반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아시워 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유럽에서 인쇄하여 밀반입했다. 이로써 민중들이 성경을 읽고 직접 이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교 개혁사상에 따라 ‘개인 신앙의 자유’라는 이상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1535년 로마 카톨릭에 의해 플랑드르(현 벨기에)에서 체포되어, 1536년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1538년 잉글랜드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토마스 베켓 성소를 파괴하여 성인의 시복과 성상 제작이 우상숭배라는 개신교적 신앙을 공식화하였고, 1539년, 헨리 8세는 크롬웰의 지지하에 ‘틴들’의 번역을 의존한 "대 성경(Great Bible)"을 출판하여 모든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여 모든 교회에 비치되었다.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553)는 1547년 9세에 등극하였고, 섭정인 외삼촌 ‘서머싯’ 공작은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개혁하는 것을 뜻하였으나, 헨리 8세의 수장령 이후 카톨릭과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에 대한 어떠한 대비를 하지 못하여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신학적인 문제와 전례 등은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게다가 ‘인클로져 운동’(Enclosure Movement)의 영향으로 국가 전체는 대 혼돈 상황 그대로였다. 1549년 영어 공통 기도서를 도입하고 영어로 된 예배를 강요하며 성직자의 독신제 폐지, 성상 파괴, 성례전 축소 등 전통적 신앙의 관행을 폐지하였으나, 급작스런 종교적 전환은 민중들의 종교 생활 관습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급기야 ‘노픽’Norfolk 지역에서 ‘로버트 케트(Robert Kett)’가 주도한 ‘케트 반란(Kett’s Rebellion)으로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노섬벌랜드 공작’에 의해 정복되고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
Kett’s의 봉기는 인클로져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으나 반란의 요구와 참여자들의 행동에는 종교적 불만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정치가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체제를 급격하게 전환하므로 나타나는 충격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럽전체 사회가 로마 카톨릭의 봉건사회체제와 종교개혁사상인 자본주의 사상의 대 충돌여파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에드워드 6세에게 그대로 물려졌다. 섭정인 ‘서미싯 공작’은 급격한 종교체제 변화가 가져온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 과정을 거쳐 개신교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갖고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Kett‘s의 반란 진압에 대하여 ‘노섬벌랜드 공작’과 권력 암투에서 패배하였다. 섭정이된 ‘노섬벌랜드 공작’은 반란을 진압하여 주동자를 처형하고, 루터파와 칼빈파 등 종교개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와중에 에드워드 6세가 심각한 병에 걸려 1553년 16세의 나이로 사망 직전에 이르게 되자, 헨리 8세가 제정한 직계 왕위 계승법에 따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Mary I, 1516년 ~ 1558년)가 왕의 계승자가 되는 것을 염려하였고, 노섬벌랜드 공작은 개신교로의 종교 개혁이 무산되는 것을 염려하여 헨리 7세의 딸이며 메리의 손녀인 자신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가 왕의 근친인 것을 감안하여, 왕위를 주장할 수 있으므로 후계자로 지명하게 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메리1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이미 왕위 계승권이 복귀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드워드 1세가 왕위 계승법을 부정하고 섭정에 의해 방계를 내세운 조치에 부당함을 내세우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된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거병하자 추밀원은 내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메리 1세의 왕위 계승(1556~1558)을 인정하고, ‘제인 그레이’는 즉위 9일 만에 폐위되었다.
즉위한 메리1세는 신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것을 목적으로 1553년 9월 개혁파 신학자인 ‘존 브레드포드,’ ‘휴 레티머,’ ‘존 후퍼’와 같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의 ‘존 로저스’등을 대거 런던탑에 투옥시켰다.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교회 재산 문제에 대해서도 교황이 메리 1세의 의견에 수락하자, 메리 1세는 옛 ‘이단 처벌법’을 부활하여 1555년 2월 5일 런던탑에 갇혔던 신학자들과 283명의 개신교인들을 줄줄이 화형으로 처형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개신교도(장로교, 독립파, 국교회) 800명은 해외 여러 지역으로 망명을 선택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 ‘알폰소 데 카스트로’ 등은 메리 1세의화형집행을 잔혹한 처사라고 반대하고 우려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잔혹한 종교정책을 자행하여 ‘피의 메리’(Blood Ma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시기 많은 개신교도들은 핍박을 피해 잉글랜드를 떠나 네덜란드, 스트라스부르, 스위스, 등지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때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John Nox는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신학을 배우게 된다.
메리 1세의 사망 이후 헨리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엔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튜더가)가 카톨릭 신봉자인 이복남매 메리 1세와 개신교 신봉자 에드워드 6세의 상반된 종교 정책을 잇는 복잡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1558~1603) 왕위에 오르자 로마 카톨릭교회의 강력한 권위와 반발, 종교 개혁자들과의 관계를 동시에 심각하게 봉건체제 와해를 이끌고 있는 ‘인클로져 운동’도 고려해야 했다. 이에 종교적 안정을 위해서 두 사이에서 균협잡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헨리 8세가 제정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의거하여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종교 회복법과 통일령(Act of Uniformy, 1559)을 입법 발표하므로 국교회의 기틀을 튼튼하게 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국교회는 신학과 전례면에서는 카톨릭과 별 차이가 없는 주교제를 유지하여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고, 메리 1세 때 시행하던 이단처벌법은 폐지되었으며, 국교회의 전례에 불참하더라도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국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강력한 재제로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칼빈주의 영향으로 네덜란드, 스트라스부르그, 제네바 등지로부터 전해오는 종교개혁의 바람은 잉글랜드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장로교의 원칙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기를 바라는 청교도들이 많았으며, 국교회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청교도와, 국교회 체제를 완전히 결별하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교회를 설립하려는 또 다른 청교도 단체가 등장하는 등 저마다 개혁에 대한 사고를 표출하고 있었다.
2) 회중(조합)교회 등장
국교회 목사인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은 1580년경 분리파 원칙을 제시하고 Norwich에서 개혁적인 설교로 국교회 체제를 비판하고 독립적인 교회 공동체를 세웠으나 박해로 성공하지 못하여 네덜란드로 망명, 회중교회를 설립한다. 그는 1582년 독립교회 사상이 되는 “A Treatise of Reformations Without Tarrying For Any”(기다리지 않는 개혁)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국가 교회의 부패와 강제성에 대응하여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교회(Independent or Congregational Church)를 제안했다. 그 원칙에는 1) 자발적 신앙, 2) 독립적 운영 3) 성경적 원칙, 4) 신앙의 자유로 하였다.
로버트 브라운이 이런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잉글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환경에도 한몫 했다. 14세기 유럽에 강타한 흑사병으로 잉글랜드 인구의 40~50%가 사망하여 농업 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발생하였고, 엎친대 덮친 격으로 자연스럽게 진화되어가는 사회 환경에 인클로져 운동“Inclosure Movement”이 일어나 “양들이 사람을 먹어 치운다”는 말까지 돌았다. 국가 경제는 양모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양모를 수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고, 지주들은 집약적인 곡물 농업을 줄이고 노동력이 덜 필요한 양을 기르는 목축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지주들은 양들을 기르기 위해 많은 목초지가 필요하게 되었고, 영주와 상호 의존적 관계를 맺으며 공유지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했던 농민들이 양들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생계를 위해 도시로 밀려나야만 했다. 목축업으로 전환된 토지는 양을 기르기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설치해야 했는데 이것이 인클로우져 운동“Inclosure Movement”이다. 이것은 곧 종교적 입장에서 카톨릭 교회의 윤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봉건적 공동체 농업체제의 붕괴로 이어졌고, 도시로 이주민은 종교적 경제적 불만을 품고 자본주의 체제의 새로운 신앙인 청교도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는 또 다른 하향식 통치 체계를 지닌 카톨릭과 유사한 국가체제로서 국교회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국교회 체제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되는 독립교회주의(Separatism)를 주장했다. 그는 칼빈주의의 신학적 교리는 받아들이되 각각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야 하며,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이며, 성경에서 발견된 초기 교회들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형태를 모델로 삼아, 교회의 모든 구조와 운영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3) 회중교회의 성경적 표지
로버트 브라운의 모델에는 국교회와 장로교회와 뚜렷하게 구별된 성경적인 표지가 요구되었다. 봉건 공동체제하에서 카톨릭의 신앙 양태는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위를 통하여 사제가 집전하는 ‘성례전’(7성례전 :세례, 견진, 성체성사, 고해, 병자성사, 성품, 혼인)을 통해 받는다. 미사(성체성사)는 중요한 성례로 간주되고, 사제가 집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개혁의 개신교로서 장로교는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인적인 굳건한 “칭의와 믿음”을 원칙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강조했다. 로버트 브라운이 제시한 신앙표지는 개별적인 “신앙경험으로 회심”이었다. 이것은 개혁주의 내에서 정치적 체제와 구별된 또 다른 신앙의 양태로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칭의와 믿음”을 잉글랜드 회중파는 “회심”을 표지로 하게 되었고, 회중파는 ‘존 스미스(John Smyth, 1570–1612),’ ‘토머스 헬위스(Thomas Helwys, 1575–1616)’등에 의해 “침례교”로 독립하였고,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이끄는 독립 교회파(Independent Churches)가운데 소수가 스코틀랜드에도 형성되었다가 18세기에 장로교회와 연합하여 크게 성장한 것이다. (다음, 개혁주의 스콜라적 회심준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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