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참 그리스도인 인가?

생명있는 신앙 2009. 11. 15. 20:54

고전 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있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하였으니

지혜있는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세대에 변론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하나님의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참고]

● 고린도 전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워졌다(행 18:1). 처음에는 회당에서 강론하다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회당 옆에 사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거하며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행 18:11).
● 기록시기 :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무는 시기의 마지막 무렵에 기록하였으며 AD 55년경 기록하였다.
● 기록목적 : 바울은 글로에의 집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또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여러 가지 질문이 적힌 편지를 들고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였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전서로 대답하였다.
● 기록장소 : 에베소
● 내용 : 고린도 교회 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의 분파가 생긴 것을 꾸짖고 오로지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권면 했다. 또한 근친상간, 법정 소송문제, 우상의 제물, 결혼, 성찬, 영적 은사,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한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바울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였으며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연보를 저축하라고 권면 하였다.
 이 편지는 고린도로 방문한 고린도의 3형제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Introdu. to 2 Cor. p359에서 plumptre(플럼터)는 디도가 전달하였다고 주장한다.

 

[설교]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저는 군대간 자식을 둔 어머니들의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읽어주는 일을 종종했었습니다.

어렸을때 저의 글 솜씨가 꽤나 있었나 봅니다.

편지란?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감정이 이입되고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잘 드러나도록 글을 쓰는 문장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위로 형들이 넷이나 있었고 제가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에 위로 세 형님들은 대부분 군대에 가 계셧습니다.

당시 기억으로 첫째 형님은 전투경찰이셧고 둘째 형님은 육군, 셋째형님은 해병 하사이셨습니다.

바로위의 형님은 같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입니다.

 

형님들이 셋이나 군대에 계시니 편지를 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편지를 곧잘 썻던 모양입니다.

일주일에 두통정도는 편지쓰는데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고 그 편지의 내용의 일부를 통해 당시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위의 참고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기간에 에베소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은 고민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22절에서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2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5:36-18장 22절에 기록된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관한 말씀은 기회가있을때 전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제 3차 전도 여행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는 보내는 것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18장 22절에서 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면 제 3차 전도여행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 있다가"행 18:23

"떠나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히 하니라. (행18장 23절)"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좀 휴식을 취한후 다시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오래 머물지 않고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거쳐 전도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하는 중간에 메세지의 장면을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8장 22절의 내용을 보아 누가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을 함께하지 않았고 에베소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하는 본문의 내용으로 인하여 제목을 "그리스도인의 소경"이라 하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여러분이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앞에 바른 자세를 가지고 당당히 서게할까 하는 생각으로 이 말씀을 준비 했습니다. 

나의 주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무지에 갇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께워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오늘날의 몇몇 교회들이 바른 교회처럼 가장하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 슬픔을 이길수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의 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방법이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관계있지 않으면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으로 편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은자에 관해서 말합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자들이 위와 같은 문제에 관해서 갈등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이 문제에 대해서 저자가 설명해야할 필요적인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위와 같은 필요적인 상황에 부딪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 바울이 편지를 써야하는 상황으로 가봅시다.

당시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때 행18:1에 아볼로라 하는 사람이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에베소에 왔다가 부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권면을 듣고난 후 바울이 이미 세워두고 나온 고린도로 들어갔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들어갈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천거서를 줌으로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이기간 동안 바울은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다녀 에베소에 와있었고 이때 고린도 교회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고린고 교회에 관한 소식은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의 서신(고전 1:12)에서 본바와 같이 각파의 선생들이 넘쳐났고 바울파,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아볼로파로 나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각종 은사를 중심으로하는 종교적인 행위와 갖가지 이상 행위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하고 있었고 급기야 교회는 분파 되고 만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성찬은 끼리끼리 나뉘어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있을수 없었습니다.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교회에서 윗자리는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소외를 당하여 퍙들과 사랑을 찾아 볼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거짖 종교까지 활개를 치고 있었으며 유대주의 그리스도인까지 교회에 깊숙히 자리를 잡아 바울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파벌, 교리및 은사, 배반, 위선,

이루 말할 수 없이 교회는 혼란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최초 교회를 세운 바울은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교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가 어떤 도시입니까?

 

물질과 문명이 발달한 상업도시였으며 자본이 풍부한 도시였습니다.

다른 도시에 비해 굶주림이 없었고 일자리는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어느 사회에나 이런 자본의 불평등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민족마다 삶과 사회적인 구조체계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들끼리 모였고,

이방인들은 각기 자기 민족을 중심으로 아니면 종교를 중심으로 자기들의 고유의 양식을 가지고 로마의 통치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이 도시속에서 일어난 상황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를 중심으로하는 물질문명의 사회를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오늘의 물질문명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약 2000년이 지난 오늘과 이전의 역사적인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안에서 교회가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교회를 방해하는 교묘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까지 나서서 교리적으로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에 혼란을 가중하여 고린도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떻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고린도전서 1:13-17에 아주 잘 나타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세례를 중심으로 해서 회원의 구성이 이루어집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으로부터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확실한 자기 인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이 불과 몇사람이 안됩니다.

고전 1장 14절에 보는 바와 같이 세례를 준 사람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외에 스데바나집 사람들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에 모인 그리스도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이미 세례를 받고 왔거나 아니면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에베소에서 건너간 아볼로로부터 받은 사람, 혹은 베드로에게 받은 사람, 아니면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세례를 받았던 사람일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서신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보아 교회가 파벌로 나뉜 것이 세례로 말미암았다고 불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이것은 바울의 사도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데 중점이 있다고 자기의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 이후로부터 종교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지식에 까지 자라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최고의 사명은 행 27:17-18)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전도를 하여 세운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믿음과 회심이후에 바울로부터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지식에 감화를 받아 고린도 교회에 일원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선생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다른 선생들이 와서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자 그들의 신앙은 일순간에 변질된 양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아쉽게도 교회에는 바울선생이 지도하는 올바른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는 선생들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앙의 주관을 가진 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것도 이 말씀에 중심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기에 앞서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나 힘이나 혹은 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방인에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선포한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다시한번 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잘알고 계십니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받아야할 형벌입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은 표징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는 바로 당신과 내가 짊어져야할 비극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류의 비참함을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실패를 의미합니다.

모든 인류는 십자가앞에 결코 자유스러울수 어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앞에 결코 자유스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짊어지고 이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자유를 주신 분이 계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세상에 보냄을 받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 십자가에서 자유를 얻게하신 분이 계십니다.

물론 이세상을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야하는 비참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이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피할수 없는 형벌을 앉고도 아무 감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 부름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회심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인류적으로 적용되는 저주를 피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인간은 십자가의 도를 망각한체 자기의 주관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워 복음의 광체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아직도 교회는 어두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고통당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접하면서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아주 깊은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어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문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으로 성경을 만나려 하는가?

차라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 전한다면 하나님앞에서 실수하지 않을 것인데.

 

목사란?

하나님의 백성을 주님앞에 세우는 직업입니다.

교사의 직업이므로 목사의 가르침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가 아름다운 모습을 하도록 하는 입니다.

성도의 몸에 묻은 저주의 때를 벗겨내고,

성도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 있는 온갖 저주의 쓰래기들을 앃은 다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 넣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서 씻기고 새로운 것을 영혼 속에 채워 넣는 사람입니다.

그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단순히 가르침을 맡은 교사이면서 그리스도의 종일 뿐입니다.

능력을 행하라고 보낸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능력을 행하는 말씀을 하고 있지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진리는 좁은 문입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넑고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애워 싸더라도

주님앞으로 가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기 까지

우리는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도록 .....................

기도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