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 나타난 일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사위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역사의 현장의 한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믿음뿐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전하라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지 아니함으로 인해 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태양이 오르고 지는 제한된 현장에서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고
2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감사하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복음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도덕을 중시하는 수많은 지혜자들에 의해 교육된 사람들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교수된 사람들은 굳어진 마음에 의해 마음의 문을 열수 있는 여유마져 포기한 것처럼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살인적인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전달 되기 이전 부터 이미 거부 되기 위해서 준비 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귀에 복음이 들어가자 완강하게 거부되고 심지어 귓가에 복음의 잔재라고 남아 있을까하고 귀를 닦아내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사람들이 복음과 GOOD NEWS 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알수 있는 것이라면
초자연이 자연속에 온 이유를 이해가 된다면
하늘의 것이 땅으로 내려온 것을 알수 있다면
지혜자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탠데
하나님은 그것은 이미 아시고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을 주관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람은 소경으로 있고 깨닫는 지혜도 없고 ......................
놀랍습니다.
성경을 한번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은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울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2:24-25)
사람의 지혜로 알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오만을 떨게 되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고전 1:21)
부활의 역사 현장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에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부활의 소식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사람을 구원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상면 한 자리에 관해서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이 자연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공간적으로 지중해 연안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분에 관해서 말입니다.
오늘은 그분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함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할때 우리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생각부터 해야 하는데 우리의 이성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단순하게 인식하거나 문제시 하지 않고 지나치느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일때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언어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좋은 경우가 잇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 본바라"(요일1:1)
사도 요한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진실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사도 요한이 환상적으로 추리소설이나 공상을 상상으로 썼다고 생각하나요?
오한일서 1장을 계속해서 읽으면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합니다.
"이는 아버지와함께 계시다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이시니라"(요일1:2)
우리가 오늘 살펴 보고 말씀을 듣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 우리에게 나타내셧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오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아들이 이땅에 오셨다가 오늘 부활하신 것은 그분이 죽으셨다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입니다.
왜 부활을 말합니까?
그분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죽으셧습니까?
이 말에 우리는 고개를 떨굴수 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어떻게 사람을 위해서
사람을 구원하시게 위해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고난을 당하고
사람에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위의 본문은 아주 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은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때문에
우리가 담당해야할 죄의 댓가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입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평화와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셨는데 단순이 우리의 죄악과 우리를 대속해서 감당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죄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 인류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에 관해서 성경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ㅏ.
이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66억의 인구 가운에 66억의 사람들이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아프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병은 모든 사람에게 침투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음의 병에 걸려 있고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그 증상이 나타납니다.
기침을 합니다.
두통이 아픕니다.
열이 납니다.
몸살이 있습니다.
감기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의 질병은 하나님에 관해서 무지합니다.
죽음의 행동을 합니다.
죄의 행동입니다.
죽음의 세계를 향해서 갑니다.
왜냐하면 옳바른 이성이 파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이미 죄의 결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고
평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고통을 당하고
인생의 삶의 아픔에 노출되어 있으며
항상 문제 가운데 휩싸여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평온을 알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에 방치 된 상태로 살다가
결국은 죽게 됩니다.
이것은 죄의 댓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신 것은
사람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향해서만 갑니다.
생명이 그에게 공급됩니다.
질병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생명을 공급받기 때문에 죽음을 이겨 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나타나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죽음에서 다시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다시 사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왜 우리에게 평강을 말씀하셨을 까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평강을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한주간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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