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6-2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본문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히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별렸노라 하셨느니라(10:16-21)
설교 연구
1. 사명 : 교회 개혁
2. 설교 목적 :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하고 교회를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안에서 진실한 협력자가 되게하기 위한 믿음을 성장 시키는 목적
3. 설교 본문 : 로마서 10:16-2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4.. 성경신학적 연구
1) 본문과 공통적인 관계
2) 본문의 역사적 배경
3) 저자의 사상적 배경
이서신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때 기록한 것이다. 그가 3차 전도여행동안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 되었다가, 오랜 갈등끝에 실마리가 풀렸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2차로 방문하여 그가 목적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한 돈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떠나면서 그리이스어세 3개월동안 머물때에 기록한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로마서 서신내용중에 “예루살렘에서 일루이곤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이제는 이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롬15:19-23)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것을 볼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이 목적한 뜻을 이루고 성취한 기쁜 마음으로 만족해 하는 표현임이 분명하다.
만약 그가 고린도에 고린도 가이오 집에 약 3개월간 머물면서 서바나로 갈 일을 미리 준비하려고 로마에 서신을 기록해서 뵈뵈로 하여금 전달하게 하고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이방 성도들이 협력한 헌금을 전해주기 위해서 내려간다.
(1) 저자의 의도
서바나로 가기 이전에 로마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미리 서신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서신의 중요 내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이신칭의에 대한 기독교의 중요 교리가 기록되었다.
(2) 수신자의 상태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다. 그러나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이미 한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그들에게는 글라우디오 황제때 유대인들의 로마 추방명령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지금은 상당한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들어 왔다. 그럴지라도 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이방인들로 구성 되어 있을 것이다.
유대인의 추방 명령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스의 문제로 인하였다. 결국 그리스도의 문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의 소동이다.
그들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종교적 문제 때문에 소란을 피웠고,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때에 사도행전 18장의 부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추방당하여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추방당한 로마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에 상당히 많은 로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수신자의 상태는 대부분이 유대인들중에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였다.
그들은 바울의 서신을 더욱 간절히 원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로마에 대한 소식은 아굴라와 부리스 길라를 통해서 정확하게 전해들었을 것이다.
(3) 저자의 자료 수납
자료는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4) 본문의 의도
(1) 복음을 무시한 이스라엘
“그러므로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깊이 오해하고 있었다.
①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의를 이루려고 하였다.
② 유대인들은 의식적인 복종에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의 의로만이 충족 시킬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요구인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억지로 노력하려 했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 것이다.
(2) “믿음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복음은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사람들의 손을 빌어 전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열심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 되는 것과 같이 보여지나 실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 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에 의해서만이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이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곳에 와 있다는 분명한 확신 진정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3) 모세의 예언
“내백성이 아닌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낼 수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통해서 이 땅에 구원의 영광을 선포하실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강림이였다.
이것은 율법안에서 충분히 약속되었고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하셨다.
모세로 말미암아 말해진 내용이 곧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였다.
(4) “구하지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셨다”
(5)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5) 성령의 의도 (성경의 사고)
5. 교리적 연구
1) 하나님의 섭리하심
나라의 본 자손이 버린 구원을 선지자의 약속대로 이방인이 참여하게함
2) 하나님의 주권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온 세상을 하나되게하려하셨음과 이스라엘 나라가 온 세상의 제사장 나라였음을 확인 시켜주심.
그러므로 마땅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사랑하되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했었어야했는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함.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역사하시고 지금도 친히 역사하심.
6. 성도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할 내용
감사의 믿음은 들음으로 오는 것임, 말씀을 듣는자의 자세는 참으로 중요함.
7. 설교의 내용
1) 설교 내용 중 반드시 설명 되어야 할 배경(중심적인 구속적용 내용)
2) 설교 요약
설교 내용
2차 전도 여행중에 가장 힘들고 어렵게 세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에베소 지역 선교의 발판을 구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갔다가 다시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여러지역을 들러서 성도들을 굳게하고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부탁하고 에베소에 왔을 때 그 곳에는 어떤 제자들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는 알고 있었으나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햇습니다. 갈라디아를 굳게하고 돌아온 사도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어떤 제자들에게 안수하자 오순절때 사도들에게 임하였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였고 방언도하고 예언도 하는 놀라운 이적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믿고 있으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해서 고여있고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신약은 이들의 거듭남과 같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강조를 아주 두드러지게 합니다. 특히 바울에게서 더욱 강조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접하게 되고 바울은 발견되지는 않은 제 1차 서신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서 그리스도인들의 비 도덕적인 행위를 책망하였습니다(고전 5:9). 이렇게 바울에게 시작된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갈등은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의 형제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슴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바울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안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틈을 타서 교회를 혼란 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주의의 비판적인 독화살을 맞아 모두 유대주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짓된 진리에 포로가 된 고린도 형제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바울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중 몇 몇 사람들은 온순절 성령의 강림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외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이들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령으 로마로부터 추방을 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과 혹은 사도들로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일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에 관심을 갖게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벌써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주의 교사들은 베드로에게 가르침을 받아 믿는 것이 정통적인 기독교를 믿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베드로를 정통적인 사람을 주장하면서도 베드로가 율법을 배척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는 추종하되 그 가르침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믿되 성경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와 웨슬레안이라는 특정 사람의 파벌은 주장하면서 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추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칼빈주의자라는 대열에 들어서서 엉뚱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변질되고 잘못된 유대주의 그리스도파의 가르침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생은 바울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혔습니다.
이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분파를 가져왔습니다.
결국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한 정통성에서 바울을 배제하고 그의 사도성을 문제삼았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던 고린도인들은 잘못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바울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참 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본래 바리새인이였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과정을 마친 최고의 율법학자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외침은 바울이 자기가 배운 율법을 배격한 변절자로 둔갑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변절자라고 매도했습니다.
또 일부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상당한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도들은 아직도 ‘율법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고, 할례를 주장하는등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들의 율법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억지로 적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했거나 듣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에 가입되려합니다.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부정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퍼지자 고린도인들은 너도 나도 베드로파 아볼로파에 가담하려고 줄을 잡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교회는 사분 오열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는 처움 만났던 부리스 길라와 아굴라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바울의 전도여행을 돕기 위해 에베소에 있습니다만 아직도 고린도에 이들과 관계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아굴라는 그들이 바울의 복음 전도하는 일에 함께 전심을 다하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아굴라는 변화를 받고 난 다음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는등 헌신적으로 바울을 도왔습니다(행 18:18).
또한 바울에게만 세례를 받았던 그리스보와 가이오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가이오역시 바울의 복음전도하는 일에 열심으로 도왔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를 회생하도록 역활을 한 교회의 기둥이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터위에 새워진 교회의 중요한 기둥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견고한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공격한 사단의 궤계는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안정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안에는 율법을 조금씩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연구한 율법의 지식을 사도들로 배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진정한 사도임을 다시한번 확인 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밤에 나타나셨던 그 말씀의 진실함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방문하여 교회를 든든히 할수 있었던 것은 기등이 된 아굴라와 가이오 등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의 뜻이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안정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로인해서 잠시동안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웠던 거짓된 믿음을 가진 철새신자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남은 많은 무리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더욱 열중하여 마음과 신앙에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이방와 예루살렘의 연합
하나님의 복음이 시작된 땅 예루살렘은 지금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흉년과 이방인들의 공격과 또한 로마로부터 독립을 받으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에 의해 로마 정부는 유대와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알랙산드리아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의 폭동은 로마의 황제의 미움을 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유대내에서는 로마오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로인해서 예루살렘의 최초의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성내의 경제상태는 피패해졌고 양식들은 흉년으로 더욱 말라버렸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서 이방인들의 협력을 부르짖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이 일년 육개월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워갈때 예루살렘을 위해서 계속해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로 떠나고 아볼로가 고린도에 들어온 이후로 교회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과 바울의비난으로 인해서 분파되어버렸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루살렘을 위한 도움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갈수록 어려웠습니다.
이방의 여러지역에서는 헌금의 액수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마다 방해를 놓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도 이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진행하는 과정임을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희생은 이방과 연합을 위한 고통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바울과 및 여러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발벗고 뛰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이제 예루살렘이 굶주림에서 해결하려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고린도 교회도 처음 예루살렘을 위해서 헌신하던 그 사랑의 마음을 다시 불러 일으켰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시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하였습니다.
작은 수의 모임이 예루살렘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고린도 형제들은 마음을 다해서 헌금하였습니다.
어떤이들은 힘에 부치게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을 멸시하던 유대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방인들은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구원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고(눅 24:47) 그 구원을 지금 자기들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온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이라는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나그네 된자가 야곱의 족속에 가입된 사건의 성취입니다(이사야 14:1-2).
로마에 보내는 서신에 본문을 불러 기록하게 하고 있는 바울의 머리속에 생각에는 아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선택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고 있는 바울의 글입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10:1-15:123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부르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사도와 유다 대신에 선택을 받은 맛디아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다면 바울에게는 독특한 사도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는 구약에 능통한 히브리 철학자 입니다.
그는 구약중에서 이방인이 구원에 이를것을 알았고, 이방인이 유대인 대신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실때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신 확증된 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온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예루살렘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뭄과 유대주의 사람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혼란한 상태에 빠져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 받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에 대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저 유명한 사람들이 살던 땅은 이제 영혼에 황량한 세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곡된 세속화의 가르침이 교회를 피페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육체적인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에서 여러분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뭄을 주심으로인해 그들은 심한 가난에 허덕이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손을 통해서 받은 것이 너무나 값진 선물이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흑암에 처해서 고통중에 있어야 하나 그들은 값진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에게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까?
우리의 재산을 있는대로 나누어서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있는데로 힘에 부치게 헌신하엿습니다.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인들의 아낌없는 선물을 받아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이방인의 사랑은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이였습니다.
바울의 계획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서 아시아와 마게도냐 그리고 여러지역들을 생각했습니다.
이 넓고 광활한 땅 아시아와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 전역이 바울의 발자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세번씩 발자욱을 남겼습니다.
바울이 발이 닿고 머문 곳마다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였습ㅋ니다.
바울을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구원의 말씀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새로운 변화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한 누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들어서 온 세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도록 역사하셨다(사도행전).」
「그것은 바울의 역사도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께서 사용하신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모든 사역을 바울에게 상으로 돌렸고 바울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예로운 칭찬을 얻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이제 어디로 갈까 하고 내일을 향해서 눈을 돌려 보았습니다.
“로마”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바울은 가야 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세계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로마”
그곳은 바울이 가야할 곳입니다.
바울은 오래전부터 로마로 가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로 가는 길은 쉽사리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로마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예루살렘의 교회가 어려움에 빠져 있어서 구제의 손길로 부르기 때문에 마음을 예루살렘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또한 로마로 향하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쉽사리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려운 고린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로마로 가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이지역에서는 일이 다 마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의 성도들이 헌금한 사랑의 예물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고 로마를 여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행전 19:21).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이제는 로마가 바울의 전도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에서 바울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협력해줄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협력해 줄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출발하던 그 즈음에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 문제로 인해 서로 투쟁하는 것을 미워하였습니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때에 맟추어서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바울은 생계를 위해서 장막을 치는 사업을 하는 아굴라에 집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과 아굴라는 주종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굴라는 로마에 있을 때에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유명한 바울이 자기집에 일하려 온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굴라에게 보음을 전했습니다.
아굴라가 안식일에 회당에 나아갔을때 놀랄 만한 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전도하던 그 유명하다던 바울이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고린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동역자를 구해야 합니다.
아굴라는 아직까지 반신 반의하였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울의 말로 설득을 당하여 이전보다 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바울의 복음전도에 협력하는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주인이던 아굴라가 바울을 선생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최초에 복음을 전할때 자기의 재산을 팔아 전도 사업에 쓰도록 한 바나바와 같이 아굴라도 자기의 수익을 바울의 복음전도에 쓰도록 아끼지 않고 돕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이와 같은 중요한 일에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까?
여기에 깊이 간섭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요.
사람의 지혜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니의 섭리를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게 하신 모든 역사 가운데는 구속사의 중요한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늘아래 모든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보고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의 마음에 유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심으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려 하는 마음을 주시고 마게도냐를 지나 아가야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때 본도 출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고린도에 도착하여 정착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로마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발판을 다져줄 아굴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바울의 로마 전도 여행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로마 추방 명령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위한 전초적 발판의 역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서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과 인척이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안부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흩어졌던 유대인들의 천거에 의해서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였습니다.
특별히 장막업을 하는 사람, 아굴라는 로마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교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를 바라보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 전도 계획은 이제 마음속에서 활발하게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받아들고 읽어줄 사람들은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에 정착해 있던 사람들과 관계 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만약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도중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면(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시지 않았다면) 로마에 가는 길은 무척 험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길이 무척이나 어려웠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로마 복음 전도 길은 나섰다가 로마에서 거센 항의에 부딫히게 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황에 부딫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는 아시아와 같은 여느 도시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강력한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법 집행이 가장 신속한 지역이였으며 강력한 정치력이 존재한 곳이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 전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는 길은 정치와 법의 손길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전도에 제약을 받지 않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인의 신분증이 있었습니다.
만약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황제를 도시를 소란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거나(유대인들과 싸워서),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많이 모여들게 된다면 황제의 미움을 받아 정치적인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다른 방법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시기로 인하여 재판을 받으려가는 순수한 로마인의 신분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 가는 바울은 죄수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였습니다.
죄수의 몸속에 하나님나라의 명약이 들어 있습니다.
죄수의 몸속에는 사람이 먹으면 생명을 얻는 생명수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죄수의 몸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다가 기진 맥진하여 기력이 쇠하여진 사람들을 소생시키는 회생하도록 하는 약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을 죄수로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로마 서신도 곧 아굴라와 같은 협력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이 아굴라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시고 지금 이곳게서 아굴라와 관계 있는 로마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로마에 있는 수신자가 대부분이 아굴라와 관계있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광활한 세계를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에루살렘에서 로마까지 6개월이 걸려야 당도하는 먼 거리를 높은 곳 하늘에서 하감하시면서 섭리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섭리를 주관하십니다.
바울의 앞날과 내일의 일을 섭리하십니다.
누구를 만나야 했고,
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할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이 비밀의 섭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않으면 바울이 얼마나 고충이 많았으며 그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까?하고 바울의 공로에 박수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모든 삶은 자기의 삶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십자가의 삶이라고 담대히 증거하고,
자기의 영예를 하나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믿음을 지킨 것 뿐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말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더욱 값있게 증거된 십자가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라는 바울의 말에 자기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밖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말하는 바울의 말은 자기의 수고를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 말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는 예루살렘에서 부터 흘러나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들이 이상한 말씀을 들고 와서 그 말씀을 듣고 믿으라 한다면 우리는 당장에 그 말씀들을 배척하고 말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전파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가와서 말씀의 생명수를 받아들고 영혼을 소생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일은 본문을 보낸 이 후의 일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말 할 때 자세히 말하기로 하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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