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면서 간절한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설교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 읽거나 아니면 성경을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는 듯이 읽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국은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 적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현재 이순간에 어떤 상황이 놓여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지만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저 조차도 우리의 생의 한 순간인 이 시간에 꼭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주일에는 이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 밖에 다른 설교의 필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혹시 한 두 성도님을 중심으로 설교를 선택한다면 다른성도들에게 전혀 불필요하게 되고 심지어 예배 시간동안 잠만자다가 돌아가시는 경우가 있을까 두려워서 항상 공평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늘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꼭 필요한 설교가 되도록 한다면 교리적인 설교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어쩌면 역사적인 이야기나 혹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는 사건에 관한 깊이 있는 설명외에는 더 어떻게 말씀을 드리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비를 맞고 있으면 우산을 쓰십시요,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견디세요, 아니면 이런저런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삶에 있어서 어려움을 만났거나 즐거운일을 만났을때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식으로든지 설명을 하려고 하는 성공주의적 유혹이 설교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설교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뜻인지 설교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설교자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시달리며, 하나님과 씨름하고, 진리를 위한 분투 속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은 이 말씀을 준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하나님의 말씀은 “물위를 걸으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나를 향하여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선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제 삶에서는 물위를 걸어야 할 어떠한 상황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1주일 동안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체험한 한 주간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아니 요한계시록에 말씀하시는 무관심하시는 시대(계시록 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인식을 가지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씁니다.
언제든지 인류에게는 항상 종말의 때 앞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인류를 향한 역사의 시간을 보존하시지 않으시다면 인류는 오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까지 열심을 다해 일하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명과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의 계획도 소용이 없고, 고난때문에 삶의 귀로에서 방황하는 사람에게나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의 행복한 시간을 눈앞에 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무관심 앞에서는 시간의 끝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현 세상의 지나친 방탕과 타락의 극치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혹은 불신앙적인 삶을 살거나, 절정의 타락의 삶으로 치우쳐 버리는 사람들을 여럿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처럼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은 때도 없었지만, 세간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사람의 욕망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교회를 향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 변호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아니면 교회가 스스러 자정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급할 일일탠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묵묵 부답이시니 교회이름으로 로 더욱 하나님을 욕먹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시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정의롭고 의가 시행되고 공의로운 판단이 시행되는 옳 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곳곳에 범죄와 죄악이 난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세상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오만과 독선,
전쟁과 고통이 그려지는 전혀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 세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독제와 폭압이 자행되고 인권은 말살되고 사람은 이념과 권력의 야욕에 짓밟히고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말한마디 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비참한 사건들을 치를 떨고 살 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구나 한때는 의분이 일어나 이세상을 평화롭고 안전하며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야 겠다는 정의로운 생각들을 가질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지로 인권이 유린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억압과 공포와 그리고 대를 물림하는 가난의 시련을 벗어나지 못한 아픔의 삶이 우리에게 자행되어지고 있는 그애 말로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것이 너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현장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예배하려 나온 것이 정말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수많은 마귀들의 덧이 놓여 있고
올무와 가시가
우리의 헛디딘 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행해지는 불신과
불안,
공포,
고통,
아픔이 산재 해있는 오늘의 현주소에서
기독교인들을 사냥하는 영혼의 공격자들까지
하루 한시간인들 편하게 살수 없는 포화 속에서 살아가는 처참한 모습과도 다를게 전혀 없습니다.
저는 천국을 보고싶으면 항상 읽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번 주에도 요한계시록을 한번 읽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천국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천국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계시록을 읽어 갑니다.
다 읽어 갈 때쯤이면 항상 22:11절을 두번 세번 다시 다시 읽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마지막 날에 노아 홍수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날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
그날은 사람들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때라는 것을 미리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무척 고민을 많이 하면서 늘 조심스럽게 되씹어 살펴 봅니다.
혹시라도 제 지식이 잘못된 오류를 범한다면 제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러분들에게 까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살펴 보고 살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도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되세기며 긔 의미의 진실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람처럼 깊이 매입니다.
저는 이번에 한 사건을 묵상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입니다.
노아 홍수때!
이때를 가르쳐 주님께서도 종말의 때, 곧 주님께서 임하실 때 라고 하셨습니다.(마 24:37~39)
그때는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상이 그때를 지배하였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자주 지적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입벐처럼 말씀을 드렸습니다.
노아 홍수로 인해 인류는 한 글자를 남겼습니다.
"선"
인류의 조상 아담은 에녹이 이 세상에 온 것을 보고 자기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낸 것으로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이전과 타락이후의 삶을 비교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 야렛은 일백 육십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그가 구백 육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일백 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저는 창세기 5장을 놀랄 만큼 위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서 "이런 책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항상 감탄합니다.
이 장속에는 무수히 많은 인생이 숨겨져 있습니다.
각 인생동안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을 종종 설교해 왔습니다.
저는 오를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들은 오늘 말씀을 잘 새겨서 들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습니다.
아담이 세상을 130년을 살았고 셋은 이제 태어났습니다.
아직 한살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연대를 계산해 보겠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아담 탄생으로부터 23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점점더 노아때까지 더해 가 보겠습니다.
셋이 낳은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325년이 지났고 아담의 나이는 325세 입니다.
어떻게 되는지 잘 살펴 보세요.
제 설명을 잘 들어 보시면 아주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습니다.
마할랄렐은 몇살에 어떤 자식을 낳았습니까?
65세에 야렛을 낳았습니다.
아담의 나이는 460세 입니다.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았습니다.
아담의 나이는 622세 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았습니다.
아담의 나이는 687세입니다.
무드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이때 아담의 나이는 874세였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아담은 애석하게도 930년 곧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태어난 때는 1056년이었습니다.
아담이 죽고 난 다음 126년이 지난 것입니다.
아담은 노아가 이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인내와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기다림이 한계가 온 아담은 이세상에 처음으로 왔다가 자기의 생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창세기 5장의 연대기 설명을 들으면서 뭣을 보았습니까?
그져 숫자 계산하는 것만 보았습니까?
누가 몇 살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만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것만 계산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이것을 계산하면서 인류의 조상 아담의 기다림과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나날을 보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정신과 사고의 중심이었던 인류의 조상 아담,
그의 존재에 대해서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의 이름 하나하나에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과 인류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한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에녹이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았습니다.
무드셀라를 처음 낳고 에녹이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했을까요?
이름 짓는 일부터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수수께끼 한번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누구나 맞출수 있습니다.
초등학생도 맞출수 있습니다.
에녹이 처음 애기를 낳고 누구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을 까요?
알겠죠?
누구인지 금방 알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읽어 보세요.
이 세상에 이름을 짖는 일은 아담 몫이었습니다.
유일한 권리를 행사하는 놀라운 권력이 집중되는 작명권입니다.
이름을 줄수 있는 권리는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아담은 에녹을 보고 범상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을 늘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무드셀라라는 이름을 줍니다.
무드셀라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무드셀라는 –“너 죽으면 종말이 온다” 라는 의미입니다.
왜 무드셀라에게 이런 이름을 줄까요?
아담은 에녹을 자기의 죄에서 용서 받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었습니다.
에녹은 아담의 의지대로 하나님과 3백년 동안 동행했었습니다.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았고
총 365세동안 이세상에 있었습니다.
아담과 에녹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담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이런 에녹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자기의 범죄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보지 않았겠습니까?
아담에게는 메시아는 왔습니다.
그는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무드셀라 누가 이름을 지엇을까?
저는 아직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 이름을 지엇을 까요?
아니면 아담이 지엇을 까요?
아담이 지엇을 때와 에녹이 지엇을 때 무드셀라라는 이름의 의미가 달라질까요?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생각이 나는대로 이름을 지을까요?
오늘 이자리에 있는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이름을 줄때 아무 의미 없이 이름을 줍니까?
여러분의 이름의 의미를 아버지께 물어 보세요?
막동이 간난이도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막동이는 이제 그만이라는 뜻이고
간난이라는 의미는 고난을 이기고 일어난 세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때의 사회를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상이 흐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정신의 중심이 되는 아담이 있었고
아담이 그토록 기다리고 믿고 있는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위 아래로 아담의 말은 곧 신과 같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타락했으나 질서가 있는 세상이 유지 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으로 말미암아 말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사회는 깨끗하게 정화되었고 질서가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고 아래 자손들은 아담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견고해지던 아담을 중심으로 한 사회는 아담 뜻대로 정화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담의 나이 930세가 되었고 에녹의 나이 308세였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이었던 아담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고 죽는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죽음의 의미를 아시는 분은 이로 인한 인류에게 다가온 혼돈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죽음이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가 아담의 죽음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담의 죽음이 인류를 파괴하는 죽음으로 몰로 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이 혼돈의 세상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실망을 햇습니다.
마치 폭탄을 맞은 듯이 인류가 시작한 그 곳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어딘가 믿는 희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담이 그토록 의지하는 에녹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어린 아니였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에녹의 말은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녹이 어찌할 줄을 몰았을까요?
아니면 방법이 없었을 까요?
아담이 죽고난 후 알마 되지 않아서 에녹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에녹의 행방 불명은 인류에게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때 인류들의 정신 상태를 생각해 보시렵니까?
뭣을 생각할까요?
희망을 말할까요?
아니면 내일의 꿈을 설계할까요?
이 사회구조를 한번 보시렵니까?
연대를 계산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는 창세기 5장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놀라고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최초로 인류에게 공개된 죽음이 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급속도로 타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을 지배하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온 것은 곧 인류에게 절망을 의미합니다.
930년 동안 인류는 죽음이라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어버렸습니다.
그 충격은 핵 폭탄 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이곳에서 에녹이 과연 세상을 이끌고 갈수 있는 힘이 있을까요?
그러려면 이 사회의 연령구조를 한번 살펴 봐야 합니다.
아담의 아들 셋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 까요?
계산은 간단합니다.
아담의 나이를 생각하면 되니까요.
아담의 나이에서 셋이 태어난 나이를 빼고 셋의 나이를 계산해 보세요.
아담이 930세에 죽었습니다.
셋은 130년에 태어났고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으니(235년)이고 807(1042년)입니다.
셋은 꾀 오래 살았지요?
아참 노아가 언제 태어났습니까? 1056년인데 셋은 노아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셋 다음에 에노스는 어떤가요?
235년에 태어났습니다. 90세에 게난을 낳았습니다.
몇 년살았습니까? 815년을 더 자녀를 낳았으며 905년을 살았습니다.
죽은 년도는 1140년입니다. 아버지 에노스 보다 먼저 죽었군요
게난은 어떻습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이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담의 아들 셋으로부터 에녹의 아버지 야렛까지 줄줄히 살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에녹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에녹이 세상을 이끌고 갔을 까요?
인류의 절망스런 상태를 눈으로 목격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수히 전달하던 에녹이 한계를 느끼게 된 원인을 알수 있습니다.
안되지요?
설사 무드셀라의 이름을 에녹이 지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너 죽으면 종말이 온다라는 의미를 가진 무드셀라의 이름이 말하듯이 종말은 예견 되었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는 아담이 죽은후 787~790 년이 지나서 일어납니다.
죽음의 영향이 700년동안 인류를 지배하는 동안의 사회상을 볼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이 타락해버린 인류의 모습은 종국적으로 종말을 불러오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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