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람의 구성과 의지 자유
1. “영”과 “영혼”
사도는 “영의 생각”이 육체가 없이 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영으로써 육체의 행실을 죽이면”이라고 말하고 “영”을 육체 안에 내주하여 지배력을 가지고 육체의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내재하는 존재에 의한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성의 회복된 상태 곧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안 거둬 가신(창 6;5) 하나님의 영이 영혼에 거하는 상태(롬 8:9), 곧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되어져 사람의 영혼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생각”은 2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거듭난 영혼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한 영의 생각, 2)다른 하나는 단순한 영혼의 생각입니다.
1) 후자의 단순한 영혼의 생각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육체에 거한 영혼이 마음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기대할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유는 영혼은 타락해있고 영혼에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영혼의 생각을 살펴보려고 하는 의도는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영의 생각”은 구원 받은 사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지만 영혼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타락된 상태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타락된 상태의 영혼은 왜곡된 생각을 만들어내는 비뚤어진 영혼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목적에 따른 사람이 되려면 죽은 상태 혹은 파괴된 상태에서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회복은 망가지고 죽은 상태인 존재가 자신 스스로를 일으켜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일으켜 생명을 유지하거나 발생시키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공급 받고 존재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든지 존재의 기한을 다하여 생명을 거두시면 그 생명을 즉시 무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아무것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으로 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고 만물에 생명을 공급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현재는 사람의 몸에 들어 있어서 사람과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으나 존재로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단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불멸하는 존재로서 영원히 생명이 유지되지만 그 영혼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심판하셔서 지옥으로 가두셨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수명을 다하여 영혼이 육체를 벗어날 때, 육체가 살아있는 정한 시간까지 육체에 머물러 있다가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혼도 역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 되어 있으면 생명은 존재하지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나 혹은 영적인 세상이라 할지라도 죽은 영혼은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습니다. 마치 무덤에서 잠자던 영혼이 갑자기 무덤을 열고 일어나오는 것과 같은 일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간단하게 타락한 영혼이 행동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록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타락한 죄의 상태(죄의 종/롬 6:20)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지으심을 받은 최초의 창조의 목적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공급 되어지는 생령의 상태(창2:7)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살아 있어 육체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육체 안에 있어서 사람을 형성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단절 되어 있어서 영혼의 기능을 상실한 죽은 상태와 같습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으며 자기 스스로 생명적 활동을 할 수 없 존재라고 말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능은 일정한 경향에 있어서 무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 존재하면서 사람을 구성되지만 실지로 전 영혼의 기능에서부터 모든 존재 상태가 무능하며 선을 향한 의지가 결여된 왜곡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빛을 공급받을 없는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상 사람의 영혼은 무능하고 선(창 1:31: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관하여 무지하며 아무런 의지나 성향을 가질 수 없는 아주 무능하여 육체의 성향을 재어하는 역할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육체의 욕구에 방조하여 따라가며 자기만족을 위하여 기만당하는 잠들어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독자적인 경향으로 육체가 선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이끌고 가도록 하지도 못하므로 사람으로 구성되도록 존재하는 상태 외에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활동을 한다면 왜곡된 성향을 일으켜 하나님의 선(창 1:31)에 반대되는 경향뿐입니다.
영혼은 전적으로 자기의 기능을 하지 못한 무능한 존재로 사람을 구성하며 스스로 생명을 일으키는 존재도 아닙니다. 영혼이 무능한 상태로 사람을 구성한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존재를 시작하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지으신 선한 목적에서 이탈된 상태로 태어났고 육신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이면서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피조 된 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어졌으나 어두워져 있으며 그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에게 영혼이 있으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심각하게 영혼은 어두워짐으로 스스로나 아니면 사람 자신 의지의 힘으로 결코 영혼의 눈을 밝게 하여 소생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은 영혼을 지으신 분의 의지에 관한 문제로 그분의 선택과 의지에 부탁 할 뿐입니다. 오직 은혜가 아니고서는 비록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얻었고 일정 기간 피조물로 영광을 가지고 존재하였다 할지라도 오히려 태어난 것이 저주가 되어 육체의 생을 마감하고서는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영혼을 가두기로 정한 그 지옥으로 보냄을 받는 길 뿐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으며 최초 인류의 조상이 선택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이며 범죄인 것입니다. 이 범죄가 개인적으로 볼 때 우리의 조상 아담이 택한 것으로 아담은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하는 조상이 되었지만 실지로 그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께 범죄한 것도 모르는 영적인 어두움에 처해있는 육체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며 일생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충분히 그 책임이 있으며 지옥으로 버림을 받는 일에 하등에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이라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죄에서 건지십니다. 이를 위해서 아담의 범죄 이후에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아브라함을 통한 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존재하시는 것을 알리시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를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의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없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지식을 포함한 관계는 영혼이 주관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죽어 그 기능을 상실하고 어두워져 있으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영혼은 죽었고 영혼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져 빛을 잃었습니다. 본래 사람의 영혼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신을 사람에게서 거둬 가셨고 (창 6:3 :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궁극적으로 돌이키지 아니한 사람의 범죄가 하나님의 신을 몰아내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둬 가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빛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영혼이 어두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 관한 존재인 영혼이 생명과 단절 되었으며 제 기능을 잃은 상태에서 영혼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필요성을 가집니다.
2) 거듭난 영혼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한 “영의 생각”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4-15),
“육에 속한 사람, ψυχικος”은 자연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natural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만 성령과 영은 초자연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뛰어 넘은 존재임을 자연과 초자연의 결합을 간단하게 생각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성령은 최초에 지으신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두신 것처럼 영혼에 거하시고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므로 사람의 육체를 성령의 전(고전 3:16)으로 삼으셨습니다.
최초 사람에게는 영혼의 정신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서 기능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깨어져 삐뚤어진 상태가 되어 버렸고,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거둬 가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이 구절이 말하는 의미가 분명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계셨었으나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 이것은 공간적 의미로서 “함께”를 사람의 내면이나 혹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라는 의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은 것을 사람의 내면에 거하시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을 거둬 가신 그때 사람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거둬 가신 것이라고 말하는가? 이런 생각은 창 6:3에서 모세가 말하는 하나님의 신과 하나님의 형상을 동일하게 보는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등불이므로 영혼을 밝게하여 어두움을 제거하고 영혼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하도록 함에 있어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하나님의 지식의 모든 것이 새겨져 있어서 그 지식의 빛을 영혼에 비취고 영혼은 마음에 비춰 육체의 욕구로부터 오는 감성적인 지식을 하나님의 참된 선으로 의지를 일으키도록 새로운 마음을 만드는 일을 하여 그 일이 온 몸에 찬란하게 비춰짐으로 육체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의 형상을 보게 되고 더하여 육체가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최초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그의 모습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형상이 빛처럼 드러났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하게 함에 있어서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높이는 것, 인간을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하는 그 무엇이 분명하게 대조 될 수 있도록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비추어 마음으로부터 육체에 찬란하게 비추어 낸 것입니다(John Calvin 기독교강요 1, 15, 3).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비롯된 내면의 빛에 의해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타락하여 드러난 것은 살인과 간음과 온갖 추한 모습들로 야수보다 못한 존재의 행동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고 그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행동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마음에 계시는 신을 거두셨고 비로써 사람은 하나님과 확실하게 단절된 상태가 되어 사람의 상태는 범속의 피조물과 동일한 상태가 되었으나 다만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고, 육채 가된 사람의 수명은 120년으로 한하여졌고 찬란하게 비취던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는 어두움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광채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남으로 생명조차 단축되었고 사람은 부패하고 어지러진 혼란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방을 살펴보아도 두려움뿐이고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땅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여 축복 대신에 저주를 퍼 붓고 있습니다. 인생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혼란과 어려움 그리고 고난이 그 얼굴에 분명히 드러났고 평안은 사라졌으며 근심과 고통의 나날이 얼굴에 분명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비취던 그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Calvin 은 기독교강요1,15,4,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내적 선”이라고 정의했고,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은 그 찬란한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 빛나고 있었으며, 부패한 이 후에는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혼란하여지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라고 기독교강요 1,15,4”에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부패하고 파멸되어 혼란하게 된 어지러진 상황에 처한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사람은 비로써 온전한 질서를 잃어버린 혼란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사람의 마음을 이루고 마음이 존재한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며 이성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영혼과 육체, 이 둘 중에 하나라도 죽음의 상태가 되면 사람의 대표 기관인 마음이 형성되지 않고, 마음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생각을 하지 못하면 욕구의 선택이 불가능합니다. 실지로 마음은 의지의 집인데 John Calvin. 선생은 의지를 욕구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든 욕구가 마음에 있는 것으로 보면 마음이 의지의 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욕구는 함부로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이라는 판단을 거치고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난 욕구를 지성에 진열된 자료를 꺼내어 선악을 분별하게 되는데 이것이 양심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지성에 진열된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면 생각은 욕구의 활동을 충분히 억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형상의 빛이 드러날 영광의 광채의 빛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런데 부패한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부서졌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지러진 혼란만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새긴 하나님의 말씀마저 발견할 수 없는 어두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부득이 마음은 양심이나 육체로 오감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생각의 범위를 넓히고 욕구의 경향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육체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행동하게 할 것입니다. Calvin 선생의 말대로 “욕구가 의지”라고 한다면 의지는 생각에 의해 경향이 달라질 수 있으며 생각은 마음에 있는 의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는 생각을 일으켜 결과를 얻고 행동하며 생각은 의지의 경향을 지성에서 자료를 얻어 판단하고 육체의 만족을 위해 결과를 얻도록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적 활동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활동이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게 하려면:
육체의 감정이나 영혼의 지성에서 나 어느 쪽에서 이성의 활동이 시작 되든지 선한 목적에 따라 이성적인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방향에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존재의 활동을 드러내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체의 방향은 사람의 오감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얻은 자료를 통해 육체의 감성이 느낌을 가집니다. 육체는 그 오감으로 얻은 자료를 마음에 비추면 이 자료는 영혼에 상을 형성하고 그 상이 영혼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드러내는 영광은 선한 목적에 따르는 것으로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자료가 드러내는 찬란한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한과 능력의 비밀들의 지식들을 다시 마음에 비춰냅니다. 이것은 영혼이 느끼는 감성일수 없습니다. 지식입니다. 영혼에서 정리된 지식이 다시 마음에 비취고 의지를 만들 때 마음은 이것을 생각으로 보내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의 머리로는 차가운 감각을 마음은 따뜻한 감정을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지로 생각은 육체로는 감성을 영혼으로는 지성을 활용하여 아주 질서로운 아름다움에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 사람은 영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 일반 적으로 영혼이 어두움에 처해 있으며 소경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은 자료를 마음에 비추어 영혼에 상을 형성하려 하지만 영혼은 마음을 통해 들어온 육체로부터 얻은 자료에 대하여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왜곡된 상을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생존하는 동안 육체의 오감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지식들이나 경험들이 영혼의 지식창고에 진열되어 있어서 이 지식들에 의해 상을 마음에 있는 의지에 보내지고 의지는 생각을 일으켜 육체와 영혼을 활용하여 질서로운 아름다움을 누리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혼의 기능이 상실된 왜곡된 편향적인 즐거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지성이 육체의 자료에 국한된 지성에 진열된 자료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없기 때문에 육체의 방향으로만 얻어진 편향된 지식으로 결과적으로 육체의 사람으로서의 의지의 경향성을 드러내고 행동에 이르도록 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기능이 지성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관계된 모든 지식들의 경향성이라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반영할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에 새겨둔 것이므로 의지를 일으킬 때 그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자유의 의지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의적인 경향을 보이도록 지으심에 있어서 모든 생각과 결정을 완전히 사람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선한 목적에 따라 드러내고 존재하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행복이 넘치게 주어짐으로 인해 그 모습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고, 여기까지 지음을 받은 사람의 탁월함은 의지의 자유의 완전함, 선한 목적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가치, 피조세계와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질서로운 존재로서의 생활,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복종하는 선, 그리고 사람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 오직 피조물에게 실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완전한 존재로서 찬란한 광채를 세상에 드러내는 탁월함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육체의 지식이 감성을 통해 마음에 들어 왔습니다. 이미 육체는 오감에서 얻은 자료들로 감성을 가지고 감성이 무엇을 표시해야 하는지 지성의 판단을 의뢰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지식을 보내었고 받은 마음과 주는 마음으로 분리되어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을 수행합니다. 육체로 받았기 때문에 육체의 의지가 영혼의 의지에 지식을 전달하여 영혼에 지식의 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받은 마음과 주는 마음이라고 하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에 의해 육채로부터 들어온 지식들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새긴 지식은 창조의 완전한 지식이 있으므로 사람의 육체의 눈으로 본 모든 것들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의 자료가 총망라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이 육체로 보고 육체에 만져지는 것처럼 느껴 육체가 그 지식의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 표정이며 육체로 느끼는 감성이 만족감 이고 이 만족감에 의해 사람의 몸에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에 의한 느낌이 피조세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체는 하나님의 감정을 사람의 육체에 현실로 드러내는 신비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되고, 육체가 느끼는 감성이 하나님께서 보심으로 만족 해 하시는 즐거움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충분히 피조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육체에 들어온 감각으로 얻은 지식이 사람의 육체로 만족을 느끼려면 의지와 생각에서 만족에 대한 수치적인 데이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데이터는 육체의 오감에서 얻은 느낌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이 자료가 궁극적으로 사람에게서 무엇을 드러낼 것인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포착된 지식이 마음에 들어와 영혼에 상을 이룹니다. 이 상이 영혼에 비췰 때 영혼 안에 있는 지성에서는 이 자료가 의미하는 가치에 대해서 순식간에 데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마음에 보내옵니다. 이 자료가 보내온 결과에 의하면 오감으로 느낀 자료에 의한 지식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까지 구체적으로 영혼의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빛에 의해 파악합니다. 반복적인 작업으로 확실한 결과들을 얻고 얻은 결과들을 마음에 비추어 마음으로 적절한 의지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이 자율적인 행동으로 말미암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은 무한한 기쁨을 가지게 되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즐거워하시는 신비한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어온 객관적인 피조 세계에서의 현상들에 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선을 파악하고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그 뜻을 이해하는 지식을 깨닫고, 뜻하시는 방향에 따라 관리하려는 자율적인 판단을 생성하는 의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식의 자료로 영광을 돌리고 육체로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 협력하여 이루어 가는 탁월함이 드러나는 관리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것은 지으신 피조 세계에는 반드시 피조 된 존재에 의해서 해결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관리하는 일들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는 질서로운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하지만 타락이후에는 자연은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방치 되거나 파괴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8:22. 자연이 고통을 당하는 원인은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으므로 방치 되어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관리를 받는 다면 신음하지 않으며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께 더 큰 만족을 드릴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방향으로는 하나님의 손이 되고 영혼의 방향으로는 하나님과 관계의 기쁨을 누리며 피조물로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가 되며 피조물로서 탁월하고 유일한 임무를 잘 수행하여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신비한 연합의 통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때 사람의 마음에 있는 의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의지가 마음에 있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신이 마음에 거하셔서 사람과 관계하십니다.
마음은 사람의 완전한 인격이 모이는 곳이며 영혼과 육체가 마음을 바라보고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에 의해 각자의 역할을 하고 또 다시 마음에 빛을 비추어 의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의 의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사람의 생각을 알게 되십니다. 이렇게 사람이 생각하기 이전에 영혼과 육체가 비취는 의지의 종류를 아시므로 영혼과 육체의 경향까지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전인격이 드러나는 표상입니다. 내면으로 영혼과 육체의 의지를, 외면으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태를 마음을 통하여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며 이 마음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피조물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사람은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마음은 피조물로서 사람의 존재의 자율을 드러내는 기관이지만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도 아니한 독립기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강제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대로 역할을 한다면 그 존재는 완전한 존재일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자율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조절 당하지 않는 하나님과 같은 객관적인 존재로 자율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율과 사유라는 기능입니다. 자율은 말 그대로 존재하는 자신의 의지의 결단으로부터 나오는 피조물 스스로 행위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판단이나 간섭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기 행위이기 때문에 순전히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유적인 존재이시며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을 지시는 완전한 선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선에 이르는 자율적인 존재로 지으셨으나 결코 하나님과 같아 질 수는 없습니다. 자율적인 존재로서 의지 결단이 영혼과 육체의 비췸에 의해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있어서 생각이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육체에서 마음(육체의 의지)으로 영혼에 보내어진(영혼의 의지의 보냄)자료가 다시 마음으로 들어 왔을 때 마음은 생각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난폭하고 급하게 결단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난폭할 때는 생각의 여과를 거치지 아니하고 결단하여 행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대부분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는 범죄의 열매에 손을 내밀어 받아 입을 가져갈 때 많은 시간들이 있었으나 생각이라는 여과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생각을 한다고 해서 결단한 의지가 꺾어져 다시 되돌려 선한 의지로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아담은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의지가 굽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생각을 의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담의 의지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와가 내민 열매에 눈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정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생각은 의지의 결단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자기 판단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의지가 자유를 가진 것은 이와 같습니다. 옳은 것을 택하느냐 택하지 않으냐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실행하지 않아 기쁘게 하지 않거나 하는 것입니다.
의지가 꺾이는 것은 생각에 의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이때 비로써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에게서 사람의 육체로 이전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육체가 되어 하나님의 신을 거두셨고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자리를 비우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육의 사람”의 정체입니다.
모든 생각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가 경향을 필요로 하면 생각은 결코 의지로 하여금 옳은 것만 택하지 않고 육체의 유익을 선택하도록 의지를 기울게 합니다. 아담이 하와가 내민 손에 들린 열매에 마음이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결코 마음은 하와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와의 행위에 대한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담의 육체를 통한 지식으로 아담의 마음에 비춰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신이 계신 마음 안에서는 하와에 동의 하려고 의지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의지는 영혼에서 주어지는 비췸에 의해 결코 다른 것을 선택하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거절하는 판단을 마음에 전달했으나 동시에 또 다른 지식이 아담의 마음을 파고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두 개의 갈등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독자들은 이 말씀을 여기에 적용한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롬 7:21-25). 바울 사도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두 가지의 경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롬7:23)”과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롬 7:24)”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의 내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이 법들의 거소를 마음과 지체로 나누어 언급을 했습니다(롬 7:25). 하나님의 법은 마음에 있고 죄의 법은 지체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것을 깨달은 바울에 관하여 거듭난 사람인 상태에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거듭나지 아니한 상태회개하기 이전에 기록한 것인지 신학자들 사이의 분분한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의 탁월함은 영혼에 있어서 더욱 완전하지만 그것이 자율이라는 의지에 의해 타락할 수 있는 것, 또한 완전함을 충분히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지으심의 완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범하자”,라고 말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혼에서 마음에 비췬 의지를 일으킨 경향성의 자료(아담이 하와가 내민 손에 들린 열매를 먹을 수 없다는 판단)에 의하여 의지는 굳어지고, 영혼의 판단을 존중하듯이 견고하게 유지합니다. 이것이 지음 받은 사람, 아담의 타락 이전의 자세였습니다.
반대로 아담은 영혼의 판단에 의지가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반항적인 경향을 마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존재라는 의미는 완전한 자율을 가지므로 사람의 모든 결정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옳은 결정을 하는 것도 사람이요 옳지 않은 결정을 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어떤 결정을 했든지 그 결정에 따라 행동을 실행한 의지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으로부터 주어진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따르지는 않는 것이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는 경향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유익에 관한 경향과 사명에 의한 관리자로서의 임무에 의한 경향을 성실하게 행함으로 피조 세계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질서로움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창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드러내므로 영광이 온 세계에 찬란하게 비춰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평온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상태이고 자기 혼자 타락한 그 비참을 슬퍼하고 아담에게 선악과를 들고 와 그에게 내밀었을 때 하와를 보는 순간 그 상태를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아시고 사람에게 의탁하시지 않으셨으며(요 2:23) 모든 사람을 아신 것처럼 아담도 하와의 모습 속에 드러난 비참한 인간의 불행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담의 영혼은 하와의 비참한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이 비취는 대로 판단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사랑, 하와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희생, 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 새겨진 지식에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감당해야할 하와가 행한 죄의 대속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아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이런 내용을 모를리 없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머뭇거리고 고민 했을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 할 줄을 모르는 아담이라면 당황하며 하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것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아담은 하와를 향한 사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와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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