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가?(2)

생명있는 신앙 2010. 10. 6. 20:05

로마서 8:13

"육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복음으로 부르셔서 진리로 우리의 영혼에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에게 지속 되는 것과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진리를 주심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성경의 모든 의심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영혼에 의심의 휘장이 벗겨졌고,

말씀을 읽을 때 그 진리의 말씀이 폭넓게 이해되었으며,

예전에 없었던 세 가지의 새로운 감각이 생겨났습니다.

첫째는 성령하나님의 계시와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의 계시 성부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있게 된 자신을 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진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의 영혼에 눈을 열어 십자가의 구속의 성자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느끼게 합니다. 이 모두가 지적인 진리의 감각으로 우리의 영혼에 분명히 인식 되는 것입니다.

비로써 하나님의 관점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현재 모습 이대로가 보입니다.

멸망 받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이 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가 보입니다.

지식이 없는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배교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선지자를 돌로 치고 톱으로 켜 죽이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니다.

과거가 보입니다.

희망이 없고 멸망이 감지된 미래가 보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환경으로 말미임은 예언적인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보입니다.

세속주의의 교회

사랑이 없는 세상

온통 자기중심인 세상

인간이 중심이 돼서 운영되는 세계가 보입니다.


18세기를 살았던 천재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살 때 글을 씀,

6살 때 자연철학에 논문,

9살 때.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

12살 때, 자연철학에 관한 문제를 분석 평가하는 글,

1716년 13살 때 예일대 입학,

4년 후 16살 때에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라틴어로 축사를 했습니다.

18세에 대학원을 졸업.

19세에 예일대학에 교수가 됨.

하나님께서는 이 예리한 지성을 사용하셨습니다.


미국 메샤츄세스 지역의 부흥운동의 시작은 한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1740년 엔 필드 라는 마을에서 교인들이 아무리 설교를 해도 도저히 변화를 받지 않은 목사가 에드워드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신명기 32:35}절을 기초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성경의 본문은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값으리로다” 였습니다. 설교는 아주 무서웠습니다. 이 설교가 울려 퍼질 때 그는 지독히 눈이 나쁜 사람이어서 안경을 쓰고 한손에 촛불을 들고 한손에 설교 원고를 들고 읽어 내려갔습니다. 설교가 중간쯤 설교가 진행 되었을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청중들 가운데에서 한두 사람이 흐느끼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인간이고 자기의 교회가 얼마나 비참하며 슬픈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에드워드는 설교를 계속 읽어 갔고 청중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높아 갔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는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엉금엉금 기어와서 설교하고 있는 에드워드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제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올려주세요”라고,

그러자 에드워드는 말했습니다.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제가 이 설교를 계속 읽어야겠습니다. 라고 아주 냉정하게 말하고 계속해서 설교를 읽어 갔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교회 안에는 폭한이 떨어진 것 같은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성령의 강력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시작의 불씨였습니다. (열린 교회 / 김남준 목사 설교중에서)

 

저도 이 설교를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는가?“ 감탄하고 이 사람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수종 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런 지성은 주님과 함께하시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며,

주님께서 그를 오른 손으로 붙잡고 사용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영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설교를 읽는 동안 제 영혼은 성령 하나님 앞에 서 있었고 성령께서는 복음의 칼로 저의 영혼에 감춰져 있는 추하고 더러운 지식들을 수술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죄의 권능이 저의 속사람에게서 파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가 시내 산 정상에서

돌 판에 계명을 새기시는 하나님의 불꽃처럼 저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갔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오랜 지침을 끝내시기라도 하듯 저를 품에 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습니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저를 향하시는 성부 하나님은 안도의 숨을 쉬시고 사랑의 눈길을 저에게 향하셨습니다. 너무도 추하고 더러워 덕지덕지 때가 묻어 있는 누더기를 걸친 상태로 도저히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 갈 수 없는 추한 내 모습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추한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었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처럼 내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워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콧물을 닦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인 토론토 공항 Gate 앞에 앉아서 이글을 쓰고 있는데 흐르는 눈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제 앞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 옆에는 지난주 설교한 본문의 내용과 같은 설교를 웨스터 민스터에서 선포된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8장 강해를 읽던 페이지를 덮어 내려 높고, 주위에 사람들이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저의 마음은 억제하기 어려운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합니다. 목사 부인들에게 주셨던 눈물주머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고 심장은 큰 소리로 쿵쾅거립니다.

움직이지 않은 머신에게 에너지인 전력이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 사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생명체로 태어나 느끼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항상 새롭게 느껴지는데 오늘 저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진정한 변화를 다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가졌던 신앙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속의 추물들이 엉겨 묻어 있었습니다.

짐승과 같은 삶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고 했었습니다.

예전 거듭남의 경험은 희미한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이 욹어 먹었던 회개의 신앙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거듭난 영혼이 이처럼 추악한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상상할 수 없는 비신자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에드워드의 설교의 말씀처럼 지옥에 다다라서 이제 도저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면서 배교적인 신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기 위해 기다리시고,

제가 실족할 때를 기다리는 위태로운 배교가 저의 종교 행위에 아주 충만히 퍼져 나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제 멋대로 종교적인 의무를 자신 만만하게 행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진노만을 쌓는 삶이었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첫 사랑의 때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지만,

그 첫 사랑의 회개 이후 너무도 하나님을 모르고 배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너무 무지하였고 알기위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는 그 말이 들려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저는 지금 짐승 같은 무지의 삶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제 1차 미국의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키는 성령의 도구가 되었는데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옆으로 돌아 간지 300여년이 지난 지금 내 영혼에게 다시 다가와 대각성의 역사와 동일한 역사를 오늘 저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진리의 지식입니다.

뒤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100여 년전 영국의 웨스터민스터에서도 오늘 저에게 일어난 동일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라는 한 의사에게 일어났습니다.

그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을 읽고 성령의 강력한 붙잡힘을 입어 50여 년 동안 진리의 말씀으로 영국 교회를 깨웠습니다.

제 영혼이 깨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부끄러운 저는 “이것이 신앙이야”라고 생각했고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짐승 같이 살았는지 회개의 큰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육신을 위주로 하는 신앙생활을 했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영혼에 감추어진 세속의 지식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비로써 사망과 생명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죽었을 때는 알 수 없었는데 생명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거듭난 후에도 몰랐습니다.

거듭나기만 하고 교회에 의무를 다하는 신앙생활만 하면 영혼이 자동적으로 자라서 성장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정통적인 청교도와 개혁주의 신앙을 왜곡하는 지식이 없는 사람을 이제 또렷이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경인에 관한 교리를 나중에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은 분명합니다.

한번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의롭다 칭하심을 입은 사람이 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신론의 엄청난 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흠이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결코 잘 못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로운 사람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은 결코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은 완전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가 너무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받은 성도가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현저하게 못 박게 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을 가까이 하지 않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결국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구분할 수 없는 회개에 비슷한 열매로 신앙을 가졌으나 실지로는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나 감성적인 감각의 우수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관한 감각을 가졌을 뿐 진정으로 하나님의 칭의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항상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 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면서 항상 의심하며 깨어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사람의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에 관하여 기록한 모든 책을 읽을 계획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교회 목사였던 로이드 죤스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본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이 사람이 서점에 가서 볼만한 책이 있는가? 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 아무도 만지지 않은 먼지가 가득 쌓인 두 권의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책장을 열었습니다. 앞장 첫 페이지에 있는 제목은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미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설교시간이나 목사들을 통해서 많이 소개가 되었던 터였습니다. 로이드존스 박사는 그 책을 사 들고 집으로 와서 책을 읽고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설교가 그 책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 관한 모든 책들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교회에 설교하게 되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아 돌아 온 것 같은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고 그의 사상에 빨려 들어갔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에 심취하였고 그의 지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그의 설교에  놀라운 감동과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로이드존스는 웨스터 민스터의 설교자가 되어 무수히 많은 설교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설교 로마서와 에베소서의 강해는 많은 신학자들이 반드시 읽는 설교 모범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