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지난 주 저는 이방인에게 드러난 소명, 거듭남, 회개의 역동성이 있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드렸습 니다.
지난 주 말씀에 약속을 드린 바와 같이 거듭난 영혼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분량이 아주 많아 여러 시간을 걸쳐서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육신대로 살면이라는 말의 결론으로 본문 내용의 말씀 앞부분을 마치려고 하는데 내용은 충분하지 못하지만 여러분께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 때에 후반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부분을 마칠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희망사항입니다. 이 부분의 설교의 내용은 대략 1) 영으로써 2) 몸의 행실 (1) (이 부분은 앞부분과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이번 기간에 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할 시간이 됩니다.) 3)몸의 행실(2) 이는 몸의 행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 산다는 것, 참된 삶의 의미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참된 삶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왜 이땅에 있고 이땅에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의미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중요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보여준 관점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로마서 8장 13의 내용의 서론격인 1부를 마치고 다음으로는 죄와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이거은 본문을 중심으로 다른 성경을 포함해서 약 25주에 걸쳐 복음의 핵심을 향한 산책으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있어서서 복음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거듭나고 그 거듭난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내용까지 알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좀더 마무리 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의 말씀을 잠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게 되고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 영혼의 지성에 빛을 비췸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감각이 적용되어 이때후로 회개와 함께 소명이 불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이르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짐으로 우리 영혼에 빛이 들어와(성령의 조명하심) 그 빛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혼에 복음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그 복음을 조명하시고 성령의 조명을 받은 지성은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합니다. 실지로 복음은 우리가 듣고 감각할 수 있는 지식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감각한 복음을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반드시 성령의 조명에 의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사람의 지식으로 생성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지 않거나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이 복음을 들으므로 감각하지만 성령의 조명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지성이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대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는 자기 지식이 주도적으로 복음을 조명하여 왜곡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이해함으로 복음을 진리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복음은 이미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을지라도 영혼의 정체에 관한 아주 혼란스러운 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났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어떤 이상한 철학이나 논리에 쇠뇌 당하고있는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게됩니다.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의 영혼을 믿지 않습니다.
중세이후 계몽시대에 Enlightenment 이르러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어두움에서 깨어남으로 철학자들은 영혼의 본질을 믿지 않고 정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데카르트에 의해 더욱 분명히 현대 철학의 영향을 미쳤는데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방법 서설에서 Cogito ergo sum 이라는 우명한 말로 중세 스콜라 철학이 과학으로 무너질 위기에서 건질 것같은 혜성 처럼 나타났다가 역으로 스콜라를 뛰어넘어 새로운 계몽주의의 합리주의를 건설하는 철학자가 된 것입니다.
실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인이면서 철학자입니다. 그의 책 심신 이원론이 오늘날 모든 심리학의 기초가 될만한 단초를 제공한 심리학의 교본과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심신 이원론에서 영혼을 정신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방법 서설에서 말한 Cogito ergo sum 이라고 하는 번역하면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 없으나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으니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라는 그 유명한 말인데, 이 말이 중세시대의 회의론(Scepticism:500~1500, 그래고리 교황1세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시대로 '중세 암흑시대')을 잠재우는 그 유명한 말입니다. 데카르트의 등장은 칠흙같이 어둡고 깊은 암흑에 빛을 드러낸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실지로 데카르트가 데카르트가 된 것은 회의론 때문입니다. 회의론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더 연구하려는 그의 생각이 그 유명한 합리적 계몽주의 의 아버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관계한 모든 객관적인 것들은 확실히 진리라고 믿을 수 없다. 비유를 들자면, 제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설교를 하기 위해 단이 있고 여기 마이크도 있고 앞에 책상도 있고 여러분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을 한장의 그림으로 그리면 명정하게 드러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에 의하면 나를 재외한 모든 명정한 사실들이 앞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참 인가 끝까지 의심해 보라, 그렇게 보면 거짓일수도 있고 참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참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참은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의심을 하고 있는 지금 나, 생각하는 나, 또한 내가 억마에게 속고 있다고 할지라도 속고 있는 나, 그 나는 참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의심할 대상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잠을 자면 꿈을 꿀때도 있습니다. 꿈을 꾸는 나는 참이니다. 꿈에 나타난 모든 것은 꿈이니까 참 실물이 아니고 거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꿈은 2+3=5라는 꿈을 꾸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꿈은 실지로 2+3=5 이니까 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꿈이나 꿈이 아닌 세계에서나 참입니다. 그러므로 꿈에본 모든 것들이 반드시 참만은 아니고 거짓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끝까지 의심해야 합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영혼이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감각도 없으며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자체도 분명히 알수 없고 진리라고 말할수도 없으며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논제로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 입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존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다.' 이라는 말합니다.
그는 사람을 '물자체인 육체'와 '생각하는 나인 정신'의 2원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데 마치 개혁교회가 말하는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대비하여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곧 '생각하는 나는 정신'이고 '존재하는 나는 물자체'를 말하므로 그는 확실히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데카르트의 이론은 영혼과 정신을 같은 것으로 보았을때 아주 기독교적 개혁주의 이론으로 보여집니다.
데카르트의 말은 신약성경에서 영과 육신을 을 말하는 바울의 말과 너무도 같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은 물자체 (곧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서 비롯된 정신을 의미합니다. 이 정신에서 생각하는 육체는 의심의 대상입니다. 분명하게는 참 내가 육체인지 정신인지 여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어느것이 참인지 알수없습니다. 결국은 나 자신도 존재하지만 정신으로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 알수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모든 교회를 합리주의적인 사고로 몰아넣는 무서운 독이고 악이며 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이 논리를 적용하여 각종 진보적인 철학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 사상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울만한 사람이라고 하는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아무도 그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세속주의가 바로 이 사람의 사상에 의해서 단초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결국 데카르트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의 최고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에 뉴 에이지 운동에 이르기 까지 모든 문화의 정신의 시작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양대산맥으로부터 비롯되는데 한쪽의 합리주의의 사상인 데카르트에 의해 이성주의가 발달해 온 것입니다. 이후에 수많은 천제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을 근거로 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왜 이처럼 어려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립니까?
그것은 영혼의 중요성과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받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영혼의 작용이 무엇인지 말씀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어려운 철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사상과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구성을 영혼과 육체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데카르트의 육체와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만 본질이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통에 따라 신앙을 가진 교부들이나 어거스틴의 영혼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정신과 존재 자체가 다릅니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정신을 존재로 본다는 것은 어패가 있지만 주장하는 사람이 정신을 존재의 한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데카르트주장에 따르면 정신은 곧 말 그대로 육체에 있지만 육체와 구별된 존재로 봅니다. 그러므로 정신은 육체와 완전히 분리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으면 정신의 정체를 알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혼이 무엇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흙으로 육체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이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18:4에 모든 영혼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마 10:28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벧전 2:11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라”
영혼이라는 단어로 언급하는 성경의 구절은 194구절이 됩니다. 그외 영이라고 하거나 속사람(3)이라는 단어 외에 다양한 말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언급한 말씀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마 10:28)”에 언급하셨습니다.
몸과 영혼을 분명히 구분하여 언급하셨는데 이 영혼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들으려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 이야기를 다시한번 말씀을 드려야 겠습니다.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데카르트에 의해서 주장된 것을 의지하고 기독교의 영혼 자체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는 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에게 진리임을 알려주는 계시적 사건으로 인식 되었다고 하자 그 계시적 사건은 진리에 의한 것이지 진리를 만든 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신이 직접 진리를 사람에게 가르쳐주어 알수 있도록 했다고 치자 그것이 신이라고 어떻게 증명할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이 이성으로 노력하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반드시 계시적인 사건이 아니더라고 진리는 알수 있으나 근본상 안간의 이성이 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진리의 계시적 사건과 동일하다.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알수있는 이것은 진리의 계시보다 우수하다. 그러므로 계시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진리는 알수 있고 인간은 신 앞에 정직할 수 있다 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해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데카르트를 말할때 데카르트는 세속주의로 해석해도 됩니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계시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너희가 신을 안다고 하고 신을 말하지만 그 신은 진리를 만들었다. 법칙도 만들었다. 그렇지만 진리 자체가 신은 아니다. 우리가 진리까지는 알수 있으나 신은 그 존재를 알수 없다. 내가 알수 있는 것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해보라 있는지 없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저는이것을 생각합니다.
이말은 저의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신의 자리에 인간의 설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인문주의 운동이일어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인 종교로서나 이성으로서나 진리를 아는데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진리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리 자체로는 신이라고 할 수 없고 신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진리가 있다고 찾으나 인간의 이성으로 찾으나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진리를 찾았다고 해서 신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종교가 도달하는 것도 진리까지 뿐이고 이성이 궁구하여 찾아가는 것도 진리까지 뿐이다. 다시말하자면 진리를 만나는데 있어서 반드시 종교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렇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진리를 발견 했다고 해서 신을 만난 것은 아니다. 종교는 진리를 만나
고서 비로서 신이 있다는 그것을 믿는 것 뿐이지 그 종교가 만난 신이 참신인지 거짓 신인지는 가봐야 한다. 끝까지 생각해 봐라 이것이 확실한지 알수 없으나 이성은 그렇지 않다. 이성은 자기의 존재로 확인한 것이니 그가 진리까지 도달한 것은 확실하고 그 이상은 알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이 참신인지 거짓신인지 알수 없으나 너희들이 말하는 그 신이 신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온통 세상을 종교에서 이탈되게 한 장본인이 되고 드디어 르네상스 곧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우수하게 되고 영혼은 없다라는 주장들이 곳곳에서 생겨나서 비로서 인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떠밀어내고 인간이 자리를 잡아버린 하극상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영혼까지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지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혼은 영혼대로 보고 듣고 행동하고, 육체는 육체대로 사람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서 각각 독립적인 기능을 하면서 유기적으로 한 사람을 형성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육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영으로 살 것인가?를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씀하는것 같습니다. 사람은 피조물로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두 기능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람이 되게하고 두 기능이 합하여 한 사람이 됩니다.
한 사람에게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기능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한 연합체를 이루어 독립 존재로 행동합니까?
저는 오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람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은 사단을 여러분의 지식의 세계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 마음이라는 기관이 있고, 마음의 이쪽과 저쪽에 육체와 영혼이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 사람은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인식의 세계를 마음에 비추어 육체가 인식하고, 육체로는 눈에 보이는 피조세계의 사물을 마음에 비추어 영혼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조는 영혼에서 마음을 바라보면 마음 너머에 육체가 있고, 육체에서 마음을 향하여 마음 너머에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어느 방향에서든지 동일하게 대면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양옆에서도 서로 영혼과 육체가 마음을 사이에 두고 대면하고 있어서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표현하려면 다음 대면을 평면으로 그릴 수 없고 구형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지구를 펼친 그림처럼 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구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는 어느방향에서든지 대면하고 서로 유기적으로 인식하게 하여 사람으로 생명을 가지고 살도록 조직되어 있습니다.
유기적이란? 영혼과 육체가 각각 독립된 개체를 가지고 있면서 자기의 독립된 개채와 연합하는 협력입니다. 한사람이 영혼의 인격적인 기능과 육체의 인격적 기능이 별도로 구성되어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 다. 다른 인격이 서로 기능적인 연합을 이루어 한인격을 형성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는 기능에 있어서 전혀 다른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이 두 인격이 사람을 형셩할 때 영혼과 육체가 연합하여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격은 지성, 감성, 의지의 기능들로 영혼이 육체보다 우위에 있는 기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은 서로가 보완하고 협력함으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목적을 충분히 드러내도록 온전하게 기능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영적인 존재와 물질로 된 육체가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두 존재가 분명히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서로 유기적 연합으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신비스러운 연합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연합이란 육체의 지성은 영혼의 지성에 조화로운 협력을 이루고 육체의 감성은 영혼의 감성에, 영혼의 의지는 육체의 의지와 함께 마음을 형성하고 이 둘이 구분되되 드러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로 인식이 되게하는 연합을 이루는 인격적인 구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에는 지성이 드러나고 육체는 감성이 드러나고 영혼과 육체의 의지가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영혼이 죽고 육체는 살아 있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영혼이 실지로 죽은 것이 아니며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도 아니고 살아 있으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무 의식 상태도 아닙니다.
인류의 최초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된 타락된 영혼이란?
영혼이 빛의 조명을 받은 것이 아닌 어두운의 상태가 되어 육체로부터 얻어진 모든 인격적인 작용의 결과들을 삐뚤어지고 무질서하게 적용시킴으로 혼란스러워진 상태의 마음으로 내주하는 죄의 지배에 따라 인격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육체의 열매라고 했고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원수룰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갈 5:19~20) 이라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을 했다가 그후에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내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줄을 아노니”(롬 7:18)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롬7:5) 라는 말은 육신안에 죄가 자리를 잡고 우리 육신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으로 죄가 육신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 곧 진리는 영혼을 통해 사람의 지성에 들어오고 마음에 비추어 육체로 하나님을 보게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의지가 순종을 일으키지만 육체로는 보는 모든 지식을 마음에 보내 영혼비취고 그 영혼이 의지를 향하게 함으로 육체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혼에 하나님의 신이 공급하는 힘에 빛이 비취고 지성을 밝게 할때에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반사하여 나타내지만 영혼의 지성에 빛이 꺼지고 어두워져 있으므로 육체로부터 얻은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돌릴수도 없으며 돌리려 하지도 않으므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죄가 의지에 들어와 영혼의 빛을 꺼버리고 자신의 욕구를 위해 육체의 욕구에 응하도록 지배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죄의 권능이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는데 그 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이제 데카르트의 정신 곧 영혼을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정신은 영혼의 등불인 하나님의 형상에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어두운 상태입니다.
그가 말하는 모든 정신과 생각과 육체와 구별된 정신은 곧 영혼이 어두움에 빠져 혼돈된 상태에 있는 흑암의 권세아래 있는 영혼의 상태인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영혼의 등불이 밝혀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의 등불이 꺼져 있습니다.
한 인격안에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연합이 온전하게 사람을 드러냅니다. 이 유기적인 연합은 이성적인 존재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통합한 총칭을 의미하는 말로 인격을 말합니다. 두 인격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맞지 않고 한 사람에게는 한 인격민 존재합니다. 한 인격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므로 영적인 인격 영혼과 육적 인격 육체라고 따로 말하지 않고 이를 영혼과 육체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을 할 뿐 각각을 인격을 사람을 대표하는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구분되어 불려져야하고 그 책임의 한계도 분명히 하고 영혼은 천국에 가고 육체는 지옥에 가는 구분된 심판이 주어진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성경은 영혼과 육체가 같이 타락하고 같이 범죄한 것으로 즉 한 사람의 범죄 즉 한 인격의 범죄로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마지막 날에 우리 육신의 부활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었고 복음의 내용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유기적이면서 영혼과 육체 통틀어 인격이라고 말하고 이 인격은 지, 정, 의가 유기적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지성을 영혼에 거한 눈이라고 했습니다. 지성은 모든 지식의 창고이고 영혼에 있으며, 감성은 모든 감각의 힘이며 육체에 있으나 영혼에 까지 있고, 의지는 마음에서 나타나고 모든 행동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고 열매를 맺고 영혼에서 지식을 얻고 마음에 빛을 비추어 육체에 나타나도록 합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하고 생명의 근원이 이에 있음이라”는 의미는 모든 행위가 마음에서 나오고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물질로 되었으면서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영혼을 주셨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 빛나는 등불이고 이 빛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 받음으로 빛을 발합니다. 이 영혼에 있는 빛이 사람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창세기 6:3절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고 함으로 비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안에 내주하시는 효과를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신을 거두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이탈되고 영혼의 빛을 잃으므로 사람에게 주어졌던 모든 지성의 감각을 찾을 수 없도록 어두움에 처하고 말았고 사람은 육체의 눈으로 보고 듣는 것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으로 만나는 하나님”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이 신들은 모두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라도 사람이 만들지 않은 신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공동묘지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까지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본래 지식이 전달 되지 않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공동 묘지 가까운 곳에 가면 괜히 무섭고 두렵고 그리고 뭔가 알지 못하는 도전자가 자기를 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의식속에는 환경적으로 물려 받은 유전적인 지식들이 있습니다.
야성을 가진 짐승들이 어떤 환경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품성 곧 야성을 드러내듯이 사람도 이와 같은 환경적인 유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공동묘지에서의 두려움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고자 하는 보호의 본능으로부터 일어나는 외부로 부터의 자기 보호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은창세기 4장 14절에거 가인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 자기에게 내려지는 징계의 무거움을 호소하는 내용에서 잘 나타납니다. 가인이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자신을 만나는 자가 자기를 해칠 것이다 라는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때 가인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1)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형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의식에서 무엇인가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의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이 죽인 아벨의 자기의 의식속에 살아 있었던 그 날들이 떠오르고 아벨이 환생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향은 대대로 사람들에게 내려오고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공동 묘지에 이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잠들어 있는 썩어버린 육체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자신을 해칠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 이것은 순전히 유전적인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 인데 일 종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론 사상을 물려 받은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과 연관된 환경에서 어쩔수없이 살아야 한다거나 작업을 한다거나 아니면 농사를 짖든지 경작을 해야 한다는 부득이한 환경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독한 고통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 것입니다.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낮이면 별 문제가 없이 그런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 되고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만 되면 오금이 저리고 쌩똥을 싸는 날들이 이어지고 점점 알지 못하는 질병에 빠져 도저히 그곳에 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지 직장인이라면 사표를 쓰든지 그럴 것입니다.
이런 환경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참 그리스도인이 그곳에 산다고 합시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예전과 같이 경건한 삶을 살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기의 임무에 충실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물론 그 말은 지극히 정답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악한자가 그를 건들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으로 돌아서,
우리가 만난 그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 오셔서 우리의 영혼에 등불을 밝혀 빛을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통해 육신으로까지 환하게 비추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이 찬란한 빛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는 창조의 목적을 회복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눈에 목격 되는 것이니다. 곳곳에서 찬란한 이 빛은 세상을 아름답게하는 찬란한 빛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마 5:14)라고 셨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착한 행실을 의미하지만 제가 적용한 영혼의 등불과 같은 그런 의미는 명백하게 아니지만 성경은 우리의 영혼에 등불이 켜지지 아니한 사람이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을 할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영혼의 등불이 켜진 사람을 거듭난 사람의 착한 행실이 곧 세상의 빛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의 선한 행실은 결코 빛이 나지 않고 그 빛이 없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불행한 답을 얻게 될 뿐입니다.
여기에서 선행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하는 것이 왜 불행하며 하나님께 어떻게 나쁜가? 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질문 때문에 세속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셔야만 하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속을 세상에 속한 정치와 경제 심지어 종교가 속한 문화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속은 기독교에서 바라보면 악하고 더럽고 정화의 대상이며 모든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 조차 자기는 세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세속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한 더러움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지 여러분은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모든 세속 문화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의 근원을 알면 저에게 말씀 한번 해 보십시요.
제가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르면 그 지식을 저의 영혼에서 꺼내어 바꾸어야 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모든 세속의 근원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그것들이 더러운 모양을 만들고 더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문화속에 속한 종교, 어느것 할 것 없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까지도 세속화에 물들먼 더러워집니다.
본래 세상은 아름답고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들어섬으로 세상은 더러워졌고 일반적인 정결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이어서 말씀을 보십시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5:19)
더 더 어떤 증거들을 보아야 합니까?
저는 오늘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종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철저한 신앙생활과 그들의 종교적인 삶은 변화된 사람의 종교 생활 보다 훨씬 거룩해 보이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온전히 그들이 섬기를 종교의 대상에 매여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거룩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우승합니다. 종교적으로 흠을 찾아볼수 없는 종교적인 삶이 성인이 되고 백발이 될수록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자비스러움은 더욱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진실에 의하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세속적인 종교의 삶이라는 것 외에는 흠잡을 대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성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수세기 동안 비난 받지도 않으면서 자비로운 마음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 그런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삶을 살수 있습니까?
실지로 이 세상에는 그들 외에도 그들만한 지식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경지에서 성인들 보다 더 나을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결 같이 사람이 누구냐? 라는 문제보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가 라는 도덕적인 판단이 인간의 존재적인 판단에 앞서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삶을 살거나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사상으로 종교를 만들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강제적으로 종교에 가입하도록 하고 선을 강조하는 종교는 이 세상에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이 한결 같이 말하는 종교적 가르침이 선행을 우선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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