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2~5)
이 글은 2010년 9년 19일 Toronto Freedom presbyterian church 의 로마서 8장 13절의 죄와 인간이라는 주제의 5번째 설교 내용으로 교회 cafe에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었으나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빌립의 물으심에 예수께서는 스스로 아버지를 보이시는 형상이심을 말씀하셨고,
요17:21에서는 하나님께 부탁하시기를 세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요 14장 에서는10,11,20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형상이셨고, 또 한 참 사람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셨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론 교리를 접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제가 논술한 교리와 배치되어서는 안 됩니다.
몰론 여기에서 신론 교리가 배치되는지 안 되는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많은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달될때 비로서 알게 되실 것입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청교도적인 교리에서 배치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여러분도 교리적으로 조화 되지 않은 논술을 조금이나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부는 어느 누구에게도 낳으시지 않으셨으나 계시고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존재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십니다.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낳으셨고, 아버지와 아들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로부터 낳으셨고 성령 하나님과 항상 함께 계시므로 항상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셨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되 세분이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는 성자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셔서 항상 세분이 따로 구별되시지만 하나이십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시므로 한분이시며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아버지는 말씀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지으시고 성령 하나님은 보존하시므로 다른 역할에서 드러나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계시하시는 역할이 구분되어 나타남으로 역할론으로 삼위 하나님을 증명하시려는 시도가 아주 많았으며 이를 공공연히 강론하거나 교육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다양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내용들을 볼 때 온전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성자 와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성자 와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에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진리로 오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성령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가 돌리는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십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중에 진리가 있는 곳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 우리가 지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지 그 지식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로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죄에 억눌려 있는 우리를 죄에서 씻기도록 하십니다. 이때 우리 가운데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에 동의하고,
진리의 말씀에 우리 영혼에 비췸을 입어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움직이려고 하는 미세한 동작을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붙잡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고조되어 입니다.
이런 미묘한 상태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서 사라진 영혼의 등불을 밝히시고 계시므로 진리가 지적으로 이해되고 온 인격으로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으로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인식하는 기쁨과 감격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육체의 지식으로도 이해 될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최고의 아름 다음을 목격한 인간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선에 대한 위대함에서 발견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비춰져서 삼위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비취는 빛이 형성으로 이루지 못한 것은 영혼이 형상을 맺을 수 없는 비극적인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성령이 계시는 곳에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지적인 동의와 인식,
그것으로 우리는 삼위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데 그 삼위 하나님은 각 위로 우리에게 계시 되어야만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불을 밝히시고 다가오셔서 우리를 감화시키고 계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감화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는 그 사건으로 우리는 구속하시는 구속주로 계시됩니다. 여기에는 진리의 말씀이 제공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확장된 복음인데 약간의 지식을 포함한 성경 말씀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내용으로도 충분하고 사도 바울이 전한 지식으로도 충분한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사건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지식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전달 되어야 성자 하나님의 계시를 볼수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아버지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우리의 죄책을 느끼게 하셔서 과연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교리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영혼이 깨어나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감각이 되돌아 온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실지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인식할 수 있도록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와 함께 계셔서 역사하심으로 성자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열어 주시고 우리 지성에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육체의 감성으로 느끼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기도원에서 깊은 묵상을 통해서, 신비주의적 신앙을 쫒는 사람들의 이적적인 행사를 통해서, 혹은 신비적인 집회행사를 참여함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는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강론하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지식이 선포되고 인리가 선포되는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집례 하는 미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모두 거짓입니다.
저는 확실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진리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진리를 찾으십시오.
영혼에 빛을 비취는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는 의사가 칼을 들고 병든 몸에서 질병을 도려내듯이 복음의 칼로 여러분의 영혼을 수술하여 여러분의 지성에 숨겨져 있는 무지와 거짓된 지식들을 도려내는 작업을 하는 영적인 질병을 고치는 곳으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저장된 육체로부터 들어온 모든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서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저장되어 여러분의 마음을 병들게 하여 죄의 도구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어두워져 있는 틈을 타서 여러분의 영혼에 수많은 쓰레기 같은 세상 지식을 저장해 두고 그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사도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김은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빌 3:7~8)"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영적인 무지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진리가 아닌 인간의 육체로 얻은 지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인식의 세계는 영혼에서 일어납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인식에 관한 것을 영혼에 비추어 영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판단하고 그분께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았나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니 그 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거짓이잖아요!
인리는 영혼의 등불이 밝혀지지 않은 지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지적으로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 것 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지 못한 말을 지어냅니다.
일주일 내내 아니 한달 내내 묵상하고 궁구하여 말을 지어내서 강단에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지만 그 선포가 밝혀진 영혼의 궁구함이 아닌 육체의 지식일 뿐입니다.
밝은 빛이 비취면 그의 선포는 쓰레기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는 성령께서 역사하고 사람을 회개시키며 영혼의 불을 밝히며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불변하는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만난 감각적인 인식이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을 만난 감각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설교자는 곧 바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의 진리로 설명되면서 우리의 영혼에 비춰집니다.
비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온전하게 이해 돼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었으나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으라"
영혼에 일어난 구속주이신 성자 하나님을 만나는 인식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비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빛이 아직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령께서 비취시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신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취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지입니다.
지성의 어두움은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아예 없고 저장해 두지도 않았습니다.
지성의 창고를 아무리 뒤져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지식을 찾을수 없습니다.
마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무지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자 이제 제가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그려면 여러분의 영혼이 성자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데 그것은 진리로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과 영혼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분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영혼에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육체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적이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결코 알수 없습니다.
설사 그들이 안다고 하더라고 왜곡되게 알 것입니다.
이 땅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육체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데 마음에서 의심과 혹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아나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제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으로 성자 하나님을 알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상태를 보이십니다.
둘째는 영혼의 지성에 저장된 육체로 유입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눈으로보고 들었던 세상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지식들이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영혼의지성에 비춰진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합니다. 주님의 영혼에 비췬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한인간으로서 종교에 헌신한 사람이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인들과 동등하게 취급할 뿐 그 이상을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진리의 지식을 만나 마음에 비취면 진리에 의해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심으로 마음에서 죄를 다스려 진리를 왜곡하지 못하게 하시고 진리의 지식이 진리대로 영혼에 투영되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하시는 사역입니다. 육체의 마음에 거하는 죄는 실지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는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우리는 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오신 성령 하나님께서 죄를 약화시키고 창조때 지음을 받은 그 참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게 이것이 우리의 본성과 성령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이때 성령 하나님은 자의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진리로만 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요 16:13)"
이 진리는 복음이고 복음이 찬란하게 마음에 비춰질 때 성령의 역사로 비로서 마음에 죄가 다스려져야 합니다. 이 죄가 다스려질때 죄는 깨어지고 우리 마음에 통곡의 아픔이 있습니다.
죄가 보이며 깨달아지고 자신이 죄의 덩어리임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진리로 영혼의 눈을 열러 우리 자신을 보게하자 죄가 보입니다. 이때 비로서 성부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것은 죄가 성부 하나님께 대적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냅니다.
만약 복음의 빛이 아니었다면 마음에 죄가 결코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복음의 빛이 비침으로 성령께서 죄를 주관하시게 되고 복음에 의해 죄는 자기의 힘을 잃고 성령께 마음을 지키고 있던 자기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존 오웬은 이런 상태를 죄 죽임의 상태라고 했고 죄가 마음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죄가 한 덩어리로 뭉쳐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흩어져 세력이 약화 되고 마음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의 지배의 상태에서 성령이 마음에 거하는 상태를 은혜의 지배 상태라고 말하고 죄 가 강하게 지배하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지배권이 바꿔지는 상태를 영혼의 변화 상태라고 합니다. 영혼이 변화된 상태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변화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바울과 옥중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천사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을 때 바울이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나타난 변화, 이데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빌립 집사에게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세례를 받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변화를 받는 오성에 분명히 인식되는 객관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이때 변화를 받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은 한결 같이 이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지난 날 동안 살았던 인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에 인식하고 결단을 하기 전 상태로 “형제들아 이제 어찌할꼬”라는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변화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현재까지와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삶의 새로운 세계에 이르게 되어 삶의 양태의 환경에서의 전혀 변화가 없으나 영혼에 일어난 변화에 의해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선회하는 것이고 참사람으로 삶이 출발되어진 것으로 교리적으로 죄의 지배에서 은혜의 지배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지배에 나아가는 것은 그동안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죄가 부숴져서 나뉘어 거하여 세력이 약화되었고 은혜로 인하여 점차 그 세력은 마음으로부터 떠나가게 될 것이지만 신앙의 거장들로 다시금 죄에 사로잡혀 곤고한 인생으로 떨어지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에 의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비췰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이때 마음에서 적용된 복음의 진리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는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성령이 함께 동반하여 역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성자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데 삼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각기 다른 역할에서만 드러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의 영혼은 어떤 상태로서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재한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비췰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비춰주시고, 죄의 지배 권리를 획득하셨음을 분명하게 마음에 적용 시키는 것입니다. 적용시킨다는 말은 죄의 지배를 박탈하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을 접수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5)” 라고 말하여 성령이 거하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확실히 말했으며, 이사야 57장 15절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 한 마음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라고 말함으로 높은 곳 뿐만 아니라 사람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로 십자가를 마음에 비췰 때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통회와 마음 깨어짐입니다. 마음이 깨어지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죄가 파괴로 인하여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복음 진리로 성령이 계시되고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주가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무덤에 갇힌 예수님이 죄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으로 마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너무 허망한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 선생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복음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는 성부 하나님을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자 하나님의 구속사역, 성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는 사역을 한꺼번에 보이심으로 삼위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되어집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계시되고 그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과 적용하시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계시되지 않은 일입니다. 지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이해할지라도 성부 하나님의 계시가 개인에게 적용되어 삼위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시는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뿐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육신의 약속의 자녀로 구분하였습니다.
약속의 자녀와 종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마엘은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종의 자식이라고 하고 이삭은 사라가 낳은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니라(창 15:4)”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86세에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를 종의 자식이라고 하는데 현 이슬람을 말하고 창17에서 아브라함과 세울 언약으로 할례를 행하게 했고, 이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백성이라고 구분하게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약속대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일백세였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에게서 후손이 나왔으나 하나는 종의 아들이요 하나는 약속의 아들로 구분이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렇게 구분이 됩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잘 이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의 자녀는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단순히 지식으로 이해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이며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목사였던 마틴 로이든 존스는 로마서 8장 강해에서 이런 비유로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런던 교구 목사 Rechard Cecil이라는 아주 위대한 복음적 설교자가 있였습니다. William Wilberforce 라는 노예 폐지 운동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과William Pitt 라는 역대 영국 수상 중에서 가장 젊은 수상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정치가였습니다. William Wilberforce 가Rechard Cecil이라는 설교자에게 아주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William Wilberforce 는 항상 William Pitt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리차드 세실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함께 갔으면 하는 매우 간절한 바램을 가졌고 Pitt에게 오랜 설득 끝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William Wilberforce 는 매우 기뻤고 그들은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Rechard Cecil 은 최선을 다해서 영적이고 격조 높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William Wilberforce 는 혼자서 기뻐서 흥이 났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Rechard Cecil의 설교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기쁨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예배당을 나갈 때 William Pitt 가 Wilberforce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Wilberforce. 자네는 알것일세 나는 Rechard Cecil이 설교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라고 했습니다.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장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자주 오른 쪽으로만 돌아갑니다. 그래서 종종 도로에서 빙빙 돌기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을 길치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도로의 감각에 대해서 잘 분간 할수 있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치가 있듯이 교회에도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함께 교회에 나와서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기도하며 서로 은혜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 백치입니다. Wilberforce 의 마음을 그토록 감동시키고 격동시켰던 Rechard Cecil 의 격조 높은 영적인 설교가 Pitt의 마음에는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진리가 선포 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충만한 은혜로 전달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백치로 전혀 감동이 없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등록을 한 다음 정상적인 새 신자 교육을 받고 적당한 교리교육을 받은 다음 정기적으로 행하는 세례를 받으면 교인으로 등록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각종 교회의 의무를 다하고 교인으로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설교에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감동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분명히 구분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영적인 설교를 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그계시가 없는 사람은 결코 성부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설교가 들리지 않고 어두움에 빠져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세워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사람은 죄의 경중을 따져서 구분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자식인가를 구분하시지 않습니다.
어느 민족인지를 구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람 곧 하나님을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진리와 함께, 성자는 십자가의 구속주로 성부 하나님은 언약의 아버지로 여러분에게 항상 계시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르고 각기 인격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으로 하나인 것 같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 인격이 다르고 별도로 존재하시지만 한분 하나님이신 것처럼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된 것도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으로 만나는 우리의 영혼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죄를 목격합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 온갖 죄에 삼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살았던 죄악의 삶,
자신의 행복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기중심의 삶,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으며,
정욕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혐오스런 냄새나는 사람으로
도무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런 혐오스런 죄가 보이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비춰지고 마음을 통하여 육체에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볼 수 없습니다.
죄는 지식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알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 앞에서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안보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진리에 의해 죄에 대한 지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전인격적인 감각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부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부들부들 떨고 우리가 죽을 것 같고 살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오고 견딜 수없는 공포감에 휩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린 시내 산에서의 광경입니다(출 20:18~19).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에 죄가 보이며 느껴지는 것은 지금 자신이 성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식으로 알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으로 느끼는 감각은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슬퍼하게 됩니다.
우리의 슬픔은 구원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식됩니다. 그때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에 불안해합니다. 이때 비로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비로소 우리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제 비로소 회개의 눈물과 함께 구원의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영광을 돌리며 삼위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통합적인 역사가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보고 우리의 본성과 육신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육신대로 사는 것”을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앎으로 자신을 분명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상태의 비밀을 깊이 알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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