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세속주의와 교회

생명있는 신앙 2010. 9. 12. 07:08

그리스도인입니까? 1,

 

1.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고 마음에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라는 영광을 받은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저주스런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우리의 삶이 죄 자체라는 분명한 인식 때문에 존재함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우리는 즉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그 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있었으나,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감당 할 수 없는 은혜에 우리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는 감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
,
끝없으신 은혜의 비췸,

다시 살게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

죄인에서 하나님 아들의 신분이 된 신분의 전환,

이런 것들은 단 한번의 회개를 통해 얻어지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존재한다는 영광은,

그 근원이 죄로부터 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슬픔이었지만,

존재된 사람에게 들러붙어 있는 죄가 사하여 진다는 놀라운 소식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반전은

존재자체 보다 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라도 태어났기 때문에 반전의 기쁨을 누리고, 

태어나는 영광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반전의 결과는 회개를 통하여 온 것입니다. 
회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
이런 외침의 결과로 우리에게 임한 회개는

우리의 존재 상태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복음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취었을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놀랐고, 이 모습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그런 자신을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회개하지 않으면 당하게 되는 미래의 비참한 결과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 행위가 회개입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심을 통해, 

이것들이 단순한 언어가 아닌 실재현상으로 나타내부여주심으로 더욱 분명해졌고,

그 사건을 목격함과 또 성령께 그 사건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적용시켜주심으로 우리안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적용 되어진 결과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는 구원사역은 진리인 복음을 매개로하시는 성령의 단독사역으로, 

구원 받기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인은 복음이라는 거울에 비춰지는 것 조차 불가능합니다
.
복음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필요한데,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파하면 성령께서는 사람의 영혼의 지성을 조명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의 지식을 지각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연인이 자기의 지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하여 주심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복음에 의한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성령의 조명에 의한 지식을 받고 그 복음으로 쏟아내는 증거가 아니라,

자기의 지식으로 인식한 복음을 외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제도적인 조직에 속한 교회들이

동일한 복음을 외치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성경에서 본문으로하여 설교를 하고,

같은 성경을 공부하는데,

말하여지는 복음의 내용은 구별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동일하게 구원에 속하는 열매와 같은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초대 교회이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중이시던 때에 예루살렘안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제사가 매일 드려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혹은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대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구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사건을 보면서 뭔가를 느끼거나,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 다면 자신의 구원을 진지하게 의심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완벽하게 흠없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예루살렘 성안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 제사드리는 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드리는 제사에 대해서 위선이며,

거짓이며,

진실이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만을 하는 자들이며,

그들에게 구원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시고,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자기도 구원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르려 하는 사람의 길을 막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여

사람의 상태에 따라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구별지어주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복음을 받은 사람과 자기의 지식으로 복음을 인식한 사람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자들이 성령께서 자기에게 복음을 조명해 주지도 않았는데 마치 복음의 사람인 것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의 지식으로 복음을 인식하고,

그 인식의 농도가 강렬하여 마치 성령의 조명에 의해 인식하는 것 같은 자극을 스스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일부는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씁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성령께서 조명하시지 않으시므로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은 지극히 불합리하고 완전하지 못한 결함과 무지를 함의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가 만난 하나님을 인식할때도 역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만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증언들을 살펴보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가인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생각이 옳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참 복음과 거짓 복음 어느정도 분별하는 안목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가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들은 말씀대로 조명하심으로 그 말씀이 우리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말씀,

곧 지식으로 새겨지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되어 의지의 작용으로 인해 전인으로 인식을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선포하는 자가 자기의 지식으로서의 복음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받은 말씀으로 인식을 가진 거듭난 사람의 선포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자기 지식으로 경험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서 성령의 조명을 기대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거룩하게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며, 자신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분명하게 구별하는 회개에 관한 분명한 서론에 있어서 참된 복음으로 회개하는 사람과

동일한 복음의 내용이지만 자기 지식에서 인식된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과의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마치 가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그 구원이 여러분의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나타난 열매인지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반성을 통한 성찰이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다가 끝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신앙에 처해져 비극적인 운명처럼 슬픔을 만난다면 저는 더 슬플 것입니다.

제가 그토록 진리를 외쳐,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리에 거하도록 하였으나,

그것마저 자기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담대한 신앙에 빠져 있다면 이것보다 슬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부자되는 방법이나 가르쳐 주거나,

인생이 잘되는 어떤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방법을 말하며,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어떤 신비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도덕적이고 지극히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저보다 여러분이 더 선생입니다.

그런일은 제가 여러분에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잘 알 것입니다.
모르신다면 지금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있는 여러분들이 한분도 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결과적인 삶을 살지 않기를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지금 눈물을 흘려 버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섯을 때 비극적인 운명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주님을 붙잡으시라고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을 심는 사역자입니다.
저는 오직 이 한가지,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이 만족을 누리고 한없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세속주의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진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부름을 받은 성도라 자칭하는 사란들도 진리가 무엇인지,

또는 교회 안에 진리가 있는지 조차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회개를 기대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뿌려진 그 수많은 전도지들에는 진정한 복음 보다는 인리와 성공주의 가르침과 교회 자랑만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세속에 물들어버린 기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데, 영혼은 진리로만 구원에 이르게 하고 진리가 지성에 공급될 때 비로서 영혼이 진리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자기 지식으로 진리를 인식하고, 인식한 그 진리대로 삶을 계속하는 사람에게 회개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을 까요? 

즉 자기지식으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진정 세속 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세속주의를 세상이라고 하십시다.

그 세상의 더럼다고 표현하고 그 더럼움에 뭍힌 삶을 세속주의라고 말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세상의 더러움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세상입니까?

세상의 학교입니까?

여러분이 보기에 타락스럽게 보이는 음탕한 곳입니까?

우범지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부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속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하는 장소적 개념으로 보는 가요?

나아가서 자기의 전문 분야를 건너다 보이는 상술이 통용되는 세상을 세속이라고 하는건가요?

욕심이 이글거리고 정욕이 들끓고 싸움이 있는 시장판을 세속이라고 말하는건가요?

이렇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에 깊히 관여하고 있으면서, 자신들 스스로 세속과 전혀 관계 없는 구별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세속에 있으면서, "! 나도 어쩔수 없이 세속에 물들어 있나봐!"라는 자주 말합니다.

제가 세속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놀랄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세속의 뿌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 뿌리를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향하여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세속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 세속의 근원입니다.

모든 세속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세속에 있으며 세속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세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세상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도 마태가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중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오( 15:18~20).” 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세속화는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보다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스스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들어와 교회를 세속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것을 교회에서 버리면 교회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로 들어갔다는 오만한 변명의 말을 하지 마십시요."

오늘날 교회에서 세속화를 빼내 제거하면 교회는 빈껍질 뿐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고 회개하지 않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있고 그들이 교회의 중임을 맡아 교회를 운영하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도 역시 진리와는 거리가 먼 설교를 하는 교회인데 어떻게 교회로서 남아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마음에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조직하여 함께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이 드러나지 않은 교회!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변화시킬수 없는 그야말로 교회라는 이름을 가져다가 형식만 가진 짝퉁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끌고,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설교를 진리라고 외치는 자가 이끄는 교회, 스스로 진리만을 가르친다는 속고 있는 자들에 의해 이끌림을 당하는 그런 모임이 세속화된 교회입니다.

세속화를 거부하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깨뜨리는 자기와의 투쟁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부숴져 본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가 무엇이고 자기의 근원이 어디이며, 자기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를 성령께서 복음을 자기 영혼에 조명하여 복음의 지식을 가지게 할 때 분명히 인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룩하다고 생각이 되는 수도원에서 자기의 몸을 상하면서 자기의 정욕을 억제하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의 욕심을 모두 버리고 고요하고 경건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무거운 망또를 뒤집어 쓰고 스스로 세상을 멀리하며 명상에 잠기거나 깊은 깨우침을 위한 묵상을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그 진리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고 고뇌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얼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광체와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을 자기의 몸에서 실천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경험된 진리를 자기 것인양 선포하는 말씀으로는 교회에 속한 청중들을 결코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뜻을 깨닫고 진리로 인해 고뇌하고 몸부림으로 진리의 뜻을 깨닫기 위해 자기가 체험하며 영혼들을 향하여 성령께서 조명하시는데 하자가 없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예배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16:13)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속과 구별된 교회는 진리로 인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회개가 있고 회심이 있는지를 살펴 보면 압니다.

회개라는 변화가 없는 교회는 세속화된 교회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이 중심에 서 있는 교회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교회입니다.  

회심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 있는 교회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설명하고 이야기 했다고 해서 성경적인 진리인 복음을 말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들이 모두 성경을 말한다고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착각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영혼의 지성에 복음과 함께한 비밀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그 복음을 위해 녹아지고, 그 녹아지는 지식에서 진액들이 쏟아지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셨던 진노하심과 아픔, 지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회개, 미래 성도들과 성도들의 자녀들과 후예들에게 심겨질 예언의 말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성도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목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손으로 하도 많이 책장을 넘겨서 책이 달아져 해어지든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노화가 되어 눈의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망가져 버렸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고, 매일 잠을 설쳐 온몸이 피곤에 치친 모습이고, 거듭나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며,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 영혼을 회개시켜 주십시요”라고 무릎을 꿇은 기도와 몸부림으로 인생을 살고, 강단에 서서 사자와 같이 복음에서 밝혀진 비밀을 선포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면 강단에서 온전히 내려가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진리를 선포해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 말씀에 따라 성도로 하여금 온전한 길에 서게하고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말한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하심을 말하는 복음이 풀어진 내용이기 때문에 그 복음이 복음 되게 설교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목회자 자신이 복음에 붙잡혀야 하고 진리로 인해 두려워 떨며 그 진리를 자기의 몸으로 체험하여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가지고 사람 섬기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평생 하신일이 죄인을 섬기시는 일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다가와 구원을 요청하면 결코 왜면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였고 자신이 선포하신 말씀에 충실한 분이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며,

죄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에게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은 무한히 인자하셨고

그의 용모는 빛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폭포수와 같고, 심연에서 솟아 오르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솟는 진리가 강단을 적시고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전장에서 장수가 적의 화살을 맞고 자기의 죽음을 느끼는 사람처럼 세속화를 뿜어대는 온갖 더러움의 샘이 부셔지고 진리에 의해 깨어져 버린 마음을 갖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외치는 진리는 듣는 청중들이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지속전인 변화의 삶을 살게 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신성으로 뚝딱 기적을 행하셔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하나님아버지께 눈물로 호소하시며 오직 사람을 섬기는 일에 몰두 하셨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데리고 낚시할 장소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즐거운 운동회로 사람을 즐겁게 할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을 잡아 맛있게 나눠 먹고, 웃고, 노래하며 즐거워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도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님도 아닌데 어떻게 주님과 같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빠져서만 살 수 있습니까?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지 그게 죄가 됩니까?

저는 말씀을 드립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죄 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그런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자신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이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속적으로 살았고 모세를 도왔습니다.

결국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중세시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천주교회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회개하지 않은 목사와 말에 있어서 지식에 있어서 달변가들이 이끄는 교회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전통적으로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매일 드리고 참여하면서 그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어두워져 있었느냐 하면,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에게 오셔서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더니,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죽여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예레미야28장에서 보면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이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왕에게 인정을 받은 선지자였고 백성의 사랑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달변가였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이라도 그의 말에 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사용을 받아 옳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왕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선지자였습니다.

오늘날 세속주의 사명자들과 같이 모든 성경으로 증거를 대며 말을 합니다.

왕 앞에서도 성경을 말합니다.

아주 달변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람을 회심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달변가였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의 세상적인 지식이 복음으로 녹아지지 않고 자랑삼아 거론되며

그의 유창하고 논리적인 이야기들과 예화들이 사람을 사로잡는 설교가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지만 대부분은 사람의 인리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 28:11)고 말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말이 아니었고, 또 다른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내용도 있습니다.

그 말의 일부는 자기의 감동에서 나온 자기의 말입니다.

세속적인 선지자는 자기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믹셔 하거나 아니면 자기 말을 섞어서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8장 전체의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선지자 하나냐는 계속해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고 자기가 전하는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칩니다.

그가 그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왕과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힘있고 용기있게 외쳤으나 실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그럴싸한 성경을 인용한 사람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과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난 말의 진리는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현대교회의 문제에 있어서 설교자들이 한결같이 성경을 근거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선포하는 설교가 지극히 성경적인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설교자가 되기까지 일정한 과정을 제도적인 학교에서 배운 학문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성경을 근거로 해서 해석하는 내용이 틀렸을 것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말씀과 참된 진리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거짓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듯이 교회의 모습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자신도 자신 속에 있는 세속화에 속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이제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 너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를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28:7~9)

그렇다면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 목회자들의 참과 거짓을 알기 위해서는 그 목회자가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는 내용이 응하는지 응하지 않는지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목사들은 함부로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아주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을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하시면 예언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담대하게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 예언은 다양합니다.

지식인 경우가 있고 단순히 진리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예언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이 반드시 미래를 말하는 예측하는 말씀이 아니더라도 예언적인 말씀은 반드시 함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포된 진리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경청하고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삶속에 얼마나 풍부하게 드러나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감동되어 진리된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지도 않고 강단에 서서 외치는 모든 말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성경을 말하고 성경을 입에서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참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그는 삯군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의 교회는 항상 싸움이 있습니다.

교회가 분파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찾아 볼수 없습니다.

거듭남도 없습니다.

복음으로 부르는 역사는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목회자가 복음의 기본 지식조차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할 때 제 것으로 말합니다.

요한 복음 8:44에서 사도가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래서 현대 교회가 경건의 모양과 이름을 있으나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회와 같이 사람이 머리에 있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머리가 되신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속화가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주님 피곤하시지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뭐하려 피곤하게 하십니까?"

"저에게 맡기십시요"

"제가아주 잘 이끌고 가겠습니다."

"죄를 덜 짓도록 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배를 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에게 맡겨주세요"

"주님 십자가 지시느라 수고하셨잖아요!"

"이제 잠시 쉬십시오." 하고는 자리를 빼앗아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주님이 머리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머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머리가 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항상 싸웁니다.

시기와 질투와 탐욕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주권전쟁을 벌입니다. 이권의 다툼을 일삼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편애에 불만을 품고 동료를 불러 모아 편을 가르고 일어납니다.

목사를 쫒아내고 새로운 목사를 불러들입니다.

다툼이 쉬지 않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안계십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 되는 것이 아니라 인리가 외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진리가 외쳐지고 선포 되어진다면 결코 이런 불상사들이 일어나도록 성령께서 잠들어 계시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성령이 항상 함께 계신다고.(요한복음 16:13)배웠습니다. 성경이 말했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리를 성령이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요일 5:7)

자 이제 우리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여러분에게 3시간에 걸쳐서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진리에 서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은 무엇을 붙잡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니 성령의 조명에 의해 진리의 복음에 우리가 사로잡혀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붙잡고 목회자는 복음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지식을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바쳐져야 합니다.

성도는 복음을 붙잡고 그 전해지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쉬지 않은 기도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주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을 증오스럽게 생각하십시요.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똟어져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 되시도록 여러분이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본이 된 바울

중동 지금의 터어키과 로마까지 지중해를 연안으로 하는 아시아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은 사람으로 세상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기가 표독스런 짐승과 같은 야수성을 가졌던 그가 복음에 녹아져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세 번을 태장으로 맞고 죽을 뻔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고난당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본 받아 사는 오늘날 목회자의 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참된 목회자의 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목회자의 입에서 낚시하려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한가하게 여행을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까?

그는 세상에서 구별된 본을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이게 하겠다고 드려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은 섬기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군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람!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

영혼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이렇게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의 가정을 돌아볼 생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베드로의 아내가 그런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남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주님을 대리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치 주님처럼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목회자의 아내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자녀들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편을 대신해서 가정을 이끌고 가야하고 자녀들을 대신 책임져야 합니다.

그녀는 힘이 없는 손으로 무거운 빨래를 빨아야 합니다.

손에는 힘이 없고

온몸은 희생의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것 같은 희생하는 모습의 본이 됩니다.

목사는 희생하면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겨두는데 아내는 결혼을 하는 그 순간 남편에게 다 념겨진 자신의 존재가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입니다.

일에 지쳐서 산들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몸으로 일어서 일을 하고 또 일을 하는 가냘프기 이를대 없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도 그녀를 보면 불쌍하게 볼 수밖에 없는 정말 가련한 여인입니다.

스쳐가는 바람에 머리가 날리고

얼굴 여기저기에 거뭇거리는 연약한 흔적들이 보이면 그것을 감추려고 분을 바르고 물을 적시어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혹시라도 성도들이 볼까봐 자신의 옷 메뭇세를 훔치는 성도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연약하기 이를대 없는 여인입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힘이 되어주지 않은 홀로 서있는 외로운 인생을 살면서,

외로움과 육체의 힘든 그 수고의 고통을 혼자 이겨내고,

아픔을 참고 견디면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눈물이 흐르면 손수건이나 화장지로 닦지만

이 여인은 눈물을 밖으로 흘리지 않으려고 가슴 속에 눈물자루를 달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아침 기도시간에 아무도 들리지 않게 하나님 앞에만 다 쏟아 놓는 숨김이 있는 하나님과 비밀을 가진 여인입니다.

사람의 사랑을 잃어버린 여인,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따뜻하게 남편의 품에 앉겨 사랑을 속삭여 보지 못한 세상의 사랑을 빼앗겨 버린 가련하기 이를데없는 여인,

그 많은 한을 가슴속에 묻고 주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그 여인,

자기의 이름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세상에서 지워져버린 것 같은 보일 듯 말 듯한 여인이 목사의 부인입니다.

누가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왜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아침마다 교제하시며 눈물을 받아주시기 위해 그녀를 택하신 것입니다.

목사와 목사 부인이 이 세상을 즐거워하려고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까?

세상에서 기쁨을 맛보고 즐기는 한 순간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인가요?

세상에 부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러 종으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 맡긴 양을 치라고 고삐를 손에 쥐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고삐를 잡고 어디에서 여유를 부릴 만큼 한가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한가하게 여유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는 성도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고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세대도 모르고 세상을 삽니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지금 오셨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선교를 위해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여름에는 여름이니 교회를 이끌고 수양회를 가실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많으니 장로들을 데리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실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즐겁게 사시며 복음을 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단의 머리의 꼭대기에 앉아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을 망가지게 하려는 사단의 수단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오늘 아침에도 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식으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완악함과 사단의 간계를 아셨기 때문에 지금 오시지 않으시고 2000년전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디베랴 광야에서 만난 귀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벌써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의 눈에는 예수께서 오신 것은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그때 오신 것입니다.

귀신이 아는 그 때는 바로 오늘 예수께서 오시는 것, 바로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세속주의입니다.

!

저는 세속주의가 세상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세속주의는 세상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바로 우리 마음에 있었습니다.

사단은 늘 우리를 속여 "마음을 잘 지켜 그러면 안전해"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믿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를 때 사도들과 선지자, 전도자들을 사용하여 복음으로 불렀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킬 때 복음을 선포함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복음에는 의가 나타나서 사람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거니와” 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 보면,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혼미케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것은 세속주의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합니다.
세속주의는 여러분의 타락한 그 부패의 성품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세상으로 나와 세상을 더럽히는 것이지 세속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너무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5:17)

여러분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선하게 하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마음이 선한줄로 알고 있지 않았나요?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볼까요?

세속은 여러분을 더럽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세속보다 더 추하고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시지요?

그리고 지금부터 마음에 있는 그 세속을 씻어내십시요.

여러분 자신이 중심이 되는 그것을 씻어내십시요.

목회자는 진리인 복음에 사로잡히고, 복음속에 감추어진 지식에 붙잡히고, 그 붙잡힌 지식에 자신을 밀어넣고, 하루 종일 아니 몇일씩 책을 읽고, 하나님을 만나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영적 세계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강단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버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는 세상의 유희에 자신을 빠뜨릴 여유가 없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자신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는 세상을 즐거워하는 육신의 정욕을 쫒는 언어가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온 사람은 한결같이 맑은 물에 씻기듯이 씻겨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만나 대화하기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늘에 속하여 하나님을 매일 만나는 사람이고,

우리는 땅에 속하여 땅의 생각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할 때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뀌고 조금씩 그에게 다가가면 우리 영혼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 씻겨지기 시작하고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씻겨 예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언어에 있어서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언어가 또렸하고 분명합니다.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