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체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자기 자신을 넘어뜨리는 육체의 의지로부터 능히 이길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 지어지는 것”
일반적인 비 신자 모두는 영혼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비 정상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앞에서 아담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도 반론을 제기할 생각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 만큼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어두움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지식이 제시되어도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그리스도를 필요로하는 그 순간을 시간적 순서로 표현한다면 하와가 건내주는 열매를 먹기 이전으로 하와의 모습을 보고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갈등하는 때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하나님의 형상에는 하나님에 관한 창조의 지식과 하나님이 뜻이 새겨져 있어서 피조물이 하나님을 스스로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지혜의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으므로 영혼은 이 형상의 빛에 의해 의지를 마음에 반영하여 경향을 일으키고 의지는 생각을 일으켜 반영된 의지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환경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반영된 영혼의 의지는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거부의 의지를 보냈으면서도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또 다른 지식을 반영하는데 그것은 선악과를 섭취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에 관한 비밀의 경륜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반영된 그 지식에 의해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서 자신이 선악과를 먹든지 아니먹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봍잡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영혼에서 반영된 의지가 마음에 있고 마음에서 비로서 의지가 생각을 일으켜 행위 직전에 육체의 감각 기관에 전달되고 육체에서 비로서 행위를 나타내기 이전에 육체의 또다른 의지가 마음에 반영시켰습니다. 마음은 이미 생각을 일으켰고 육체는 마음에 의지를 반영시켰는데 또 한가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이 생각이 다르면 각각의 상황에 따라 행위의 순서가 반영되지만 일치하거나 혹은 상충된 의지의 반영이 마음에 일어났을 경우 생각은 충돌하여 각기 다른 두 의지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 마음 이라고 했으며, 서로 상충된 의지의 반영은 바울 사도이 말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라고 구분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의지가 반영된 마음에 육체의 의지가 상충되게 반영됨으로 하나의 의제에 대한 두개의 별도의 의지가 충돌을 일으켜 마음에서 일으켜진 생각이 갈등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은 사람의 마음에서 두의지 가운데 어느것을 선택하는제 지켜 보고 계시지만 의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시므로 그 결정을 온전히 사람의 것으로 존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마음에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때 하나님께 몯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런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물었을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시하여 알려주실 것이며 옳은 방향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담의 영혼이 아직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5, 19)” 라고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라고 말할 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의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를 향하는 존재의 성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이고 이것들과 동조하는 것들을 사단 및 마귀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나타나는 본래적인 경향이 허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와 같이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존재하는 흙에서 지으셨고 영혼과 육체를 별도로 지으셔서 사람이 되게하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사람을 존재하는 흙에서 지으신 것은 존재로 하여금 무를 향하여 돌아가려는 성향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존재가 본 흙으로 돌아가려는 “존재의 성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존재하는 피조물들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어느 기간동안 존재한 이후 반드시 그 성향에 의해서 본래왔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죽음은 본래 흙에서 왔으므로(창 2:7)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사실을 사람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창 3:19) 존재하는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존재의 성향에 까지 포함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라(전 3:11)”, 라고 사람에게 주어진 그 성향이 다른 피조물들과 분명히 구분되었음을 말합니다. John Calvin 선생도 기독교 강요 2,1,1에서 “선에 대한 열의와 영생에 대한 명상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짐승을 구별하여) 인류의 위대한 고귀성이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으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해력을 천 품으로 받은 것을 감사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지정된 목표인 복된 영생을 향하여 매진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지으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은 사람의 모든 구성으로부터 전 기관을 대표합니다. 이 기관은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두개의 의지는 결합한 하나의 의지 안에서 각각의 의지를 마음에 반영할수 있으나 영혼의 육체를 벗어난다거나 혹은 반대로 육체가 영혼을 벗어나서 별도로 의지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두개의 의지가 결합될 때 비로서 사람으로서 마음이 형성되는데 결합되지 아니한 영혼이나 육체의 별개로서는 의지가 반영할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사람의 완전한 구성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기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마음안에 있는 별개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의지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기관이기 때문에 마음이 여러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완악한 마음, 견고한 마음, 강하게한 마음, 마음을 지키는 것, 순한 마음, 선한 마음, 이런 모든 마음들이 경향을 가진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마음은 영혼이나 혹은 육체가 마음에 반영한 의지이며 마음은 이런 것들로 생각을 일으켜 행동의 근거가 되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심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지)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별개로 존재한 의지가 마음에 반영된 영혼의 의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시험의 과일을 두신 것은 사람의 육신에서 정욕을 제어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 아담은 완전하게 지음을 입었으며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완전함은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까지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의지를 꺾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신뢰할만한 존재로 지으셨고 그가 타락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시지 않을 또 다른 더 완전한 계획을 가지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의지 곧 정욕을 제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방향으로만 활동하는 경향을 가지게 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기를 최초 사람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육체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최초 사람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여러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고 경계를 느슨하게한 사람에게 드디어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히기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라고 했고,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과일을 볼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지라(창3:6)”라는 욕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와 영혼의 의지가 아니라 육체의 의지가 마음에 반영한 욕구로서 정욕이었습니다. 이 정욕이 영혼에서 반영된 금지의 말씀으로 물리쳤다면 육체의 욕구를 능히 이길수 있었지만 하와는 이 두 마음에서 갈등하는 선택 상황, 즉 마음이 일으킨 생각에서 육체의 의지로 기울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기관인 마음이 하는 일을 알수 있습니다. 마음은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상충하여 충돌할 경우 생각을 일으켜 의지를 선택하도록 합니다.
분명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하와는 여러날 유혹을 받았을 것이며, 유혹은 하와의 마음에서 생각을 일으킬 정도로 끈질기게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육체에서 발동하는 정욕을 쉽게 차단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단번에 하와가 유혹을 받아 넘어졌다고 한다면 사람의 완전한 창조에 석연치 않은 생각이 유혹 받은 죄악처럼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추악한 간교함이 하나님의 완전성에 저의 노력으로 협력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있으나, 하와가 받은 유혹과 넘어짐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쉽게 무너진다면 너무 어의 없는 사건이라고 말 할 수 있어서 하와가 넘어질때까지 끈질긴 유혹이 있었고 드디어 하와는 넘어지고 말았다고 말하므로, 제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변호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사실만을 독자들에게 알리려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글을 계속 쓰는데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와가 어느것을 선택하든지 사람의 전 인격의 기관을 대표하는 마음이 택한 것이므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약 성경의 사실과 같이 하와가 금지하신 열매를 따서 먹음으로 타락하게 되는 것이 완전하게 지음을 받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잘못 선택한 것이라면 지으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전지 전능하신 분이신데 하와가 범죄할 것을 몰랐느냐고 반문하고 범죄를 막아주지 않으셨으므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오만하게 논증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와와 아담을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와 자신은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영혼의 의지가 마음에 반영하여 경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악과를 입에 물고 잠시동안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커다란 도전과 씻을 수 없는 엄청난 반역을 저지르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슴치 않고 즐겼다는 것을 알고 뉘우치기도 전에 비극으로 그녀의 몸에서 나타났습니다. 곧 거룩하게 덧입혀졌던 신적 의상이 벗겨졌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이제는 곧 썩어 없어지고 부숴질 만족할 수 없는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창 3:7) 하와는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가 먹었던 범죄의 비극을 남편인 하와에게도 과감히 건내는 용감함을 보였습니다. 이때 하와에게 느껴진 육체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그녀는 아주 담대하게 더 큰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의 공회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고 재판을 할때 오만 방자하게 죄를 찾으려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고문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심문했고 죄를 자백 받으려고 온갖 거짓 증인들을 세웠습니다. 죄를 찾지 못한 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자 그것을 죄로 정죄하고 삽자가의 저주에 내어주었던 그 뻔뻔스럽고도 담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몸에서 빛나고 있는 남편인 아담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 떠는 손을 내밀어 범죄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3:6“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들이 타락하실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고 죄로 인하여 비극적인 세계사가 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최대한의 안전한 선택을 하도록 그들의 마음에 거하셔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A를 선택했으나 B가 행동 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사람이 택한 그 의지는 자신에게 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생각 이외의 역사를 행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특별히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예외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담의 범죄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간섭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실행하여 범죄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과감히 범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자에게 귀를 더 가까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 사람이 범죄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하려면 첫째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의지가 항상 질서롭게 유지되어 마음에 반영되어야 하고, 두 번째 마음에 계신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사람의 질서로운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자신안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의지가 항상 질서롭게 마음에 반영되어야 한다.
사람의 구성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종교 개혁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사람의 구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관계한 지식을 육체는 피조세계와 관계한 육체의 감각으로 얻은 지식을 마음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충분히 언급한 것이므로 다시 이곳에서 반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와의 타락에 관한 예를 들어 질서롭게 영혼의 의지가 마음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을 설명 하려고 합니다.
하와는 육체의 의지가 마음에 반영되어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마음으로부터 육체에 들어아 온갖 감각에 육구를 일으킨 의지와 유혹의 지식들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시켜 판단을 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먹음직 하고, 보암직 하고, 탐스럼게할 만큼 아름다운 실과를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 영혼의 지성에 올바른 판단을 받고 영혼이 판단하여 마음에 반영한 영혼의 의지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런 질서로운 판단에 의한 의지가 아니면 결코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는 의지입니다. 하와는 이런 질서로운 움직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넘어지는 것은 영혼의 지성에 존재하지 않은 지식이 육체로부터 의지를 일으켜 마음에 반영시키므로 마음이 혼란 스럽게 된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은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광체로 지식이 반영되어 먹으면 안된다는 분명한 의지를 마음에 반영시켰습니다. 이런 결과는 지극히 질서로운 마음의 작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의지는 영혼의 판단을 받았으나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하와의 마음은 곧 바로 흥분 되기 시작했으며 강력한 욕구의 발정이 일어나는 것처럼 불같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욕구의 발작과 같은 상황과 함께 사단의 유혹이 귓가에 들려 왔으니 그것은 아주 신비한 속임수가 영혼의 의지를 무시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거짓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지식이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반면 그것을 공격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왜곡된 의지였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3:3)”라고 말했으나 하와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사단이 유혹하는 말은 “아니라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창3:4)”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에 사단은 하와를 강력하게 이끌어 의지를 확고하게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말하지 않은 비밀”을 밝혀 고발이라도 하듯이 공격하는 강력한 속임수를 더합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고 하나님 위에 서게 합니다.
질서롭지 않은 사람의 내적 움직임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광체에 판단을 받아 마음에 반영한 영혼의 의지를 싫어 합니다. 바울 사도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지체 속에 다른 법을 더 따른다고 말하면서 결국 사람이 죄에 빠지고 허우적 거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롬 7:21-25)
2) 사람들을 항상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거하시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고 우리가 부르면 들으시고,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지할 분은 마음에 거하신 하나님뿐입니다. 하와는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영혼의 의지에 매달려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롭게 혼자 두시지 않으시고 마음에 거하셨습니다. 하와는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묻고 자기의 행위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해야했었습니다. 영혼의 의지는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육체의 의지는 눈에 보이는 어떤 다른 것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의지는 결코 마음에 거하시는 하님을 발견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와가 유혹을 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금하신 열매를 바라 보았을 때에는 마음이 거부하므로 강하게 육체의 의지를 부인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허무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였고 육체의 의지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과감히 하와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은 하와와 아담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사람을 넘어뜨리는 일에 결코 힘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도록 부추키고 자존심을 일으키면 육체는 아주 힘없이 허물어져 마치 강한 존재와 같은 약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 육체의 의지에 기울인 상황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케하는 영혼의 의지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육체의 정욕을 키워갈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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