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Dominance of sin, 죄의 지배,

생명있는 신앙 2011. 2. 17. 13:1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4) 죄의 지배

 

사도와 교회의 전통을 자랑할 만한 개혁교회 신학은 죄에 관한 정확하고 아주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개혁교회가 말하는 죄의 지배에 관한 가르침은 오랫동안 안개속을 더듬는 것과 같은 희미한 시야 속에서 어려운 교리들로 오랫동안 힘들어 왔고, 성도들은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가르침에 의해 명료하지 않은 지식을 붙잡고 힘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을 붙잡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죄의 정체에 관하여 눈으로 사물을 보듯이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아쉬움들 때문에 더욱 성령을 의지하고 죄와 투쟁하며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개혁 신앙의 빛은 높이 드러났으며 교회를 세우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개혁교회가 말하는 죄는 '경향성으로 존재하는 힘'이나 '법의'였습니다.  '경향성에 의한 힘'이란 목표를 빗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을 말합니다.

죄는 사람 속에서 역사하였고 사람을 타락시켰으며 아주 조금씩 심지어 강력한 힘으로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죄가 소리 없이 어떤 힘을 가하거나 노력하는 것도 없으며, 술수를 쓰지 않았고, 사람 안에서 부터 아주 조용히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고, 사람들이 죄 속에 깊숙이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신을 차리고 창을 바르게 세우며 적을 향하여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자세를 취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진영도 갖추지 않은 채  괴력을 발휘하여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 괴력은 죄의 힘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 자신으로부터 나왔으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죄와 멀리하고 죄를 거역하고 죄에 대항하기 위해 진영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날마다 노력하는 등 시간에 따라 혹은 정한 시간을 가지고 온갖 방법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완전 무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놀랍게 더욱 사람을 죄 속으로 빠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작 죄를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한마음으로 진영을 갖추고 도열하여 서서 죄와 대적하려고 하는데 앞에 보이는 깃발을 보고 죄의 군대의 막강함 앞에 지래 겁을 먹고 움츠리고 있는데, 실상 그 깃발아래 도열하고 있는 죄의 군대는 하나도 없는 빈 공간일 뿐입니다. 이 얼마나 혼란스런 상황입니까?

한명도 없는 적앞에 도열해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고 불쌍해 보일까요?

죄는 최초부터 도열해 있는 성도안에 잇었으며 성도를 혼란스럽게해서 죄라는 적이 앞에 보이도록 하였고 자신은 성도에게 깊이 자리를 잡고 결코 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대항하는 죄가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활동하므로 모든 것이 죄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되면 얼마나 자기가 자신에게 속고 살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추스려 바른 길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는 자세를 취하자 죄는 어느새 우리의 그 올바른 생각에 죄의 씨앗을 뿌려 열심히 죄를 향하여 한발씩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무지개를 잡으려 가는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죄라는 깃발을 보고 전진하지만 결코 죄의 실체는 드러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전진,

목청을 돋우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적을 향하여 돌진하라는 설교자들의 그 힘찬 외침,

그 모든 것이 죄의 힘으로 죄를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기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세째 딸과 함께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갔습니다.

 방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눈도 어지럽고 글을 쓰는데 정신도 맑지 않아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딸을 깨워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운동도 할 겸 바람도 쐐이기 위해서 갔기 때문에 가볍게 운동을 하고 운동장을 돌던 중 딸이 한가 지 제안을 했습니다. 아빠의 자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운동장 안에 야구 경기를 하기 위해 그려놓은 홈베이스 자리로 저를 데리고 가더니 홈베이스를 그려놓은 사각 안에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서서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앞을 바라보며 50발자국을 제자리 걷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숫자로 구령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구령하는 동안 저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능한 그 자리를 제대로 걸어서 딸에게 아빠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생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열심히 딸이 세는 숫자에 맞춰 걸었습니다. 한참 걷는 도중 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약간 좌측 쪽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서 딸이 장난하려고 약간씩 자리를 이동하여 저를 속이는 것으로 혼자 판단하고 딸에게 좋은 모습을 좋은 모습을 보여 주어 자세도 바르고 건강함을 보여주려는 생각으로 또박또박 자세를 곧게 하고 잘 걸었습니다. 드디어 사십이 지나고 한참 후 오십이라는 구령이 마칠때 저는 자신 있게 구령에 맞춰 발을 세웠고 눈을 떴습니다.

딸은 '아빠 자세가 이겁니다.' 라고 '심각합니다.'

아빠의 오른발은 왼발보다 짧아 졌고, 아빠의 자세는 우측으로 약간 뒤틀려 있다고 말하면서 근심스런 표정을 짖고 있었고, 저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자만은 순식간에 꺾이고 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우측 약 45도 방향으로 약 2m를 걸어 나갔고 처음 시작할 때 자세를 곧게 하고 섰던 그 자세에서 약 45도 각도로 돌아서 있는 저의 자세를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중심을 잡은체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50발을 걷는 동안 앞으로 2M 옆으로 약 45도로 나가있고, 시선 방향은 처음 봤던 자리에서 45도 정도 우측으로 돌아 서 있었고 딸은 제 앞에 서서 구령을 하여 발을 맞춰 숫자를 세던 것이 제 뒤쪽에서 구령을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걷는 도중에 방향이 틀어지는 감각을 목소리를 통해서 느꼈으나 그것을 장난으로 알았고 저는 똑바르게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게 하고 계속해서 제자리를 걸으려고 애를 쓰고 걸었습니다. 저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고 장애인도 아닌데 눈을 감고 걸을 때 저의 자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올바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신이 이상하거나 육체가 비틀어져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자세가 틀어지고 몸이 이상해져 가고 결국은 그런 결과들로 인해 질병을 가져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곧바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길을 걷고 있지만 그것이 생각과 몸이 올바르게 되어 있지 않는 다면 생각은 바르다고 할지라도 움직이는 몸은 틀어진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금 틀어져 있는 자세는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죄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고 믿게합니다.

비틀어진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일이나 걱정스러운 일들은 외부로부터 온것이라고 생각하고 재수없는 운명의 사건으로 치부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이끌고 죄와의 전쟁터에 참여시키고 진영을 갖추고 도열하여 서서 적군을 향하여 돌격을 준비하고 서 있으나 놀랍게도 그렇게 서 있는 진영앞에 죄의 깃발만 보일 뿐 죄는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죄의 군대는 깃발뿐이고 죄의 실채는 이미 성도들의 마음에 깊숙히 침투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로 하고 육체는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생성하면 소멸되는 시간에 갇혀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혼만 불멸하고 육체는 소멸하는 존재로 지으시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이신 말씀을 주셔서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에 영원한 생명이 되는 말씀을 거역하므로 생명을 멸시하였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주신 생명을 멸시하는 사람이 비참하게 되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도록 주신 생명의 말씀을 멸시하였고 왜면했습니다. 

시간 안에 한정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육체가 생명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진리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성되고 소멸을 반복하는 시간 안에 보내졌다고 말했습니다. 

“있으라”고  말하여진 말은 “있”이라는 음절이 소리를 발하고 “으”라는 다음 음절이 소리를 발하면 “있”은 이미 과거가 되고 소멸되어 버리고 “라”라는 음절이 소리를 발하면 “있으”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음절이 되고 사라지는 것처럼 피조세계의 존재들에게 적용된 시간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것을 잘 알 것이지만 저는 이 사실을 어거스틴의 글을 읽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안에 지음을 받은 사람의 육체가 생성과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람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에 주셔서 영생하는 생명을 지닌 그 육체가 영혼과 결합되어 영생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여되고 그 말씀 가운데 영생의 말씀인 행위언약을 주셔서 사람이 그 행위언약을 영혼의 지성에 보존하고 스스로 지켜 그것에 의해 시간에 속한 소멸을 향하여 나아가지 아니하는 영생을 보존하는 상태로 유지되는 때까지 사람의 창조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잠언7:29”입니다.


우리는 참 사람인 우리의 본 모습과 우리에게 드러난 죄의 정체를 찾으려고 이렇게 오랫동안 헤매고 있습니다.

많은 선생들이나 선배 신학자들은 죄의 정체에 관하여 그 본채의 모습을 설명함에 있어서 대부분 어원을 근거로 했습니다. 죄에 관한 어원은 히브리어로서 [하타] “빗나감”을, 헬라어 [하마르티아] “표적을 빗나감”이라는 해석에서 정의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생인 어거스틴은 “선을 행하기에 부족함”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런 정의들은 모두가 추상적인 것들이어서 사람들의 인식에 분명히 반영되지 않아 영혼의 지성에 명확하게 새겨두고 시시때때로 죄에 관한 그 지식을 이성에 대입하여 감성을 가지고 살도록 명확한 지식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서 영혼 활동으로 마음에 반영하면 마음은 지식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껴 고민하고 궁구하며 생각해야 하는 어려운 사고의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의 노력은 많은 지식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어렵고 혼란을 더하여 마음이나 영혼의 지성에서 뚜렷하게 사물의 한 개체를 감성하는 것과 같은 결론을 얻지 못하여 그 지식이 영혼과 육체와 마음을 반복적인 분석과 정의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과중한 사고에 육체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육체의 피로를 가중하고 결국은 이성 활동의 혼란을 겪거나 심한경우는 그것으로 스스로 지나친 추상적인 개념의 정의에 의해 이성 활동에 재한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지로 죄에 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죄라는 단어의 어원의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위”라든가 “선을 행하기에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도 사람이 이해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의미들이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의 상태가 명확하지 않은 의견이라는 점이 사람의 영혼에 온전한 지식으로 새겨지지 않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1) “주체의 상태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짓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짓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죄로부터 행위가 드러나는 것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함으로 죄가 아니라 악을 말하지만 죄는 악을 행하기 이전에 악을 행하도록 하는 어떤 영혼의 지성에서 마음에 반영한 그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죄”는 ‘악’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악’을 일으키는 ‘동인’으로 영혼의 지성에 마음에 반영한 결론된 지식을 죄라고 말하는 것으로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말입니다.

너무도 간단합니다.

이미 죄에 관하여 말하였고 죄는 영혼에서 마음에 반영한 영혼이 결정한 결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영혼의 결정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작용은 육체의 감성을 얻은 어떤 지식, 예를들어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 눈으로 본 사물의 형상, 손으로 만져본 어떤 느낌 등의 감성된 미확인 지식에 관한 자료를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면 지성에서는 이미 지니고 있는 지식으로 감성된 자료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그 감성에 대한 결론을 얻고 그 결론을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죄라고 말할 때 죄를 행하는 사람을 주체라고 하고, 그 주체의 상태로부터 행동으로 드러난 행위를 ‘악’이라고 정의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는 동인을 곧, 영혼의 지성이 마음에 반영한 지식이 ‘죄’가 되는 것인데,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육체의 감성에 관한 결론들이 마음에 반영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반영된 수많은 어떤 지성의 결론 중 어떤 하나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죄입니다.

영향을 미치는 죄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지를 일으켜 육체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체와 영혼과 같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므로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되어 드러나게 된 것이고 사람의 문으로 육체의 감성과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의 통로이고 사람의 대표 기관처럼 표현되고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스스로 의지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영혼의 지성의 지식으로만 의지를 일으킵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마음이 스스로 영혼과 혹은 육체와 독립된 활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있는 의지는 영혼으로부터 받은 지식이 아니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마음에 의지를 선택하는 동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감성과 영혼의 지성에서 마음에 반영된 지식 가운데는 지식간의 판단을 필요로 하는 어떤 갈등의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행위 언약을 지켜 순종하는 지식을 영혼의 지성에서 마음으로 반영되었는데, 영혼에서 하나님의 행위언약을 순종하지 말라는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두 지식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사람의 행위에 관한 영혼의 지식에 의해 의지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영혼의 지식에 의합니다.  이것은 의지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 그것에 관해서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게 사람의 의지에 맡겨 두셨습니다. 이때 어느 것을 행하도록 결론하는 동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문제는 지배를 일으키는 동인을 가진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인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죄의 경향성만을 가진 사람, 아니면 그 반대의 옳은 것만을 선택하는 경향성만을 가진 사람, 또 다른 죄나 옳은 것이나 둘 중에 아무것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을 ‘주체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악을 행하도록 하는 원인이지만 직접 악을 행하기 전에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영혼이 힘을 지니지 못하고 육체와 물질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구분 되는가? 사람이 악을 행하기 이전에 사람의 의지를 일으키는 원인이 영혼의 지성에서 마음에 반영하는 그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이 의지가 독자적으로 의지를 일으키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 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의학적인 용어로 정신적 질병에 처한 사람이라고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행하도록 원인을 마음에 반영하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죄를 마음에 반영하는지 원인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구조상 죄를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켜 행하도록 하는 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고 영혼의 지성에서는 그 결론을 마음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반영한 지식은 영혼의 지성이 결론을 얻은 것이며 그 결론은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체의 오감으로 무엇을 얻었느냐 라고 할 때 그 감성은 분명히 외부에 있는 사물이나 지식입니다. 사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어진 감성이 그대로 마음에 반영되어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을 지식화하여 그 사물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그 사물에 대한 표현 및 반응을 결정하는 분석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감성에 대한 결론을 마음에 반영하여 마음에서 반영된 결론에 따라 행동을 하려는 의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로 행하는 모든 동인은 영혼의 지성의 판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불순종도 역시 영혼의 지성에서 판단한 결론이 마음에 반영되었고 그 반영의 결과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의지로써 ‘악’ 곧 행위이고, 죄는 악을 행하기 이전에 마음에 반영한 영혼의 결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행위언약은 말씀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하여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오감이 얻은 감성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를 얻었고 그것을 영혼의 지성은 생명은 행하지 말라는 결론을 사단의 말의 죽음은 행하라는 결론을 마음에 반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한 가지의 지식에서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결론이 마음에 이르자 갈등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육체의 욕심을 쫓는 경향으로 나아가 버렸다1)고 말하고 있지만 이지점에 있어서 영혼의 지성은 육체의 욕심을 쫓는 경향에 관하여 분명한 실체를 찾지 못하는 혼돈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죄의 정체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지성이 죄의 정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혼돈되지 않은 상태가 필요한데 그런 상태는 죄의 모습을 영혼의 지성에서 오성으로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고도의 훈련된 지성 작용이라든가 아니면 육체의 오감으로 확인하여 감성을 얻고 그것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오감에서 얻는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유는 죄는 감성(느껴지지)되지 않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런 의문들을 분명히 깨닫고 알고, ‘죄가 외부에서 사람에게 들어와 사람 속에 정착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2). 사도의 말에 따라 죄가 외부로부터 들어 왔다면 그것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감성된 것을 의미하는데 실지로 육체의 오감은 죄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가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성으로 영혼에 반영되어 들어 왔다는 것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죄는 사람에게 들어 왔으며, 사람을 죽도록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이것을 어떤 ‘경향성’으로 보기에는 지식을 하는 사람 영혼의 지성에 자료로 새겨두고 매 순간 죄에 대한 판단을 ‘경향성’으로 인식하거나 가르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를 소개하기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인식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까지 우리 개혁교회는 이를 잘 이해하고 소화하여 하나님께 신앙을 보이는데 부족함이 없는 찬란한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경향성을 말씀하신 분이 우리의 위대한 선배이시면 선각자이신 JHON Owen 목사님이셨고 그의 저서에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특별히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에 내제하는 죄는 효과적으로 반역을 부추키고 악으로 이끄는 작용을 한다”3).라고 할 때 선에 대하여 반역을 부추키고 악으로 이끄는 작용을 죄라고 하셨고, 죄를 법이라고 하시는데 성립 되게 하셨으며, 그 법이 선에 반역하는 작용을 이끄는 경향성을 일으키는 원리인 것으로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는 설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존 오웬은 죄를 ‘경향성’이라고 정의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까지 그리스도이후 교회가 개혁되고 이제 종말에 이른 이때까지 죄에 대하여 명확한 감성을 지성에 반영하여 지식으로 남기고 교회에 가르치게 하신 분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어떻게 사람의 내부에 침입할까? 죄가 사람의 내부에 들어와 의지를 일으키기 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은 속임 뿐입니다. 죄는 육체가 사물을 느끼며 얻는 감성으로 들어옴 같이 자신을 속여 교모하게도 영혼의 지성까지 들어와서, 원리는 왜곡시키는 ‘속임’으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들어와 판결을 받아내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에 반영된 감성은 속임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죄는 외부에서 사람의 영혼에 들어와 영혼을 사로잡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으로 왜곡된 감성으로 말미암은 속임으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거하는 모든 지식이 죄가 되고, 또한 그 지식은 본유적 지식에 의해 전혀 판단을 받지 아니하고 지식으로 지성에 거하여 육체의 모든 감성의 자료를 판단하는 것이 죄가 되어 결국은 사람의 온 영혼을 죄가 정복하여 사람의모든 행위가 죄의 열매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영혼에 온전한 지식으로 새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어진 감성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면 영혼은 반영된 감성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되면 그것을 지식화 하여 지성에 새겨두고 육체가 반복된 감성을 얻을 때 그 지식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과정은 지식의 탐구 과정을 통해 지식화 한다는 것은 언어의 결합이 필수적입니다. 만약 언어와의 결함이 없는 단순한 감성은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 지식으로 영혼의 지성에 새겨둔다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아시기에 얻은 상당수 지식이 언어와 결합되지 않은 많은 지식들이었습니다. 실지로 육체의 눈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체험한 많은 지식들이 있었으나 그 지식이 온전히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체가 살아 있고 영혼이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에서 지식화 되지 않은 감성은 지성에 지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예를 보여 설명 드려 볼까 합니다.

한 어린아이 있었는데 이 어린이의 출생지가 부모의 출생국가와 다른 국가 아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린아이의 국적은 해외가 되고 외국 사람의 신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의 출생기록을 보면 부모의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부모가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부모의 증명을 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의 출생기록표에 부모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의 부모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어현대 과학은 그런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과학적인 확인 방법들을 개발했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사실 확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 확인을 의지하지 않고 분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의 지성이 그 사실을 확인할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린아이의 시기에 일어난 사람에게 있었던 모든 환경은 실제하고 분명한 육체의 경험이지만 영혼의 지성에 기억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죄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려는 객관자에게 자기의 정체가 발각 되지 않도록 자신을 새겨 두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속임으로 들어와 영혼을 속이고 의지까지 속여 모든 영혼의 지성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내 버렸는데, 사람들은 자신 속에서 결코 죄의 정체를 보지 못합니다.

사도는 모든 죄가 속임으로 육체의 감성에 유입되어 들어오는데 그것조차도 육체의 욕심을 이용하여 들어온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1:15)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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